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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를 만날 때 세계관이 드러난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6. 12.

낯선 이를 만날 때 세계관이 드러난다

- 낯선 이와의 만남 -

어제 한 단체에서 강의할 “선교와 세계관”을 준비하면서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던 중, 충격적인 사건 한 가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친구 선생님이 보내 주신 말콤 글래드웰의 책 서두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2015년 7월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 근처의 한 소도시(프레리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샌드라 블랜드라는 흑인 여성이 간선도로에서 우회전을 하다가 차선 변경 깜빡이를 켜지 않아, 뒤를 따라오던 브라이언 엔시니아라는 백인 경찰이 그 차(현대 아제라=그랜저)를 세웠습니다. 깜빡이 지적을 받고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던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경찰이 불을 꺼달라고 요청하자, 그녀는 자기 차 안에서 담배 피우는 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며 불복했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은 그녀를 차 밖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불복하자 경찰은 완력을 써서 그녀를 끌어내려고 했고, 완강히 저항하는 그녀를 향해 전기충격기로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메다꽂히면서 체포된 그녀는 강력 폭행 혐의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사흘 후에 그 유치장 안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엔시니아는 텍사스주 순찰대 일반 지침을 위반한 이유로 해임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생기게 된 걸까요? 낯선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하던 중 그 대화가 격렬해지자 완력과 무기가 동원되었다가 한 사람의 자살로 끝난 결말의 원인 말입니다. 엔시니아가 블랜드 차를 세워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그는 블랜드를, 그녀는 엔시니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요? 우선은 상대방이 각각 민간인과 경찰관, 흑인과 백인, 여자와 남자, 동년배(28세와 30세)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요. 그다음의 정보를 알려면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유튜브에까지 소개된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면, 열기는 뿜어 나오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빛은 드러나지 않는 답답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고성과 위협과 완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이었지요.

 

이 사건을 복기하면서 이 책 저자는 경찰관 엔시니아에게 주어진 기회이기도 하고 그가 범한 실수이기도 했던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이 사건이 더 확대되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가 그것을 날려 버린 실수이기도 했지요. 차를 우회전한 이유가 엔시니아의 경찰차가 과속으로 달려와서 길을 터주려고 하다가 깜빡이를 넣지 못한 것이라며 블랜드가 다소 화가 난 표정과 목소리로 설명하자, 엔시니아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가 등장합니다. “말씀 다 하셨나요?”(자기는 진정으로 그런 의미였다고 했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듣기 어려운 상황.) 그 다음에 긴장을 풀기 위해 블랜드가 담뱃불을 붙이는 상황에서, 그의 두 번째 실수가 나옵니다. “담배 좀 꺼주겠습니까? 좀 꺼주시죠?”(업무를 마칠 때까지 잠깐만 흡연을 연기해 줄 것을 부탁하는 대신 다짜고짜로 명령하는 상황.) 그의 말에 대해 “여기는 제 차 안이에요. 왜 제가 담배를 꺼야 하죠?”라고 블랜드가 대꾸하자, 그의 세 번째 실수가 터집니다. “그럼 차에서 내리시죠.”(자존심 상한다고 해서 상대를 하차하게 해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 세 번의 기회를 연속적인 실수로 날려 버린 엔시니아를, 저자는 “어조를 구분할 줄 모르는 깡패였다”라고 규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던 엔시니아의 실수들이 블랜드가 말하는 방식이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들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이루어진 이 사건 조서 내용에 의하면, 엔시니아는 처음 블랜드의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다가가기 전에, 이미 그녀에 대해 의심을 품은 상태였습니다. 먼저 블랜드가 프레리뷰대학에서 나오면서 정지신호를 무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호기심 자극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지점은 대학 소유지에 있던 것이어서 블랜드를 멈춰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차가 간선도로로 나아가자 그 차를 따라붙기 시작하면서, 블랜드를 멈춰 세울 구실을 찾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차가 일리노이주 번호판이 붙은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게 두 번째 호기심 자극점이 되었습니다. 나라 반대편 끝에서 온 사람이 이스트텍사스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빠른 속도로 블랜드의 차 뒤에 따라 붙습니다. 블랜드로서는 백미러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엔시니아를 보면서, 그가 지나가도록 차선을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경찰차가 빠른 속도로 뒤에서 돌진해오는데 누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때 깜빡이를 켜지 않은 것이지요. 엔시니아가 쾌재를 불렀을 순간입니다. 이제 그에게 차를 세울 정당한 근거가 생긴 셈입니다. 그 주 도로교통법에 따라 차선 변경 신호를 하지 않았다고, 또는 그 변경 신호를 충분히 오랫동안(적어도 30미터 주행 기간 동안) 유지하지 않았다고 정차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낯선 이에게 말하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Talking to Strangers: What We Should Know About the People We Don't Know)이지만, 한글 번역판은 “타인의 해석: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 번역을 감수한 김경일 교수에 의하면 이 책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 바로,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올바른 방법은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하는 것이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낯선 이와 이야기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만약 낯선 이와의 대화가 틀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그 낯선 이를 비난한다.”는 구절도 인용하면서, 이런 비난의 최대의 피해자가 우리 자신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엔시니아와 블랜드 사건에서는 최대 피해자는 블랜드가 아니었나요? 결국 낯선 이에게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말을 걸지 않으면, 그 낯선 이 혹은 우리 각자 혹은 양자 모두에게 피해가 생긴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 세계관의 정의 -

이 사건이 “선교와 세계관”이라는 주제에 던지는 화두도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낯선 이, 낯선 종교 및 낯선 문화에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 바로 이 질문을 시발점으로 하여 진전된 대화를 통해 그 사람, 종교 및 문화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고, 이 세계관이 성서적 세계관으로 변화되도록 돕는 과정이 바로 선교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계관의 정의는 제임스 사이어의 것이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옳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는 가정)들이다.” 세계관에 포함되는 요소로 그는 다음과 같은 7가지를 듭니다. (1) 궁극적 실재 (2) 우주의 본질 (3) 인간관 (4) 사망관 (5) 지식의 근거 (6) 윤리관 (7) 역사관. 이것들 중에서 (1)과 (2) 요소가 가장 근본적인 것들로서 다른 모든 요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칩니다. 바로 (1)과 (2) 요소에 근거해 보면, 궁극적 실재에 대해선 세 가지 가능성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첫째가 유신론(Theism)으로서 무한한 인격적 신을 전제합니다. 기독교(가톨릭), 유대교, 회교의 입장입니다. 둘째가 범신론(Pantheism)으로서 무한한 비인격적 신을 전제하면서, 그 신이 바로 우주와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힌두교, 불교, 신도(일본) 등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혼을 가리키는 아트만(Atman)이 신, 곧 모든 것의 혼(the Soul)을 가리키는 브라만(Brahman)입니다. 외부 세계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신이 꾼 꿈이요, 신의 연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외부 우주는 환상(maya)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범신론의 아류인 애니미즘(animism)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일본 신도의 경우에는, 자연을 신의 실체(substratum)로 보면서 정령 신앙을 실행하고 있지요. 범신론의 주장이 지성으로는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직관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범신론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셋째가 자연주의(Naturalism)로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한편 우주야말로 최고의 실재이자 영원하다고 전제합니다. 이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바로 무신론자들이지요.

 

궁극적 실재의 여부가 다른 세계관 요소들을 주관한다는 점은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죄다 창조하신 궁극적인 주관자이시니, 인간관과 사망관 뿐 아니라 윤리관과 역사관까지도 하나님과 당신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 아닐까요?

 

- 두 방향의 세계관 -

세계관이 무엇인지 살펴 본 이 시점에서, 닉 폴라드가 제안한 대로 세계관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관이란 세계에 대한 시각(view of the world)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방식(way of viewing the world)이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주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이미 마련되어 있는 상황들을 관찰해가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동안, 귀납적으로 한 가지씩 차곡차곡 형성해 가는,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 대한 관점입니다. 닉 폴라드는 이것을 상향식 세계관 모델(bottom-up worldview model)로 부릅니다. 한편 후자의 세계관은 세계를 바라볼 때 활용하는 안경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현실을 조직화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사람들이 특정한 답변을 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이 두 번째 방식의 세계관을 품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닉 폴라드는 이것을 하향식 세계관 모델(top-down worldview model)이라고 부릅니다. 전자의 세계관이 사람들이 도달해 가는 결론이라면, 후자의 세계관은 사람들이 활용하기 시작하는 기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이 두 가지 세계관은 별도로 형성되는 것들이 아닙니다. 긴밀한 교호작용에 의해 각 방식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상승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면서 어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세계관을 형성해 가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세계관 자체가 다른 사물들과 현상들을 관찰하는 데 활용되는 안경이 되는 것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곧 상향식으로 형성된 세계관이 다시 하향식으로 작용하여 그 세계관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굳어진 세계관이 변화되는 것은 참 지난한 일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 품고 있는 세계관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과 현상들에 접할 경우, 그 세계관 자체가 새로운 형태로 변형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그 변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회, 문화적 요소들을 고려해 볼 때 그저 고요히 그 변화의 가능성을 접는 예들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그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마저 아예 문을 닫고 있는 심령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 세계관의 개발 -

그렇다면 어떻게 성서적인 세계관을 개발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상향식 세계관 모델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는 것과 동시에, 성경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상고하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현실은 현재 눈앞에 펼쳐 있는 상황인 데 반해, 성경의 실상은 과거, 다른 장 속에서 전개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으로 다른 두 세상을 서로 이으며 세계관을 형성해가는 작업은 조심스럽고도 성숙한 자세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성서적인 시각을 점진적으로 형성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향식 세계관 모델도 활용되어야 합니다. 이미 성서의 내용으로 형성되어 있는 안경을 사용하여 세상의 현실을 이해하고 조직화해 가는 것입니다. “신학”이나 “교리”라는 이름을 띠고 있는 성경적 세계관은 오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 세계관 속에 제시되어 있는 갖가지 원리와 요소들은, 현실 생활의 의미를 이해하고 의미 있게 현실 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 적실한 도움이 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을 실생활 속에 적용해 보는 과정을 통해, 이 성경적 세계관은 보다 깊숙이 우리 영혼에 내재화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상향식과 하향식 세계관 모델이 각각 혹은 긴밀한 교호작용을 통해 성경 내용과 세상 현실을 대상으로 작용하면서, 성경적 세계관이 더욱 확고하게 형성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짐 피터슨이 제안한 대로 에베소서를 잘 읽어 보면, 그 안에는 성경적인 세계관과, 그 세계관의 함축된 의미가 담겨 있는 가치관과, 그 가치관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적용되는 사례들이 각각 기술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1-3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세계관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4-5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더 잘 알기/그와 함께 고통 받기/성령 충만/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연합/영적 성숙과 같은 가치관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5-6장에서는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적용점들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이렇게 먼저 성경적 세계관을 제시하고, 가치관을 소개하며, 구체적인 행동상의 지침들을 제안하는 방식은, 특히 사도 바울의 옥중 서신으로 알려져 있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체계입니다. 세상 각 지역 속에서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향해서,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세계관으로 무장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삶에 있어 거룩한 가치관이라는 줄기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드러내는 열매를 낳는 뿌리가 됨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향식 세계관 형성 방식이라고 한다면, 상향식 세계관 형성 방식도 역시 작동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지속적인 행동을 통해 가치관대로 살아가다 보면 그 가치관은 더 확고해 지게 되고, 더 성숙해진 가치관은 세계관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상향식 및 하향식 세계관 모델의 교호 작용이 계속 진행되다 보면, 어느 샌가 성경적 세계관이 성도들의 심령 속에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시련이 와도, 아픔이 닥쳐도, 불이익을 당해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당신의 이름을 선양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며, 기쁨과 찬양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사역하는 우리나라 선교사가 몇 년 전 사역 보고를 하면서 나눈 말레이 회교도 개종자들의 사례가 떠오릅니다. 공식적으로는 회교도인 말레이인의 개종이 허락되지 않는 말레이시아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배우고 평생 좇기로 결단한 이들은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할 수 있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감옥 갈 각오가 돼 있는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직장 잃을 각오가 돼 있는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과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할 각오가 돼 있는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슬람 정부가 운영하는 신앙 재교육센터에 갈 각오가 돼 있는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칼로 목 베임을 당할 각오가 돼 있는가?

 

성경적 세계관으로 온전히 무장되어 있지 않다면, 그 누구도 함부로 세례 받으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기꺼이 세례 받으려는 말레이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 다시, 낯선 이에게 말하기 -

다시 글래드웰 책 제목으로 돌아옵니다. “낯선 이에게 말하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Talking to Strangers: What We Should Know About the People We Don't Know). 엔시니아와 블랜드와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 만남과 대화 대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세계관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낯선 이와 어떤 자세로 만나고 어떤 태도로 대화에 임해야 할까요? 선교를 하기 위해 외국으로 가느냐, 가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성경적 세계관을 지닌 사람의 삶은 일관성을 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제 묵상에 큰 도움이 되었던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 한 자락으로 오늘 글을 마감할까 합니다.

 

권 선생님이 언젠가 시내에 갔다가 귀가하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서 값싼 완행기차를 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자리를 내주면서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릴 테니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아주머니가 기어코 앉기를 권해서 황송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권 선생님은 무심코 아주머니께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냐고 여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반가운 기색을 띠면서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신기하다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의성지방 시골교회 집사님인 그 아주머니는 한 십 년 전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들어보니 꼭 옛날이야기 같은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주머니는 몹시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귀찮아서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에게 박대를 하며 내쫒은 것이다. 그런데 그 거지가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힐끗 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가 보니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했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그렇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그저 죽어서 사라질 존재가 아닙니다. (...) 불멸의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거나 영원한 광채가 될 이들입니다."(There are no ordinary people. You have never talked to a mere mortal. (...) immortal horrors or everlasting splendours." (C. S. 루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