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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세 사람의 죽음과 한 사람의 인생찬가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4. 6.

세 사람의 죽음과 한 사람의 인생찬가

4월 5일 0시 기준으로 전 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1,154,271명(우리나라=10,156명)이고 사망자가 63,580명(우리나라=177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 사망률이 5%라는 점을 확연히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우리나라는 확진자수의 기세가 좀 꺾인 듯하지만, 이제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확진자 수가 눈덩이처럼 불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1일에 WHO가 이 사태를 ‘Pandemic’(전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발표하기까지도 긴가민가했던 국가들이 이제는 당황한 모습이 역력합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노출된 이 바이러스 사태가 언제까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진행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 지구적인 규모로 심리적인 공황뿐 아니라 경제적인 공황 상태가 덮치고 있습니다. 선진국, 강대국이라고 자부하던 나라들이 자국 내의 허술한 사회 기반 시설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습을 날마다 접하는게 여전히 낯설기만 합니다.

 

의료 장비 확보를 위한 각국의 치열한 경쟁이 낯 뜨거운 수준으로 전개되는 가운데(예컨대 독일과 프랑스로 가야 할 마스크를 가로챈 미국),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생필품을 사재기하면서 사회적 신뢰감과 연대감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경우에도, 갑작스럽게 발생한 비용 4백 불(50만 원 정도)을 지불할 수 저축액을 보유하지 못한 자국민 숫자가 무려 44%나 되는 상황(2017년 통계)이니, 그곳과 다른 나라에 불고 있는 실업 광풍이 미칠 사회적 파장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이런 미증유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기도해야 할지도 캄캄하기만 합니다. 다만 “한낱 티끌에 불과한 우리,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버리는 풀이나 꽃과 같은 우리”(시편 103:14-16)를 긍휼히 여겨주시어 이 고난의 기간을 감해주시도록, 우리의 됨됨이를 죄다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뿐입니다.

 

-“자상한 의사 선생님”의 죽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만연한 와중에 환자를 계속 진료하다가 자신이 감염되어 그저께(4월 3일) 숨진 고 허영구 선생님(59세) 소식을 접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국내 의료진이 숨진 첫 사례라고 합니다. 허 선생님은 지난 달 18일에 의심 증상을 보이다 이튿날 확진 판정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던 중에 폐렴과 심근경색이 진전되어 사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산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들이 대규모 발생하여 지역 보건소가 일반 환자들을 치료할 수 없을 때, 그 환자들을 기꺼이 받아 진료하고 치료해줌으로써 그 지역의 긴박한 의료 사태 대처에 큰 기여를 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중에 확진 판단을 받은 의심 환자 두 명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감염된 게 아닌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평상시 의료 활동을 하는 중에도 많은 환자를 받지 않고 도리어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꼼꼼하게 신경 쓰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환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사소한 이야기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불평을 청취하고 동감해주었습니다. “자상한 의사 선생님”이라는 별명이 그냥 생긴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겐 엄격하고 환자들에겐 따뜻했던 의사로, 그분의 부인은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공부밖에 몰랐던 의사였고, 작은 규칙 하나라도 어기지 않으며, 오로지 환자 치료에만 정성을 쏟은 분, 환자들에게 너무 친절하게 진료를 하다가 밥때도 놓치는 경우도 많았던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편 없이 살아갈 나날이 많이 남아있을 그 부인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변함없이 의사로서 열심히 살아간 남편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라며 남편을 훌륭한 의사로 기리는 지인들의 성원에 힘입어 앞으로 살아가려 한다는 결심을 밝혔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다 스스로 병들어 죽은 허 선생님을 추모하다가, 그분은 참으로 “Good Life”를 사시다 생을 마감한 분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좇아 신실하게 살아가다 순직한 모범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 몸 제대로 건사하며 한 평생 살아가기도 버겁다고 느끼는 인생길에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깊은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힘쓰다가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분들이 있기에 제 삶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되곤 합니다.

 

-더크 빌렘스의 죽음-

허 선생님의 경우와 상황은 다르겠지만, 자기가 구해준 사람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경우를 한 가지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6세기 중엽에 네덜란드에서 ‘메노나이트’파(Mennonites)에 속해 있던 더크 빌렘스(Dirk Willems)의 사례입니다. 당시 그 종파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파'(Anabaptists)에 속하여, 각 신자가 성인이 되어 신앙 고백한 것에 근거해서 세례 받는 것만을 참으로 여긴 탓에 그들은 불법 단체로 지목되었습니다. 주로 자신들의 "비밀 집회"(conventicles)를 통해서 설교와 교육이 진행되었고 그 가운데 이미 세례 받은 이들에게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가 베풀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창시자인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에 의해 세례 받은 사람들 중에는 처형당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더크 빌렘스는 15세에 재세례를 받은 후 메노나이트 신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다른 사람에게 재세례를 집행한 이었습니다. 역사학자 로널드 웰즈가 설명한 내용에 의하면, 어느 날 그는 도둑들과 재세례파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경찰 한 명의 눈에 발각되었습니다. 당시 행정당국의 눈에는 둘 다 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이었지요. 빌렘스가 믿는 바에 따르면, 당국에 거역하는 것(resist the authorities)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당국의 눈을 피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찰의 눈을 피해 도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드문드문 얼어붙은 연못 위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나갈 수 있었지만 자기를 쫓아오던 경찰이 그만 얼음에 빠져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당시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빌렘스 밖에 없었습니다. 그냥 달아났다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사역도 지속할 수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물에 빠진 경찰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경찰은 자기를 살려준 빌렘스의 관용과 사랑에 놀라면서 자기가 구조된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그가 도주하도록 허락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급자가 그에게 행정당국에 봉사하기로 한 선서를 상기시키면서 그를 체포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결국 빌렘스는 체포되었고 며칠 후(1569년 5월 16일) 아스페렌 마을에서 화형 당했습니다(burned at the stake).

 

지금도 메노나이트 신자들 사이에서 그의 이야기는 하나의 전범으로 회자되고 있다고 합니다. 허현 목사는 그의 사례가 죽어가는 자를 살려준 것보다도 그의 행위의 즉각성 때문에 메노나이트 신자들의 정체성을 형성해왔다고 지적합니다. “도망갈 것인가, 살려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복음의 원리와, 그 원리를 적용해야 할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그러한 실천을 감행할 수 있도록 일상의 훈련에 드려져야 할 필요를 잘 현시해 주는 이야기로 본 것입니다. 메노나이트 신자들은 이러한 훈련이 어려서부터 교회 공동체를 통해 배우는 집단적인 창발성과 연관된다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로널드 웰즈는 빌렘스가 자신이 깨달았던 복음의 대의(the cause of the gospel)와 인간의 연대성이라는 대의(the cause of human solidarity)에 죽기까지 충실한 측면에 주목했습니다. 비록 세상의 기준으로는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신실하게 산 그의 인생은 빌렘스 자신에게나 전 세계 모든 재세례파 신자들에게 더없이 가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웰즈는 자신의 책("History Through the Eyes of Faith")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실한 태도(Kingdom faithfulness)를 드러내는 한 가지 표지를 밝혀 준 인물로 그의 사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죄악이 충일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인이 품고 있는 소망의 섬광(Glimpses of Christian hope)을 비추어준 다섯 명의 인물(그를 비롯하여 Mother Teresa, William Wilberforce, Francis Asbury, Abraham Kuyper) 가운데 그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려 45년간 “사랑의 선교사”(Missionaries of Charity)라는 단체를 통해 인도와 많은 나라의 빈민들을 섬긴 노벨 평화상 수상자 마더 테레사(87세에 소천)나,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주신 선물”(a gift of God to our age)이라고 불리면서 네덜란드의 수상이자 신학자이자 개혁주의 신학자로 혁혁한 삶을 영위한 아브라함 카이퍼(83세에 소천)와, 그저 무덤덤한 이야기(prosaic story) 한 자락의 주인공인 더크 빌렘스가 과연 동급에 속할 수 있을까요? 더크 빌렘스는 사망일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생년월일이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무명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평가에 의하면 그러하다는 게 웰즈의 주장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에 온전한 천국이 드러나고 모든 시대의 모든 일들이 다 드러나게 되면, 아마도 이 세상에서 아무도 몰랐던 인물이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되거나, 온 세상의 칭송을 받던 인물이 뒷전에 밀려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이런 측면을 거듭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복음 19:30, 20:16) 결국 빌렘스도 “Good Life"를 누린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품은 소망을 좇아 신실하게 살다가 순교한 모범이었습니다.

 

-스콧 니어링의 죽음-

허영구 선생님은 저와 동갑인 59세(UN 기준으로는 아직도 청년기)로 생을 마감했고, 더크 빌렘스는 생년월일이 알려져 있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요절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쫓아오는 경찰을 따돌리고 도주할 수 있었고 물에 빠진 경찰을 구조해줄 수도 있을 만큼 건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순직하거나 순교한 두 분의 삶을 묵상하던 중, 장수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도모하던 중 순명(殉名)한 유명인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100세까지 사신 분 중에 기억나는 분이 계시는지요? UN 기준으로는 100세가 되어야 비로소 ‘장수노인’(long-lived elderly)의 반열에 들게 되지요. 장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철학자 김형석 교수도 아직 100세가 되지 않았습니다(1920년 7월 6일 생).

 

저는 두 사람이 기억납니다. 먼저는 103세까지 살다가 지난 2월 5일에 사망한 커크 더글라스(Kirk Douglas)라는 배우입니다. ‘스파르타쿠스’(Spartacus)(1960년)라는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유명 영화배우 마이클 더글라스의 아버지이기도 하지요. 그는 1940년대 후반부터 메카시 광풍이 세차게 불어닥치는 미국 내 상황 속에서도, 의연한 자세로 그 희생자 중 한 명인 돌턴 트럼보(James Dalton Trumbo)를 스파르타쿠스의 작가로 고용하는 용기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트럼보는 오스카상을 수상한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년), ‘더 브레이브 원’(The Brave One, 1956년)의 작가이기도 하지요. 이 조치로 인해 더글라스는 당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영화인들이 복귀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결정은 더글라스 자신도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선택 중 하나”라고 밝힐 정도로 자랑스럽고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커크는 좋은 인생을 살았고 영화계에 수많은 후세대들이 이어갈 유산을 남겼으며 지구평화를 이룩하고 대중을 지원하려고 노력한 자선가로서의 역사도 남겼다”라는 아들의 애도를 받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멋진 인생을 산 것일까요?

 

제가 순명한 장수노인으로 떠올린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100세를 다 누릴 즈음에 자진하여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한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입니다. 반자본주의자, 친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로 알려진 인물로서, 1883년 8월 6일에 태어나 1983년 8월 24일에 작고했습니다.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결정적인 시기마다 불공정한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과 그 속에서 고통당하는 서민들의 처지를 목도하면서 고뇌하던 중, 평생을 자생적 사회주의자로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이성이 이끄는 대로 소신껏 한 세기를 산 비범한 인물입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과 톨레도 대학 경제학 교수를 역임한 적이 있으나, 자본의 분배 문제와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인해 교수직에서 쫓겨났습니다. 1917년에 발표한 반전 논문이 화근이 되어 스파이 혐의를 받아 기소되어 연방 법정에 선 전력으로 인해 과격분자, 위험 분자로 몰려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하여 고립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군분투하는 그에게 새롭게 등장한 헬렌(20세 연하)과 함께 스콧은 인생의 후반기를 시작하게 되면서, 1932년부터 버몬트 주 숲 속에서 20년, 1952년부터는 메인 주에서 생애 마지막까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의 삶을 일구어갔습니다.

 

그 기간 동안 “생계를 위한 노동 네 시간, 지적활동 네 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하며 보내는 네 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고 여기며 시간을 안배했고, 1년간 필요한 생활비를 벌어들일 만큼의 현금 작물만 생산하며 지냈습니다. 그 외의 시간을 여가 시간으로 활용하여 악기 연주하고 독서하고 명상하고 집필하는 데 들였으며,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겨울에는 강연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서 스콧은 평생 59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부부 공저인 8권 포함). 스콧만 장수한 게 아니라 아내 헬렌도 91세에 교통사고로 운명(1995년 9월 17일)하지 않았다면 남편처럼 100세를 향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50년 간 단 한 번도 의사를 찾은 적이 없었던 그들의 건강 비결은 소박한 식사, 운동, 휴식 및 금식이었다고 하지요. 채식주의자였던 그 부부는 우유나 치즈도 먹지 않았고, 아침은 과일이나 차로, 다른 두 끼는 푸른 잎 야채를 먹었다고 합니다. 성인병 한 가지 없던 스콧은 100세까지 건강한 삶을 누리다가 100세 생일 한 달 전부터 음식을 조절하면서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하던 중 그 생일을 넘긴 후에 생을 마감하게 되지요. "Living the Good Life"("조화로운 삶"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됨)라는 헬렌의 책 제목처럼 그들은 'Good Life'의 전범을 보여주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4년에 출간된 이 책으로 인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수 많은 젊은이들이 더 간소하고 전원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게 되고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back-to-the-land movement)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의 자서전("The Making of a Radical")에서 가장 도전이 되었던 부분은, 어떠한 주제나 문제에 직면하게 되든지 그것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연구해서 결론을 내리게 되면, 바로 그것대로 말하고 행동한 그의 진정성(Integrity) 있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소명을 그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나는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와 정의를 사회조직 속으로 짜 넣는 작업을 도와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태어났다.”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가 소수의 독점 자본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접하면서 그들과 글과 강연과 토론으로 투쟁했습니다. 20세기 들어 미국 사회가 “야심만만하고 탐욕적이며 권력에 굶주린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즐거운 사냥터”가 되어, 그들이 자신들과 자기 졸개들과 국민들을 출구 없는 막다른 길로 몰아넣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목격한 20세기 초반의 미국 사회 모습을 접하면서 현재 미국이 직면한 문제의 근원을 보는 듯했습니다. 자기들이 품은 야욕의 결과, 그들은 자신들과 동료들 뿐 아니라 지구 전체를 황폐하게 하고, 생명력을 빼앗아 가버릴 것이라고 그는 예견했지요.

 

다른 한편으로 그는 부의 유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미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삶을 신실하게 영위했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도박에는 한 번도 끼여든 적이 없다. 독일 공채를 구입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식이나 채권, 저당권에도 손을 대지 않았고, 어떠한 형태든 불로소득은 가능한 한 피하려고 최선을 다해 왔다.” 그의 자부심 넘치는 고백입니다. 미국 경제가 팽창하고 인플레이션이 불안하게 확산되는 중,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하룻밤 사이에 떼돈을 버는 투기꾼들이 속출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게다가 “지구 상 가장 거대한 도박장”이라고 그가 지적한 뉴욕 증시에서 주가가 널뛰기를 함에 따라 밑바닥에서 최상층으로 단번에 도약하거나 하루아침에 최상층에서 밑바닥 신세가 되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되었지요. 일찍부터 재물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지 않았다면 그도 그런 불나방 같은 삶 속에 파묻힐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인생 초반기부터 부의 유혹에 빠질 번한 경험을 단호한 태도로 극복해 갑니다. 그가 나눈 사례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도덕적인 엄정함이 드러납니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차세계대전 직후에 다른 사회주의자 한 사람과 그가 독일의 한 도시에서 발행한 공채를 약간 사두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후 독일의 재건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8백 달러의 공채가 약 6만 달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가 어떻게 했을까요? 전쟁이 야기한 비정상적인 이득, 독일 국민의 노동을 착취한 결과인 그 이득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그는 그 공채증서를 난로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1920년대에 뉴욕 재력가인 해리어트 G. 플래그가 그에게 당시 금액으로 약 십만 달러나 되는 유산을 남기고 싶다는 유언장을 작성할 때, 그는 두 차례에 걸쳐 거절했습니다. 그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살던 버몬트 주에서 사둔 2,200 달러 짜리 임야가 한국전쟁의 여파로 최소 25,000 달러로 치솟았을 때, 그는 선별적인 벌목으로 소득을 올리면서 자연보호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그 임야를 그 지역 공유지로 양도해버렸습니다. 기증한 임야의 1/3 정도를 나중에 일차 벌목했을 때 무려 5,000 달러에 달하는 장작과 목재가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함께 사둔 집터에 지은 아홉 채의 돌집을 팔 때에는, 시가의 절반으로 젊은 부부에게 양도했습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그 부부는 건물과 농장의 일부를 무려 9만 달러에 팔았다고 하지요. 그때 그가 한 고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아슬아슬하게 부의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지난 2007년에 장석주 시인이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딱 한 사람은 스코트 니어링과 같은 의인”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자기 이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시대, 재물을 최고의 우상으로 섬기는 이 시대에, 차별당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읽고 그들을 대변해주고 그들의 깊은 필요를 채워줄 뿐 아니라, 보편적이고도 공적인 가치를 선양하고 실행함으로써 공동체의 성숙에 기여할 인물이 얼마나 절실히 요구될까요? 스콧 니어링이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하는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사람은 대중의 생활습관, 도덕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규범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에 반대되는 사회에 대항해 거슬러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저항의 길을 따를 것인가?”

 

-테쿰세의 인생찬가-

올해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소명을 좇아 살다가 순직한 허영구 선생님, 자신의 소망을 좇아 살다가 순교한 더크 빌렘스 및 자신의 소신을 좇아 살다가 순명한 스콧 니어링을 묵상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우리 주님께서 한 평생 사셨던 것처럼,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의 생애를 불태운 이들입니다. 자기 심령 속에 비추어진 진리의 빛을 좇아 이생을 아름답게 누리다가 마감한 그들을 향해, 인디언 추장인 테쿰세가 노래한 글 한 자락 읊어주고 싶습니다.

 

“그대의 가슴속에 죽음이 들어올 수 없는 삶을 살라.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그들의 시각을 존중하라. 그리고 그들 역시 그대의 시각을 존중하게 하라. 그대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그대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라. 오래 살되,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목적을 두라. 이 세상을 떠나는 위대한 순간을 위해 고귀한 죽음의 노래를 준비하라. 낯선 사람일지라도 외딴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한두 마디 인사를 나누라.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지 마라.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침 햇빛에 감사하라. 당신이 가진 생명과 힘에 대해, 당신이 먹는 음식, 삶의 즐거움들에 감사하라. 만일 당신이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잘못이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찬 사람처럼 되지 마라. 슬피 울면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되지 마라. 그 대신 그대의 죽음의 노래를 부르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인디언 전사처럼 죽음을 맞이하라.”(테쿰세,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