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강하는 욕정의 삶과 상승하는 성찰의 삶이 연주하는 이중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5)
-인간 이해의 장-
이 작품을 계속 읽어갈수록, 등장인물들의 심정을 섬세하고도 적확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탁월함에 감탄하게 됩니다. 각자가 품고 있는 그 미묘하고 세밀한 감정을 이렇게 글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점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특히 다양한 상황에서 제시되는 은유에는 오랫동안 다양한 삶의 면모를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성찰한 작가의 역량이 묻어납니다. 특히 제 눈에 띈 세 가지 은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의 심리적, 사회직, 영적 면모를 묘사하는 데 아주 유효합니다.
<그림자 없는 사람들>
‘그림자 없는 사람’이란 표현은 안나에 대한 뻬쩨르부르끄 사교계의 평가였습니다. 모스끄바 여행에서 돌아온 안나가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안나 친구가 언급하자, 공사 부인이 이렇게 응대하지요. “가장 중대한 변화는 알렉세이 브론스끼라는 그림자를 달고 돌아왔다는 거죠. 그림 형제의 동화 중에 그런 우화가 있잖아요. 그림자가 없는 사람, 그림자를 빼앗긴 사람 말이에요. 그건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이었죠. 그게 어째서 벌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요. 어쨌든 여자로서 그림자가 없으면 그리 유쾌하지 않죠.” 이 공사 부인이 언급한 우화는 그림 형제(The Brothers Grimm)의 동화가 아니라, 독일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 1781-1838)의 “페터 슬레밀의 기이한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 1835)에 소개됩니다. 여기에서 주인공 페터 슬레밀은 악마와 거래하여 자신의 그림자를 넘겨주는 대가로 부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에서 점차 소외당하고, 그림자가 없는 것이 오히려 큰 결핍이 되어 절망에 빠집니다. ‘그림자’는 사회적 인정, 정체성, 인간의 실존적 필수 요소를 의미합니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인간적 본질을 잃고,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페터 슬레밀은 결국 부를 포기하고 자신의 본래 인간성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며 방랑자로 살아가지요.
이 우화를 “안나 카레니나”의 맥락에서 해석하면, ‘그림자 없는 사람’ 혹은 ‘그림자를 빼앗긴 사람’은,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관계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사회적 존재가 되었으며, 그녀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나는 이제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규범에서 벗어나 있으며, 결과적으로 페터 슬레밀처럼 ‘그림자를 잃은 존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안나는 고귀한 귀부인이었지만, 노골적인 불륜으로 인해 사회적 인정과 신뢰를 상실합니다. 이는 페터 슬레밀이 그림자를 잃고 점차 사회에서 소외된 것과 유사합니다. 사회적 시선 속에서 안나는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며,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불륜 이후 그녀의 내면에는 ‘무시무시한 수치심’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감정’만 남게 됩니다. 심지어 매일 밤 두 남자가 모두 자신의 남편인 악몽에 시달리며, 공포에 사로잡힌 채 깨어납니다.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러한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던 중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불륜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본질적인 존재감을 잃어가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안나가 대표하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은 사회적 인정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로서, 삶에서 자신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선택했지만, 그 대가로 소외와 고립을 겪는 존재입니다. 자신이 염원한 삶을 살고 있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그림자’를 잃음으로써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인간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적 도덕성, 인간관계, 인정받는 정체성이 사라졌을 때, 삶의 방향성을 잃고 방황할 수 있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지요. 브론스끼나 까레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는 젊고 매력적인 군인이었지만, 안나를 얻은 다음 점점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사회적 입지를 잃으며 공허함을 느끼게 되지요.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이 허무로 변했을 때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습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허무와 절망 속으로 빠져듭니다. 후자는 자신의 직위로 인해 사회적 명성은 누리고 있지만, 친밀한 사회적인 유대관계나 인간적인 감정을 상실한 채 소외된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나중에 신앙에 의지하려는 의지를 보이지만, 고립과 불안에 사로잡힌 채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 깊은 성찰의 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이단에 불과한 가르침에 기계적으로 종속된 양상을 띠지요.
이 세 사람 중 브론스끼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안나가 자살한 후 무려 6주간이나 고뇌하면서 자살까지도 염두에 두었던 그는 급기야 터키에 맞선 정교회 세르비아 반란에 참전하기 위해 조국을 떠납니다. 레빈의 이부(異父) 형 세르게이를 만났을 때 그가 이런 말을 던집니다. ”인간으로서 저는.... 삶이 저에게 하등의 가치가 없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적진에 돌진해서 적을 짓밟을지 아니면 제가 쓰러질지는 모르지만, 그럴 만한 육체적인 힘은 충분하다는 것, 그 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삶이 하등의 필요가 없고 이미 식어 버린 마당에 그걸 바칠 만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게 기쁠 뿐이에요. 누군가에게는 소용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세르게이가, “당신은 회생하실 겁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형제들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을 내걸 만한 목표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외적인 성공과 내면의 평화를 베풀어 주시길.”이라고 응답하자, 브론스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응대하지요. “네, 저는 무기로서 어딘가에 소용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이미 다 망가졌습니다.”
브론스끼의 고백은 그가 겪은 내면적 고통과 삶의 무의미함[‘인간으로서 저는.... 삶이 저에게 하등의 가치가 없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품은 새로운 목적을 찾으려는 희생의 의지[‘누군가에게는 소용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를 복합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는 안나의 죽음 이후 삶의 의미를 상실했지만, 전투를 통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함으로써,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갈망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하등의 필요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그걸 바칠 만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게 기쁠 뿐이에요.’라고 말하지요. 이는 그가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는 어떤 더 큰 의미나 목적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브론스끼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개인의 삶이 아닌 공동체와 인류를 위한 희생의 가치를 깨닫고,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재정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그림자’가 서서히 되살아나는 순간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사회적 정체성과 도덕적 지위를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면, 현대판 ‘ 그림자 없는 사람들’은 어떤 양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먼저,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저런 이유로 사회적 신뢰를 잃은 사람들을 ‘그림자를 잃은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이 스캔들이나 부정행위나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대중의 신뢰를 잃으면 사회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하니까요. 다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물질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본질적 가치나 인간관계를 희생한 사람들이지요. 기업가나 연예인이나 유명 인플루언서 중에는 부와 명성을 좇다가 본질적인 인간관계를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현대판 ‘페터 슬레밀’도 존재하지요. SNS에서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진정한 관계나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 말입니다. 끝으로 사회적 위치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적 역할이 변하면서 기존의 ‘그림자’[즉, 정체성과 소속감]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지요. 은퇴 후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가정주부에서 경력을 쌓으려다 사회적 적응이 어려운 사람, 또는 강제 퇴출된 회사 직원이나 정치인들이 ‘그림자’ 없는 아픔을 겪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두 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첫째, SNS와 가상 정체성[혹은 가짜 그림자]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완벽한 삶‘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그 그림자가 실재하지 않거나,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에서 화려한 성공을 과시하지만 실제 삶은 불안정한 사람들이나, 가상의 세계에서 사랑받지만 현실에서는 깊은 인간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보세요. 사실상 현대 사회에서는 ’그림자를 빼앗긴 사람들‘보다, ’가짜 그림자를 걸친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지나친 자유 속에서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과거의 ’그림자 없는 사람‘들은 사회적 규범에 어긋났기 때문에 고립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오히려 자유의 과잉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이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결혼이 자유롭고 인간관계가 쉽게 형성되고 해체되는 시대 속에서, 진정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과 직업이나 가치관이나 인간관계가 자주 바뀌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즉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규범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약해서 ’그림자를 잃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벌거벗은 사람들>
‘벌거벗은 사람들’이란 표현은 레빈이 영적으로 고뇌하던 중 자기 신앙을 대체한 유물론적 혹은 무신론적 신념의 효용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활용한 것입니다. 이런 신념에서 비롯된 용어들과 관련 개념들이 지적인 목적을 띤 활동에서는 유용한 것들이었지만, 일상을 구성하는 실제적인 삶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외투 대신 모슬린으로 지은 옷을 입은 채 처음으로 영하의 날씨에 처한 사람 같은 기분이었고, 어쨌든 간에 자신은 벌거벗고 있으며 불가피하게도 고통스럽게 죽고 말 것임을” 전인격적으로 확신하게 되지요. 이런 깨달음을 얻은 레빈은 또다시 놀랍니다. “비슷한 또래의 주변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신앙을 새로운 신념으로 대체해 놓고는 거기서 그 어떤 불행도 발견하지 못한 채 완전히 만족해하며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결국 ‘벌거벗은 사람들’은 신적 가치나 영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한 채, 유물론적 사고나 냉철한 이성이나 물질적인 욕망만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그들을 깊은 절망과 혼란 속으로 이끕니다.
레빈의 형인 니콜라이 레빈이나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많은 사교계 인사가 그 대표적인 부류입니다. 전자는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며 철저한 유물론자로 살아가지만, 결국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탕으로 인해 파멸하는 육체 속에서 허덕이지요. 그의 이성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어 사망에 이릅니다. 후자의 인물들은 표면적으로는 화려하고 논리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내면적으로는 도덕적 타락과 공허 속에 빠져 있지요. 그들의 유물론적 사고방식은 결국 그들을 허무와 방탕 속에 머물게 할 뿐입니다. 사실상 레빈도 이런 갈등을 통과하기도 했지요. 자신의 무신론적 신념이 실제적인 삶을 위해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고뇌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유년 시절과 대학 시절 몸담았던 집단에 대한 기억에 의거하여 종교는 이미 그 생명을 다했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정하는 오류를 범했다."라는 점을 깨닫고, 주변의 많은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식했지요. 심지어 유물론적인 사고가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음을 경험하며, 삶의 근원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레빈은 결국 농부 표도르의 말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을 위해 사는" 삶의 의미를 자각하면서, 과거에 자신이 알고 있었던 진리를 재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레빈은 ‘벌거벗은’ 이성만으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음을 깨닫고, 점차 신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상 이성과 신앙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닙니다. 과학과 하나님은 상호배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과 그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상호보완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자인 존 레녹스(John Lennox)는 2012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무신론의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폭로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변호한 적이 있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otrqzITuSqE). 전투적인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청중으로 참석한 이 강연에서 그는 먼저 자신을 신을 믿는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자신이 과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과학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끊임없는 강요에 지쳤다고 말합니다. 그는 과학의 발전이 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하고, 우주와 인간의 이성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신성한 지성의 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에 덧붙여 도덕성과 윤리의 기초가 하나님의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증명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임을 강조하며,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궁극적인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성과 신앙이 양자택일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존 레녹스가 지적한 비유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재의 진지한 사상가들이 아직도 하나님과 과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마치 자동차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와 공학(engineering)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동차는 헨리 포드가 공학을 활용하여 만든 제품이지, 공학이 스스로 낳은 산물이 아니지요. 자동차의 기원을 공학이라고만 여기는 사람들은 레녹스가 인용한 체스터튼(G. K. Chesterton, 1874-1936)이 말한 대로, 무(無)가 스스로 변하여 모든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불가해한 하나님이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불평하고 난 후에, 무가 스스로 모든 것으로 변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인척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it is absurd to complain that it is unthinkable for an unthinkable God to make everything out of nothing, and then to pretend that it is more thinkable that nothing should turn itself into everything.) 한 마디로 자가당착이지요. ‘영하의 날씨’에 벌거벗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사람이 연상되지 않나요?
현대판 ‘벌거벗은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신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 도덕적 본질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무신론자가 아니라, 과학적, 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우군 삼아 인간의 깊이 있는 가치를 부정하고, 물질이나 기술이나 이익만을 좇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첫째, 과학과 이성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유물론적 사고에 기반하여 신앙과 영적 가치를 미신으로 간주하는 자들. (2) “오직 과학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믿으며, 종교와 신앙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자들. (3) 인간의 감정과 정신적 요소까지 “생물학적, 뇌과학적 원리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을 띤 자들. (4) 인공지능(AI), 데이터 분석, 알고리즘 등을 통해 인간을 단순한 기계적 존재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지닌 자들. 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과학과 이성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것들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는 점에 대한 무지입니다. 단순한 물질적, 생물학적 설명만으로 인간 존재의 깊이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몰인식입니다. 그리고 감정, 신념, 의미, 윤리 등의 영역은 단순한 화학적 반응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둘째, 기술과 가상세계 속에서 영혼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정체성이 현실이 아니라 디지털 세계나 가상 현실[VR(Virtual Reality=컴퓨터로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헤드셋 등으로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여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여 주는 기술), 메타버스, SNS]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믿는 자들. (2) 기술이 발달하면서 삶의 의미를 가상 공간에서 찾고, 현실과 단절하는 경향을 띤 자들. (3)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보다 온라인 상호작용, 아바타, AI 기반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지닌 자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현실에서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메타버스나 SNS 속 정체성만을 신경 쓰는 사람. (2)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것이라고 믿고, 감정과 직관을 불필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기술 숭배자. (3) “육체를 버리고 의식을 디지털화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다.”라고 주장하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의 정신적·육체적 성질과 능력을 개선하려는 지적·문화적 운동. 장애, 고통, 질병, 노화, 죽음과 같은 인간의 조건들을 바람직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함.] 신봉자. 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인간관계의 본질이 ‘진짜 만남’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고립과 정서적 황폐함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고 ‘가짜 자아’(virtual self)에 몰입하면 결국 자아 정체성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영혼과 정신의 성장 없이 기술과 데이터만으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근본적인 공허함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영적인 가치나 도덕적 책임을 외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걸 얻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자들. (2) 도덕적 가치를 상대적이라고 보며, 어떤 행동이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 (3) 신념이나 영적 가치를 무시하고, 즉각적인 만족과 이득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지닌 자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위해 거짓말과 조작을 서슴지 않는 지도자들. (2) 윤리적 신념 없이 개인적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3) 환경, 빈곤, 인권 문제에는 무관심하며 “내가 잘살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도덕과 윤리를 외면하면 사회는 결국 불신과 혼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결국 인간관계의 황폐화가 이루어지지요. 이에 덧붙여, 순간의 이득을 위해 인간적 가치를 희생하면 장기적으로는 개인과 사회 모두가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의 교사아카데미(Teachers Academy) 책임자인 도나 가워(Dona S. Gower) 박사가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합리주의적 이론들이 악과 은혜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럽 및 도처의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방대한 ‘전쟁과 평화’보다도 훨씬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고전”(Invitation to Classics)]. 가워 박사는 “안나 카레니나”가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악과 은혜’라는 신비로운 초자연적인 개념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유럽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독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전쟁과 평화”보다도 더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신을 배제한 유물론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삶을 사는 캐릭터들에게 이 메시지는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그들은 삶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틀 안에서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도덕적, 영적 차원의 신비 앞에서 한계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인간 내면의 도덕적, 종교적 갈등을 탐구한 것처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역시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물음, 특히 선과 악, 은혜와 절망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이성적 세계관이 결코 완전한 해답을 제공할 수 없음을 현시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
‘문제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이란 표현은 자신의 외도 문제로 고민하던 스쩨빤이 레빈에게 한 말에서 나옵니다. “속 편한 소리 하는구먼. 이러든 저러든 내 알 바 아니란 말이지. 디킨스류의 신사들처럼 말이야. 그들은 왼손으로 난처한 문제들을 집어서 오른쪽 어깨너머로 던져 버리지. 하지만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야.” 역자주에 따르면, ‘디킨스류의 신사들’이란 표현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우리 공통의 친구”(Our Mutual Friend, 1865)에 등장하는 거만하고 무신경한 인물인 포드스냅을 가리킨다고 하지요. 이들은 신적 가치를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무시하거나 적극적으로 외면하며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인물들입니다. 당장의 쾌락이나 사회적 관습, 피상적인 이해관계 등을 우선시하며, 삶의 근본적인 문제나 영적인 가치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기회가 있음에도 이를 의식적으로 피하며, 결과적으로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이 표현을 쓴 스쩨빤이 그 대표격입니다. 자신의 쾌락과 편안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신적 가치를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아내 돌리와의 관계에서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깊이 고민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브론스키의 친구들이나 당시 모스끄바와 뻬쩨르부르끄 사교계를 드나드는 인물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브론스키가 안나와의 관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그를 돕기보다 단순한 쾌락과 유흥에 빠지도록 조장하지요. 이들은 신적 가치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후자는 도덕적 문제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며, 사회적 관습과 체면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유부녀와의 불륜도 “아름답고 위대한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사교계를 드나드는 인물 중에는, 자신의 지적 역량을 과신한 나머지 유물론적 혹은 무신론적 시각으로 경도된 이들도 적지 않았겠지만, 또 다른 다수는 전통적인 정교회 신앙을 표방하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신앙적 가르침을 따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만을 우선시하면서, 그 내면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도나 가워 박사는 ‘그림자’가 없이 산 안나나 브론스끼와 같은 이들이 이 인물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들이라고 역섫합니다. “처음에 안나는 자신의 행동이 부도덕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의 본능적 후회는 그녀가 무감각한 위선자들, 뻬쩨르부르끄 사회의 ‘회칠한 무덤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전”(Invitation to Classics)] 즉 안나나 브론스끼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태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고뇌하며 자살까지도 고려한 반면, 이 인물들은 안나와 브론스끼를 경멸하면서 자신들의 영적 파산 상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3:27에 등장하는 "회칠한 무덤’이란 표현은 예수님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며 사용하신 강력한 은유입니다. 이 비유은 위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겉과 속이 불일치하고 영적 죽음을 은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은유는 단순히 바리새인들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외적인 종교행위보다 내적인 변화와 진정성 있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골칫거리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를 심도 있게 분석한 철학가 중에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있습니다. 그는 “팡세”[Pensées(‘생각들’ 혹은 ‘생각된 것들’이란 의미), 1670]에서, 사람들이 겪는 불행의 원인을 아래와 같이 진단합니다.
“수많은 반목과 정열 그리고 과감하고 대체로 나쁜 모험이 난립하는 궁이나 전쟁에서 사람들이 처하는 고통이나 위험과 같은 여러 소동을 가끔 고찰할 때, 나는 사람들의 모든 불행은 한 가지 점에서 오는데 그것은 방 안에 편안히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all the unhappiness of men arises from one single fact, that they cannot stay quietly in their own chamber.)이라고 누누이 말했다. 살기에 충분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집에 즐겁게 머물 줄 안다면 바다로 나가거나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집을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에 꼼짝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군직을 매우 비싼 값으로 사는 것이고, 대화와 놀이 오락을 찾는 것은 즐겁게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등등.”
즉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방 안에서 조용히 머물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끊임없이 전쟁, 직책, 오락, 사냥 등을 추구하며 분주하게 살아갈까요? 그 이유는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약하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우리 처지의 자연적 불행”(the natural poverty of our feeble and mortal condition)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이를 직면하면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외부의 소란을 찾아 헤매며, 전쟁의 위험과 직책의 고통조차도 그 속에서 위안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휴식을 얻고 나면 다시 “휴식이 만들어 내는 권태”(weariness)가 찾아와 또 다른 “소란을 구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불행과 권태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소란 속에서 위안을 찾으려 하지만, 그 소란 역시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하다는 것이 파스칼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파스칼의 통찰은 ‘문제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이라는 은유와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은 '나약하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자연적 불행'을 직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 활동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문제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도피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태도를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두 가지 점에서 파스칼의 사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첫째, 내면의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의 본능. 파스칼은 사람들이 전쟁, 직책, 사냥, 오락 등 온갖 활동에 몰두하는 이유가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깊은 사색을 피하려는 무의식적 시도라고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문제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도 직면하면 괴로운 영적, 도덕적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골칫거리들 깊이 고민하거나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회피함으로써 당장의 불안을 덜어내려 합니다.
둘째, 소란과 도피의 악순환. 파스칼은 소란을 통해 불행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다시 권태에 빠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던져 버리는 방식으로 살다 보면, 결국 더 큰 문제들이 쌓이게 되고, 다시 새로운 도피처를 찾게 됩니다. 이는 불행을 회피하려다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초래하는 악순환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파스칼의 사상은 ‘문제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이 문제를 회피하는 방식이 결국 내면적 불행을 더욱 심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인간은 내면의 고통과 불안을 피하려고 온갖 활동에 몰두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더 큰 불행을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스칼의 시각에서 보면, 진정한 평온은 소란 속에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극복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적 인간 이해와도 맞닿아 있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은 영적 성찰과 내면의 전환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 작품 속에 활용된 세 가지 은유에서 비롯된 이러한 분류는 인간이 사회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따라 삶의 의미와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즉 “그림자 없는 사람들”은 사회적 도덕성을 상실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 고립되어 불안해 하는 인물들입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한 유물론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삶을 사는 인물들입니다. “문제들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사람들”은 외양적으로 신앙적 가치를 표방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쾌락이나 관습이나 이익 때문에 그것을 외면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인물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분류가 모든 사람을 망라하는 포괄성을 띠지는 못합니다. 레빈과 키티와 같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헌신한 인물들을 담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소설에 등장하는 각 인물이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어, 때로는 이러한 분류의 경계가 모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 분류는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처지와 내면세계와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해 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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