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가 있다면
2년 전 어느 날 아침에 성경 말씀을 묵상하던 중 예레미야의 소명을 접하며 가슴이 저려왔던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간 장차 멸망될 것이 분명한 유다의 장래를 계시로 거듭 접하고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소명. 그 가운데서도 목숨에 대한 협박과 투옥 및 갖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소명. 누가 이런 일을 선뜻 붙잡고 평생을 변함없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도 수십 년간 메아리 없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해야 했고 그 결과는 유다의 패망으로 끝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구약 선지자들의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실패와 패배가 도래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아무도 귀 기울이는 이 없어도 현재 이 시간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거듭 전해야 하는 인생의 의미 말입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동안 그 당시에 접한 세 건의 죽음이 떠올랐고 그 죽음들이 제게 준 의미와 구약의 선지자들의 소명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2017년 3월 9일에 47세로 생을 하직한 아즈만 교수, 15일에 65세로 소천한 이비 스미스(Evi Smith), 26일에 87년의 생을 마감한 박이문 교수는 각각 최선의 삶을 영위하고자 애쓴 인물들이었습니다. 과분하게 일을 많이 해서 워커홀릭이라는 말을 듣다 점심 식사하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 쓰러진 아즈만 교수는 당시 저보다 10년 연하였습니다. 존경하는 블레인 스미스 목사와 함께 43년간 결혼생활을 영위하다 ALS라는 희귀병으로 소천한 이비는 저보다 거의 10년 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한 우물을 파다 먼 길 떠난 박이문 교수는 저보다 30년 연상이었습니다. 아즈만 교수는 회교도, 이비는 기독교도, 박 교수는 무신론자이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치열하게 자신의 일에 전념하면서도 가족들과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 이들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아즈만 교수는 자기가 그렇게 빨리 생을 하직할 것을 몰랐을 테고 이비는 자기가 그렇게 희귀한 병으로 죽게 될 것을 몰랐을 것이며 박 교수는 자기가 그렇게 오래 살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자기가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은 알고 있었겠지요. 병이나 사고로 생을 마감하지 않기를 소원했겠지만 100세가 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죽을 시기를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그들에 대해 이해한 것이 맞다면 그래도 그들 모두는 지금껏 그들이 산대로 혼신을 다해 일하고 사랑하는 삶을 영위했을 것입니다. 죽을 날을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다만 세부적인 삶의 영역에서 시기에 따라 취한 행동이나 양식에 있어 약간의 변화가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영역에서 자신의 고유한 특성과 자질을 활용하여 최선을 경주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각 사람의 장래의 세부적인 내용이나 사망 시기를 알려주지 않으셨고 그런 지식을 얻으려는 각종 시도를 엄금하셨습니다.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찾아서 미래를 알려고 시도하는 일을 일절 금하셨습니다. 우선은 자신의 미래의 세부 사항을 아는 것이 우리 각자의 인생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악을 끼치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공이 예견된 자는 게으르거나 무모한 인생을 살아가기 쉽고 실패가 예견된 자는 절망하고 좌절할 게 분명합니다. 심지어는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유다의 장래에 대한 예언은 접하고 수령했지만 자신의 인생의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때그때 임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성실하게 임했을 뿐이었지요.
우리 인생이란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알고 있지만 언제 그곳에 도착하는지 알지 못하고 떠나는 나그네 길인 셈입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 각자가 어떤 인생 역정을 경험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진행되는 신비로운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살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살면 저렇게 된다는 잠언 식의 교훈이나 지혜나 존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관찰에서 비롯된 것일 뿐 결코 반드시 성취되고야 마는 절대적인 원리일 수는 없습니다. 도무지 죄다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우연적 요소, 혹은 우연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생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숱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전도서 9:11,12). 그래서 성경에서는 지혜의 근본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그 모든 상황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당신께 예배하고 당신을 존숭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의 근본입니다. 우리네 인생의 날줄과 씨줄이 얼기설기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을 띠고 진행해가더라도 건너편 세상에서 보면 아름다운 한 폭의 장대한 풍경으로 형성될 것을 믿는 태도도 이런 하나님 경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봅니다. 진선미가 충일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서 우리 각자를 이 세상에 내어놓은 게 분명하다면 우리도 진선미를 구현하는 삶을 영위하길 기대하실 것이고 장차 이 세상의 진선미가 상징하는 온전한 진선미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가실 것을 믿는 게 어떻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이겠습니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인생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예상외로 많지 않습니다. 우선 인생의 의미가 없다고 가정할 때는 사실상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자살과 쾌락주의 인생. 부모의 몸을 빌어 태어났으나 부모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지각이 생기는 순간 생을 마감한들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이들 외에도 인생에 의미가 없으니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기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떠날 때 떠나자고 마음먹은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부류에 속한 인간들이 타인의 처지를 고려할 리 만무합니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마당에 자기들이 즐기는 동안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든 우연히 득이 되든 전혀 개의치 않을 테지요. 그렇지만 우리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의미를 만들어가는 게 인생이라고 주장하며 거의 90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간 박이문 교수 같은 이도 존재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50대에 접어들어 한쪽 눈이 거의 실명된 상황 속에서도 생을 마감하기까지 무려 100권이나 되는 책을 집필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사실상 무신론자로 살아간다면 박 교수의 입장에 동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인식론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지만 경험론적으로는 얼마든지 지지받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인식을 품고도 올곧은 삶을 영위하지 않은 이들이 수두룩한 이 세상에서 그들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날마다 숙면을 취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경우에도 사실상 두 가지 선택 밖에는 없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의미가 있으나 그것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고 둘째는 인생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인격적인 신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박이문 교수가 택한 길은 표현을 달리했을 뿐 결국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 전제에 근거한 것이므로 그의 입장도 첫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입장 외에도 인생의 의미를 인정하지만 비인격적인 절대자(예컨대 하늘-유교) 혹은 범신론적 존재들(예컨대 힌두교)을 인정하는 입장도 존재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 인생의 의미란 혼미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미의 근원이나 그 진실성을 밝혀줄 지침이나 증거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진실과 사랑이라는 정미한 인격적 요소들이 비인격적인 절대자나 범신론적 존재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논리성과 합리성을 배제한 일방적 선언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인생의 의미의 토대를 이루면서 전 세계 곳곳에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엄존하는 보편적인 원리, 즉 도(道)의 근원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 도는 인격적인 신을 섬긴다는 이들이 내놓은 소위 계시나 계시의 해석이라는 것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이 도와 어긋나는 어떤 계시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그릇된 계시거나 잘못 수용된 계시일 공산이 큽니다.
이렇게 그 의미란 것이 한낱 물리적인 공간과 비인격적인 실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상 그 의미의 근원이 되는 인격적인 존재, 곧 신(神), 혹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가에 대해서는 다른 소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 하나님의 엄연한 존재만큼은 우리 인생과 온 우주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온 세계에 존재하는 보편적이며 초월적인 삶의 원리, 도덕률, 혹은 도(道)가 바로 이 하나님의 존재를 강력하게 실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가야 갈 길이 있으며 따라야 할 원리가 존재합니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게 바로 이 원리들이어서 의미 있게 인생을 영위하고자 하는 이라면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이 원리의 핵심은 진실과 사랑이요, 진리와 은혜입니다. 모든 문화, 종교, 민족을 초월해서 관통하는 핵심 원리가 바로 이 두 가지 용어에 다 담겨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반드시 진실한 것이어야 하고 우리 가족, 이웃, 사회에 덕을 끼치고 유익을 도모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신, 곧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지 않더라도 평생토록 치열하게 이런 방향의 삶에 매진한 이들이 있는데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거짓되고 이기적이며 사회에 해악만을 끼치는 무리들이 적지 않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비롯된 우주의 도가 궁극적으로 지목하는 데가 바로 유일하신 인격적 하나님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지향해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요? 진실과 사랑, 진리와 은혜가 충일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끊임없이 당신을 기억하고 경외하며 당신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당신께 구하여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게 마땅하겠지요. 이런 삶의 자세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에게 적용해본다면 어떨까요? 아무도 듣기 원하지 않는 유다의 멸망과 그 참혹한 종말을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예언하는 소명은 누구도 맡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한 인생에 종말이 있듯이 한 나라가 명운이 다하여 종말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은 확연한 사실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인생의 끝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줌으로써 그들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과 자기 나라의 패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줌으로써 그들이 보다 참되고 덕스러운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은 같은 차원에 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엄연한 인생의 종말을 일깨워주어도 무도한 삶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듯 참혹한 국가적 종말을 대언해주어도 무법한 삶을 계속 살아가려 했던 유대인들이 존재했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우리와의 차이는 그들은 참담한 국가적 종말과 그 시기를 직접 계시받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이 간여했던 국가적 종말과 우리 각 개인이 감당해야 할 삶의 종말이 똑같이 끝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나 우리는 같은 차원에 서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취할 삶의 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당신께서 허여해 주신 능력과 지혜로 당신께서 인도해주신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전제한 이상 그 의미를 부여해주신 하나님과 당신의 도(道)에 생명을 걸어야겠습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가운데 당신의 뜻을 받들어가는 게 저희 인생의 최고 원리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특별한 계시가 없다면 이미 허락해주신 보편적 도를 따라 우리의 길을 선택하고 우리의 언행을 조화시켜가야겠습니다. 장래는 알 수 없으나 반드시 끝이 있으며 그 과정이 험난하고 비극적이어도 해피엔딩이 마련되어 있음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도 안에서 엄청난 자유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당신께서 허락해주신 은사와 재능과 기회를 좇아 자기만의 유일한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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