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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하강하는 욕정의 삶과 상승하는 성찰의 삶이 빚어내는 이중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2)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5. 2. 6.

[러시아 뻬쩨르부르끄(Saint Petersburg), Courtesy of Arina Dmitrieva]

하강하는 욕정의 삶과 상승하는 성찰의 삶이 연주하는 이중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2)

-19세기 러시아 사회와 인물들의 갈등-

19세기 러시아 사회는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전통적인 가치관과 새로운 사상이 충돌하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귀족 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사상의 유입과 사회적 변화에 대한 열망이 공존했다는 점입니다.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삶의 방식은 이러한 혼란을 반영하는 다양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도덕적 해이>

귀족 사회의 외도와 불륜. 스쩨빤 아르까지치와 안나 까레니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는 외도와 불륜이 만연했습니다. 스쩨빤은 자신의 불륜을 당연하게 여기고 못생긴 아내는 “관대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안나 역시 브론스끼와의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 가정과 사회적 책임을 저버립니다. 이는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이 붕괴하고, 개인의 욕망이 우선시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형식적인 종교관. 스쩨빤은 종교를 “미개한 국민들을 위한 굴레”로 여기고, 짧은 기도 중에도 다리의 통증으로 괴로워할 정도로 종교적 의무를 형식적으로만 이행합니다.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까레닌은 종교를 자신의 위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며, 성경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귀족 사회의 종교적 위선을 드러냅니다.

 

무능력한 귀족 계층. 스쩨빤은 재능은 있지만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처남 까레닌의 도움으로 관직을 얻고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합니다. 이는 당시 능력보다는 혈통과 인맥에 의존하는 귀족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또한, 많은 귀족이 빚에 허덕이면서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는 모습은 당시 귀족 계층의 경제적 무능력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과 사회적 변화에 대한 열망>

자유주의 사상. 스쩨빤은 “러시아에서는 모든 게 비루하다”, “결혼이란 낡은 제도이며 개혁이 불가피하다”라는 식의 자유주의적 주장을 수용하지만, 자신의 삶에서는 모순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 유입된 자유주의 사상이 실제 삶과 괴리되어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농노제 폐지 이후의 혼란. 레빈은 농업 개혁에 관심을 갖고,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 농민들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구식 농업 방식을 고집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이는 당시 농노제 폐지(1861년) 이후 러시아 사회가 겪었던 혼란과 과도기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여성 교육에 대한 논의. 이 작품 속에는 여성 교육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제시됩니다. 톨스토이는 여성 교육에 대해 편파적인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교육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 레빈의 형 니꼴라이는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고, 레빈에게 “초기의 그리스도교”와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레빈은 공산주의가 사유 재산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공감하지 못하지만, 노동 조직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합니다. 이는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전통과 새로운 사상의 충돌>

레빈과 세르게이의 대립. 레빈은 실질적인 삶과 밀접한 농업에 관심을 갖는 반면, 그의 이부(異父) 형 세르게이는 “공공의 일”이나 사회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러한 대립은 당시 전통적인 가치관과 새로운 사회적 가치관 사이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세르게이는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간의 연관성”을 강조하지만, 레빈은 개인의 경험과 신념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레빈의 고뇌. 레빈은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와 실제적인 삶 사이의 괴리를 느끼고 끊임없이 고뇌합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가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또한, 그는 무신론적인 신념으로 삶을 설명하려 하지만,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영적인 갈증을 느낍니다.

 

안나의 비극. 안나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랑을 선택하지만,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제약에 가로막혀 파멸합니다. 그녀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는 당시 러시아 사회가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수용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사회가 전통적인 가치관과 새로운 사상의 충돌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시기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등장인물들의 삶과 사랑, 고뇌는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개인과 사회가 겪어야 했던 혼란과 갈등을 반영하며, 인간의 본질과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다양한 사랑의 갈등과 그 결과-

이렇게 급변하는 19세기 후반기의 러시아 사회 상황 속에서, 톨스토이는 다양한 형태를 띤 사랑의 관계와 그 결과를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결혼, 그리고 행복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독자들에게 제시합니다. 이 작품 속에 드러난 사랑의 관계는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파멸하는 사랑”, “타협적인 사랑”, 그리고 “성숙하는 사랑”입니다. 그 각각의 실상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겠습니다.

 

<1. 파멸하는 사랑: 안나와 까레닌 / 안나와 브론스끼>

안나와 까레닌의 관계, 그리고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둘 다 ‘파멸하는 사랑’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습니다.

 

(1) 안나와 까레닌의 관계: 이 관계는 두 인물 간의 불화와 갈등이 주된 특징이며, 진정한 사랑의 부재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권태와 환멸. 안나는 어린 나이에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고위 관리인 까레닌과 결혼했습니다. 스무 살짜리 처녀 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여덟 살 난 아들의 엄마이고 오빠인 스쩨빤이 34세라는 점을 고려하자면, 아마도 서른 살 전후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그녀는 남편 까레닌을 정직하고 선량하며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그에게 권태감을 느낍니다. 다른 한편으로 안나는 남편을 출세욕에 눈이 먼 인물로 여기고, 그의 고결한 판단력, 계몽, 종교 등이 단지 출세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남편과의 관계에서 환멸을 느낍니다. 아들 세료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환멸을 느끼지요. 그녀가 아들을 실제보다 더 근사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었던 탓에, 현실의 아들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안나는 남편이 자신의 삶을 질식시켜 왔다고 느끼며,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던 모든 것들이 짓눌려 왔다고 생각합니다.

 

까레닌의 무관심과 공감 능력 부족. 까레닌은 아내를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그는 아내의 불륜을 삶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포를 느끼며,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합니다. 까레닌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을 어려워하며, 그러한 정신 활동을 위험하고 해로운 망상으로 여깁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아내에 대한 질투를 아내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며 아내를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불행을 느낍니다.

 

소통 부재와 감정적 단절. 안나와 까레닌의 관계는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나는 남편에게서 진정한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까레닌은 아내의 감정에 무관심합니다. 까레닌은 자신의 신념과 사회적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며, 안나의 불륜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도덕적인 문제로 접근합니다. 결국, 안나와 까레닌의 관계는 소통 부재와 감정적 단절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안나는 남편에게 점점 더 큰 혐오감을 느끼고, 그의 존재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합니다.

 

까레닌의 고뇌와 변. 까레닌은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삶의 실상과 마주하게 되면서 공포를 느끼고 무력감에 빠집니다. 그는 아내를 용서하고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종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혐오감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증오를 느끼며 고립감과 절망에 시달립니다. 안나가 집을 떠난 후에,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인도로 신흥 그리스도교로 전향하지만, 가짜 구원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안나의 죄책감과 고통. 안나는 자신의 불륜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남편과 아들을 버린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합니다. 자기를 “나쁜 여자”, “타락한 여자”로 여기며, 남편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남편에게 자신의 불륜을 털어놓습니다. 안나는 자기 삶의 모든 의미를 이루는 바로 그것[브론스끼와의 사랑]을 버릴 때만 종교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합니다. 그리하여 점점 더 브론스끼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에게서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며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안나와 까레닌의 결혼 생활은 사랑과 이해 부족, 소통 단절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안나와 브론스끼의 관계: 이 두 인물의 관계는 처음에는 격정적인 사랑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파멸로 치닫는 비극적인 사랑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관계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제약에 대한 갈등, 그리고 개인의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열정적인 시작과 도피. 브론스끼는 안나 또래의 잘생긴 매력남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나는 처음에는 브론스끼가 자신을 쫓아다니는 것을 싫어한다고 믿었지만, 모스끄바에서 돌아온 후 그를 만나지 못하자 비애감을 느끼며 자신의 진짜 감정을 깨닫게 됩니다. 브론스끼와의 만남에서 격정적인 환희를 느끼며, 기존의 삶에 대한 권태감과 불만을 해소하려 합니다. 브론스끼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를 기만해 왔으며, 그의 구애가 싫기는커녕 그것이야말로 자기 일생의 관심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결국 그녀는 브론스끼와의 사랑을 “실현 불가능하고도 지독한, 더더구나 매혹적인 행복의 꿈”으로 여기며,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파멸을 향한 질주. 안나와 브론스끼의 관계는 불륜이라는 사회적 금기를 어긴 것이었기에 처음부터 불안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안나를 열렬히 사랑했던 브론스끼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안나는 브론스끼의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질투심에 사로잡히며, 브론스끼는 안나의 질투에 섬뜩함과 피로감을 느낍니다. 안나는 자신의 처지를 “먹을 것을 적선받는 굶주린 사람”으로 묘사하며 불안감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관계는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게 되고, 브론스끼는 “지긋지긋한 허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안나의 아들 세료자는 그들에게 “모종의 항해자” 역할을 감당하면서, 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이 이미 자신들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불행한 결말. 브론스끼는 안나에게 “당신은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열정에 불과했습니다. 안나와 브론스끼는 “사랑 없는 삶은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파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쾌락을 진리의 탐색이라고 여기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합니다. 안나는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며, 브론스끼와의 관계가 “무시무시한 수치심”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감정”을 가져왔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안나는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브론스끼는 안나의 죽음 후 자신의 삶이 무의미함을 느끼고 전쟁터로 향합니다. 그는 안나의 죽음을 통해 “인간으로서는 이미 다 망가졌”다고 고백합니다.

 

파멸하는 사랑의 비극. 안나와 브론스끼의 사랑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망과 불안정함으로 가득 찬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사회적 규범을 무시한 채 개인의 욕망을 추구할 때 초래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들의 사랑은 “유일한 단 하나의 욕망”이나 “매혹적인 행복의 꿈”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무시무시한 수치심”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감정”만을 남겼습니다. 톨스토이는 안나와 브론스끼의 관계를 통해 외도가 죄악이며, 타인 앞에서 그것에 관해 거짓말하거나, 그것을 무시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안나와 브론스끼의 사랑은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 사이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비극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겉으로는 열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관계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관계를 통해 사랑의 이면과 인간의 욕망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적인 결과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2. 타협하는 사랑: 스쩨빤과 돌리>

스쩨빤과 돌리의 결혼 생활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불행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스쩨빤은 자신의 불륜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아내에게는 관대함을 요구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고, 돌리는 남편에게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하는 무력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쩨빤의 불륜과 변명. 스쩨빤은 34세의 미남으로, 아내보다 한 살 많으며, 쉽게 사랑에 빠지는 성격입니다. 그는 아내에게 불충을 저지르면서도 뉘우치지 않으며, 단지 아내에게 들킨 것을 후회할 뿐입니다. 자신의 불륜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늙고 못생겨진 아내는 당연히 자신에게 관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쩨빤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위선과 거짓말이 자신의 성정에 어긋난다”는 변명을 하지만, 실제로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문제를 회피하며, “삶이라는 꿈으로 망각”하려고 합니다.

 

돌리의 고통스러운 현실. 돌리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후에도 그를 두려워하고 그와 마주하는 것을 싫어하며, 남편의 선량함조차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녀는 남편을 떠나고 싶지만, 남편을 “사랑하는 습관” 때문에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돌리는 남편에게서 사랑이 아닌 연민을 느끼고 분노하지만, 현실적인 제약과 익숙함 때문에 관계를 유지한 것이지요. 이는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어려웠던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 책임 때문에 가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쩨빤의 무책임한 태도. 스쩨빤은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빚이 많고 돈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가정생활에서 큰 만족을 얻지 못하던 중, 불륜을 저지릅니다. 아내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 결과입니다. 그는 결혼 제도가 낡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가정을 유지하려 합니다. 모스끄바와 뻬째르부르끄의 절반이 친척이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정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스쩨빤은 종교를 미개한 사람들의 굴레로 여기며, 내세에 대한 이야기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만, 자신의 일에 무관심하고 게으릅니다.

 

결론적으로, 스쩨빤과 돌리의 결혼 생활은 사랑과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유지되는 허울뿐인 관계였습니다. 스쩨빤은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돌리는 그로 인해 고통받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이들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합니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며, 일상적인 권태와 불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결혼 생활의 실상은 당시 사회의 위선과 불평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3. 성숙하는 사랑: 레빈과 키티>

레빈과 키티의 결혼 관계는 안나와 브론스끼의 파멸적인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성숙과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관계는 개인의 내면적 성장과 함께 깊어지는 이해와 헌신을 바탕으로 하며,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여정을 함께하는 동반자적 관계입니다.

 

처음의 오해와 갈등. 서른두 살인 레빈은 열여덟 살인 키티에게 구혼하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합니다. 그는 자신을 “무능하고 보잘것없는 지주”라고 생각하며 키티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키티 역시 브론스끼에게 실망한 후 괴로워하며,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녀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하며, 사교계의 얄팍한 관계에 환멸을 느낍니다. 레빈과 키티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레빈은 키티를 “인간적인 모든 면을 초월한”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하며, 키티 또한 “삶에 대한 절제된 열정과 스스로의 매력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숙과 이해의 시작. 키티는 독일 조덴의 온천장에서 만난 바렌까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잊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깨닫고, 새로운 삶에 헌신하기로 결심합니다. 레빈은 키티와 재회한 후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자신의 “순결하지 않음”과 “신자가 아님”을 밝힙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네주며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키티는 레빈의 일기장을 읽고 큰 충격을 받지만, 그를 용서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서로의 불완전함과 과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레빈은 키티의 용서를 통해 자신을 그녀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게 되며, 그녀 앞에서 도덕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행복을 더욱 귀하게 여깁니다.

 

사랑의 성장과 헌신. 결혼 후, 레빈은 “주어진 것에 기뻐하고 없는 것에 한탄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소박한 삶의 가치를 깨닫고, 농업에 헌신하며, 노동의 기쁨과 의미를 발견합니다. 키티는 남편의 아내이자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아이를 양육하는 역할을 준비하며 내면적으로 성장합니다. 레빈은 때로는 키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만, 키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남편을 돕습니다. 레빈은 키티가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없는 어린아이들과 무지한 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다.”라는 성경 말씀이 실현된 예라고 여깁니다. 남자 지성인들이 깨닫지 못한 삶의 진리를 이미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레빈은 키티가 이성적인 사고를 넘어선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키티는 레빈이 “자신의 전부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사랑을 해야만 하며, 그가 사랑하는 것은 전부 다 좋은 것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를 사랑한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본질적 가치 추구. 레빈은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신을 위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레빈은 유물론적인 사고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영적인 진리를 추구합니다. 레빈은 농부 포카니치가 고백한, “영혼을 위해 살아간다. 하느님을 기억하며 사는 거죠.”라는 말을 듣고 삶의 방향을 찾습니다. 키티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복음을 나누는 삶을 계획합니다.

 

함께하는 성장. 레빈은 아내의 출산 과정에서 신앙적인 경험을 하고, 그동안 추구해왔던 이성적 사고의 한계를 느끼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레빈은 키티의 고통스러운 출산 과정을 보면서 인간의 존재와 삶의 신비로움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레빈에게 아기가 “불필요한 잉여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아기와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통해 삶의 신비로움과 고차원적인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레빈과 키티는 각자의 내면적 성장을 통해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레빈과 키티의 결혼 생활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며,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격정적인 감정보다는 깊은 이해와 헌신을 바탕으로 하며,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성숙한 관계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들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사랑은 개인의 성장과 함께 깊어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