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하강하는 욕정의 삶과 상승하는 성찰의 삶이 연주하는 이중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3)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5. 3. 1.

(Courtesy of Виктор Соломоник)

하강하는 욕정의 삶과 상승하는 성찰의 삶이 연주하는 이중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3)

-결혼 지침서-

행복한 가정의 일관된 면모와 불행한 가정의 다양한 양상을 소개해 주는 이 작품은 마치 결혼의 지침서 같습니다. 요즘처럼 결혼 이후 이혼이 성행하고 심지어 결혼 자체가 기피되는 현실에서 결혼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결혼의 실상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상고해 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봅니다.

 

<결혼의 의미와 목적>

결혼은 단순한 법적 계약이나 사회적 제도가 아니라, 두 사람의 삶이 서로 얽히고 연결되는 깊은 관계입니다. 이는 두 사람이 형성한 가정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며, 서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이 작품은 결혼을 통해 개인이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삶의 형태가 만들어진다고 강조합니다. 결혼은 서로의 영혼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레빈과 키티의 사랑과 결혼이 이러한 면모들을 잘 드러냅니다. 그들의 경우를 통해 결혼이 지닌 두 가지 의미와 목적이 특히 눈에 띕니다.

 

상호 지원과 동반 성장. 레빈과 키티의 결혼은 각자의 내면적 성장과 깊어지는 이해와 헌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서로 각자의 불완전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각자의 내면적 성장을 통해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이 있었지만, 서로의 과거와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이해의 폭을 넓혀갑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각자의 삶의 의미를 찾고, 서로의 존재가 각자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즉 그들의 진정한 사랑은 각자의 성장과 함께 깊어지며, 각자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서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상호 신뢰 속에 함께 성장하는 복을 누린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동반자 관계. 레빈은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지만, 결혼 생활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영혼과 진리와 신”을 위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레빈이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은 신앙의 안목으로 그것을 이미 꿰뚫고 있던 키티와 결혼한 이후였습니다. 그가 “일상 속에서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엿볼 수 있는 틈새”가 되는 죽음과 탄생의 신비를 관조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이성으로는 따라잡을 수도 없는 높은 경지로” 오묘하게 고양되는 것을 경험한 것도 키티와 결혼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키티는 이미 결혼 전에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임을 깨닫고 그러한 삶에 헌신하기로 결단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통해 영적 진리를 탐구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계획합니다. 그들은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여정을 함께하는 동반자적 관계를 보여 줍니다. 이는 결혼이 각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면모 중 첫 번째 의미와 목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적 결합과 친밀한 유대를 기반으로 두 사람이 결합하는 결혼이,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뿐 아니라 상호 지원해 주는 동반자 관계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서가 결혼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증언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먼저 창세기 1:28에서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결혼의 첫 번째 목적이 자녀를 낳고 그들을 사랑과 훈련으로 양육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결혼은 가족을 이루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둘째로,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고 위로하는 관계로 설계되었습니다. 창세기 2:18에서는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결혼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되는 성적 결합을 포함합니다(창세기 2:24). 이는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넘어, 정서적이고 영적인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깊은 헌신과 사랑의 표현으로, 부부간의 유대감을 강화합니다. (존 스토트,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

 

이러한 보편적인 결혼의 의미와 목적은, 결혼이란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영속적인 계약이라는 점에 주목할 때 올바로 실현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What therefore God has joined together, let no man separate. (마태복음 19:6)]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는 결혼이 단순한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맺은 신성한 약속임을 강조합니다. 부부가 이 사실을 염두에 둘 때야 비로소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더불어 일상을 영위하는 결혼의 영속성이 구현되지요. 한발 더 나아가, 성경은 결혼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천명합니다. 에베소서 5:25-32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 열어 밝히는 그대로입니다. 이는 결혼이 단순한 인간관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관계를 반영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태초에 이루어진 첫 창조 시에 하나님은 인간 아담을 만드시고 그와 함께 삶을 나눌 하와를 지으신 후 결혼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된 새 창조(New creation) 시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교회 공동체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연합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띤다는 점을 명시하셨습니다. 신앙의 눈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거대한 영적 비밀”(great mystery)입니다(에베소서 5:31-32). 결국 결혼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드러내는 신비로운 영적 통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후에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고” 현재도 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신다는 것(에베소서 5:25, 29)을 결혼 생활이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영적 현실은 인간 가족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할 때만 그 신뢰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가정을 하나님 나라의 작은 모델로 제시합니다. 가정에서의 올바른 관계와 역할 수행은 더 큰 교회 공동체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결혼의 이러한 측면이야말로 바로 레빈과 키티의 결혼이 보여 주는 두 번째 의미와 목적과 직결됩니다. 결혼이 지닌 신성(神性) 공공성(公共性)을 논의하는 이러한 면모를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한 것은 새로운 수확이었습니다. 결혼과 연관된 구체적인 성구나 신학적인 성찰이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삶이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을 위해 사는” 것이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와 목적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 드러냅니다.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선행이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키티가 사경을 헤매는 레빈의 형 니꼴라이를 온갖 정성을 다해 효과적으로 섬긴 것이나, 레빈이 스쩨빤과 돌리 가정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기 영지 일부를 내놓는 것에서 장차 그들이 이웃과 사회를 위해 기여할 아름다운 삶의 단초를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너그럽고 “선량한 성품”을 발휘하는 레빈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키티는 이런 레빈을 사랑과 존경을 담아 지지해 줍니다. 레빈이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에 키티에게 다가와, 그녀가 왜 그녀를 얻을 자격이 없는 자기를 사랑하는지 고민된다며 그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합니다. 너무나 황당한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키티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 주면서 자기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자신이 그의 전부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것은 전부 다 좋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그에게 너무나 확실한 이유로 여겨졌다.”(She told him that she loved him because she understood him completely, because she knew what he would like, and because everything he liked was good. And this seemed to him perfectly clear.) 키티의 답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들 미짜를 보면서, “그래, 네 아버지만큼만 되렴.”이라고 축복할 정도니까요. 남편을 온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다 선한 것이라며 남편을 지지해 준 키티의 말은 낮은 자존감으로 고민하던 레빈에게 더없는 자긍심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이 키티의 면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당신께 순종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혼의 실상>

결혼은 단순한 법적 계약이나 사회적 관습을 넘어, 개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관계입니다. 이 작품은 결혼의 실상을 다각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장차 결혼할 이들과 이미 결혼한 이들에게 던지는 시사점과 교훈이 다수 존재합니다.

 

사회적 압박과 개인의 갈등. 결혼은 종종 사회적 기대와 압박에 의해 형성됩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결혼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 하거나,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나가 어린 나이에 스무 살 연상인 까레닌과 결혼한 것은 집안 어른들의 중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부모가 짝을 정해 주는 프랑스식 관례나, 처녀들에게 완전한 자율을 허용하는 영국식 풍습도 통용되었지만, 안나의 결혼은 중매를 통한 러시아식 풍습을 좇은 경우였습니다. 연애결혼을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강했기에, 안나가 중매를 통해 나이차가 많이 나는 고위 관리인 까레닌과 결혼한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안나는 남편과 애정 없이 결혼한 것을 후회하며, 이것을 “끔찍한 실수”라고 여깁니다. 사회적 압박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기대를 형성하고, 개인의 선택을 제약합니다. 특히 여성에게는 특정한 역할과 희생을 강요하며, 이는 개인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개인의 갈등은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욕망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하며, 이를 해결하는 과정은 개인의 성장과 관계의 성숙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누적될 경우, 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레빈은 결혼 생활이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혼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면서도, 그 행복이 항상 지속되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호수를 떠다니는 보트의 유연하고 행복한 운행과 같은 결혼 생활’을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자잘한 일상적인 일들로 가득합니다. 아내와의 생활은 특별하지 않았고, 그가 예전에는 경멸했던 소소한 일들이 이제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결혼 생활의 기본적인 부분이 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처리하는 매 순간이 도전과 갈등의 연속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결혼이 단순한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삶을 조율하고 이해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그가 결혼에 대해 가졌던 이상적인 기대와는 상반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낭만적인 사랑이나 완벽한 행복을 기대하며 결혼하지만, 현실은 끊임없는 노력과 타협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괴리는 권태감이나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권태감의 침입. 안나의 결혼 생활을 규정하는 단어 한 가지가 바로 ‘권태’입니다. 그녀는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인 남편을 바라보면서 불쾌감이나 불만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아들인 세료자에 대해서도 ‘환멸 비슷한 감정’을 품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근사한 아들 모습과는 동떨어진 그의 모습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자기가 참여하는 무도회도 더 이상 흥겹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덜 괴롭고 덜 지루한 무도회’로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키티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부인에게 어떻게 무도회가 지루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어떻게 나한테 무도회가 지루하지 않을 수 있죠?”라고 응수하지요. 그토록 소원하던 안나의 사랑을 얻어 낸 브론스끼도 그녀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하던 중에 벌써 권태감을 느낍니다. “행복을 소망의 실현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영원한 과오”가 자기에게 발생한 것을 직감하면서, 자기 마음속에서 “욕망에 대한 욕망이, 권태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굶주린 짐승이 먹을거리가 있기를 바라며 굴러 들어오는 건 뭐든지 붙잡고 늘어지듯, 브론스끼 역시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때론 정치에, 때론 신간 서적에, 때론 그림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권태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감정입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설렘이 사라지면서 관계는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권태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의무의 갈등. 결혼은 사랑의 결합으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무와 책임이 강조되면서 사랑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안나와 브론스끼의 관계는 사랑의 열정이 결혼의 의무와 갈등을 일으키며,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집니다. 안나와 브론스끼의 관계는 처음에는 강렬한 사랑의 열정으로 시작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료되어 깊은 감정을 나누지만, 이 사랑은 곧 결혼이라는 제도적 틀과 충돌하게 됩니다. 브론스끼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열정이 결혼 생활의 권태를 잊게 해주지만, 동시에 안나는 남편과 아들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도 느끼게 됩니다. 이로 인해 안나는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되지요. 결국, 안나의 사랑은 결혼 생활의 의무와 갈등을 일으키며,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에 직면하게 됩니다. 안나의 사례는 결혼이란 것이 두 개인의 단순한 사랑의 연합만이 아니라, 서로의 삶과 자녀의 삶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는 장기간의 여정임을 열어 밝히는 반면교사인 셈입니다. 사랑과 의무의 갈등은 결혼 생활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사랑은 감정적인 끌림이지만, 의무는 책임감과 도덕적인 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식어버린 관계에서 의무감만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개인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과 자아 상실. 결혼 생활에서 개인은 종종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상대방의 기대에 맞추려는 압박을 느낍니다. 예컨대 안나는 연상의 남편과 애정 없이 결혼했으며,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결혼했습니다. 이러한 결혼은 안나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이겠지요. 그녀는 남편 알렉세이가 지난 8년 동안 자신의 삶을 질식시켜 왔다고 느낍니다. 그녀 안에서 살아 숨 쉬던 모든 것들이 억눌려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안나가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삶에서 해방되는 돌파구로 브론스끼와 연애하는 결단을 내리지만, 안나는 그 관계가 낳은 수치심과 혐오감과 브론스끼에 대한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 모르핀을 복용하는 단계까지 망가집니다. 브론스끼와의 말다툼 후 죽음을 떠올리며,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발상"이라고 여기며 자살을 결행하지요. 이것은 안나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에 휩싸였음을 보여줍니다. 안나의 사례는 결혼이 남편이나 아내의 정신적, 정서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정신적 고통과 자아 상실은 결혼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관계의 불만족, 역할의 강요, 사회적인 압박 등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결혼의 실상은 이상적인 환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통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개인의 성장과 관계의 성숙을 위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끊임없는 노력과 이해, 그리고 헌신을 통해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의 실상에 대한 논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책임을 동반합니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지원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결혼은 사랑, 의무, 희생, 그리고 성장의 복합적인 경험이며, 그 실상은 개인의 가치관, 사회적인 환경, 그리고 관계의 역동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혼의 역설: 짐인가, 날개인가?>

브론스끼의 친구 중에는 세르뿌호프스꼬이라는 장군이 있습니다. 그는 브론스끼와 출신이나 재력 측면에서 비슷한 동갑내기 친구로서 그 연배 중에는 아주 드물게 두 계급 승진에다 무공 훈장까지 수여받고 중앙아시아에서 금의환향한 장군이었지요. 연대장이 그의 복귀를 축하하여 개최한 연회장에서 브론스끼는 그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미 결혼한 그 친구와 지난 시절의 회포를 풀던 중에 브론스끼는 그가 유력자가 될 수 있었던 뛰어난 자질을 엿보게 됩니다. 그는 사태와 관련된 면밀한 고민과 사물을 이해하는 뛰어난 능력,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보기 드문 탁월한 지력과 언변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가 안나와 새로운 관계를 트고 있던 브론스끼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해줍니다. 

 

“우리는 동갑내기야. 아마도 숫자로만 따지자면 자네가 나보다 더 여자를 많이 알겠지. 그렇지만 나는 기혼자이고 ‘누군가 말했듯이’ 사랑하는 아내 하나만 알고 나면 1천 명의 여자들과 사귀는 것보다 뭇 여성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네. 자, 내 생각을 말해 보겠네. 여자들이란 남자의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걸림돌이야. 여자를 사랑하면서 무슨 일을 하기란 어렵단 말이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주 편리한 한 가지 방법이 존재하네. 바로 결혼이네.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가만, 가만 있어보! 그래, fardeau(무거운 짐)을 나르면서 양손으로 무언가를 하려면, 그게 등에 단단히 애여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게 바로 결혼이지. 결혼한 뒤로 나는 그 점을 실감했네. 갑자기 내 양손이 홀가분해졌지 뭔가. (...)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들보다 물질적이라네.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해내지만, 그들은 언제나 terre-à-terre(세속적이야).”

 

이 조언은 뛰어난 이해력과 지력을 지닌 세르뿌호프스꼬이가 인간 관계와 결혼 생활에 대헤 오랫동안 관찰하고 고민한 산물이었습니다.  이 조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비결과 함께 결혼의 의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경험이 아닌 헌신이 인간 이해를 깊게 한다세르뿌호프스꼬이는 사랑하는 아내 하나만 알고 나면 1천 명의 여자들과 사귀는 것보다 뭇 여성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양보다 질의 문제임을 강조합니다. 단순히 많은 여성을 만나고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 인간 이해를 깊게 하지 못하며, 오히려 한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헌신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피상적인 관계보다는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관계 속에서 더 깊은 지혜를 얻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결혼은 삶의 짐(fardeau)이면서 동시에 자유를 주는 구조적 틀이다. 는 결혼을 무거운 짐(fardeau)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이 짐이 잘 자리 잡으면, 즉 결혼이 안정되면 남자의 손이 자유로워져 더 많은 일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결혼이 단순한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질서를 잡아 주는 구조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결혼은 때때로 짐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명확하게 해주는 틀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인식. 세르뿌호프스꼬이는 남성은 사랑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지만, 여성은 언제나 물질적(terre-à-terre, 세속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즉 남성은 사랑을 동기로 삼아 이상을 추구하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반면 여성은 현실적인 삶과 직접적인 생존과 관련된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식 말입니다.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고정관념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남성과 여성의 삶에 대한 본능적 태도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균형을 필요로 하는 존재. 인간은 본능과 이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결혼은 이런 균형을 만들어 주는 틀이며, 깊이 있는 관계 속에서만 인간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책임이 공존할 때, 인간은 더 성숙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르뿌호프스꼬이의 조언은 진정한 인간 이해는 표면적인 경험의 축적이 아니라, 깊이 있는 관계와 헌신 속에서 얻어진다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에 덧붙여, 인간이 대인 관계, 특히 결혼 관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하는지를 통찰하며, 결국 진정한 자유는 책임과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이 조언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결혼을 통한 삶의 조정이나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현실적 접근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여성들이 접할 때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여성을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여자가 남자의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걸림돌이다.), 결혼을 무거운 짐으로 보는 시각(결혼이란 무거운 짐이지만, 등에 잘 지면 양손이 자유로워진다.), 여자는 물질적이고, 남자는 사랑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한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여성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 조언이 여성들에게 보다 의미 있는 언명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결혼은 남성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여성도 삶의 안정과 성장을 얻을 수 있는 상호적인 관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여자는 물질적이고 남자는 이상적이다”라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남녀가 각기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를 보완하는 존재라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결혼을 단순한 짐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고 성장하는 파트너십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조언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읽으면 여성들에게 불편한 논리가 될 수도 있지만, 관계의 균형과 상호 보완적 의미로 재해석하면, 여성들도 어느 정도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외도(cheating or marital infidelity)의 파장-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는 ‘외도’(外道)입니다. 안나와 브론스끼의 불륜 관계나 스쩨빤이 돌리에게 저지른 외도는 각자의 삶에 아래와 같은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복잡한 감정적, 사회적 파장을 일으킵니다.

 

심리적 고통. 외도를 저지른 스쩨빤은 죄책감보다는 위선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을 괴로워하고, 돌리는 남편의 연민에 분노합니다. 불륜을 범한 안나와 브론스끼는 수치심, 혐오감,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까레닌은 아내의 외도를 "삶의 그림자를 다루는 공무의 영역"에서 벗어난 삶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력감과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가정 파탄. 스쩨빤과 돌리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유지되지만, 돌리는 남편에 대한 애정을 잃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안나의 중재로 그들의 관계는 봉합되지만, 스쩨빤이 삶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해답으로 “만사를 잊는 것”을 택하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은연중에 지속됩니다. 정작 화해자 역할을 자임한 안나와 까레닌의 가정은 완전히 파탄나고, 안나는 브론스끼와 법적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리지도 못한 채 사회적으로 고립됩니다.

 

사회적 낙인. 외도는 안나와 브론스끼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그들의 관계는 사교계에서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안나는 사교계에서 점차 소외되며, 그녀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결국 그녀는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됩니다.

 

비극적 결말. 까레닌은 아내가 집을 나간 이후에 심적으로 혼란한 상황 중에서 자기 가정을 돌보아 주던 리지야 이바노브나의 인도로 당시 “뻬쩨르부르끄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는 신흥 그리스도교”로 전향합니다. 마치 구원파와 같은 그 집단이 설파하는 “가짜 구원”에 매달립니다. 브론스끼와 새살림을 차린 안나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브론스끼는 폐인처럼 지내다 뭔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전쟁에 참여하여 삶의 실마리를 되찾으려 합니다

 

외도는 일반적으로 ‘바람피운다’는 완곡어법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지만, “부부관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행위”로 지목됩니다. 그저 한쪽 배우자의 일탈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부부관계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깨뜨리는 심각한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인류 역사는 이런 심각한 일탈이 세계 곳곳에서 만연했다는 점을 증언합니다. 심지어 이런 행태를 엄중한 범죄로 처단한 곳도 예외가 되지 않았습니다. 영국 글래스고 대학에서 강의했던 성서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1907-1978)가 지적한 대로입니다. “유대교에서 간음죄보다 더 무서운 죄로 여겨졌던 죄가 없고, 또 예언자들과 현인들의 책망을 통해 판단해볼 때, 간음보다 더 흔한 죄가 없었다는 것은 인간성의 역설(the paradox of human nature)이다.”(“오늘을 위한 십계명”) 고속도로상에서 단 한 번의 졸음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생기듯이, 의도적으로 이런 행위를 범하거나 엉겁결에 이런 관계에 빠진 것으로 인해 급전직하하는 인생을 경험한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지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The one who commits adultery with a woman is lacking sense; He who would destroy himself does it. (잠언 6:32)]

 

간음에 대한 생생한 경고가 자주 등장하는 구약의 잠언 중에 그 압권은 잠언 5장입니다. 이 장은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성적 유혹을 피하고, 정결한 삶을 유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경고와 교훈(1-6절): 지혜를 따르고 바르게 행동해야 하며, 유혹적인 여인의 달콤한 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유혹적인 여인의 유혹은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고통과 죽음을 초래합니다.

유혹의 위험(7-14절): 유혹에 빠지면 명예를 잃고, 재산을 빼앗기며, 결국 후회와 수치 속에서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혹적인 여인에게서 멀리하고, 그녀와 가까이하는 것조차 피해야 합니다.

충실한 결혼생활(15-20절): 아내에게 충실하며, 부부 관계에서 기쁨을 찾으라고 권면합니다. 다른 여인의 매력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감찰과 악인의 멸망(21-23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악한 자들은 결국 스스로의 죄에 빠져 멸망할 것입니다. 자제력을 잃고 어리석게 사는 사람은 결국 파멸로 가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장은 음녀의 유혹을 피하고 아내에게 충실하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악한 길을 가는 자들은 스스로의 죄로 인해 멸망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음녀의 유혹에 빠지는 자가 당하게 될 위험천만한 삶의 실상에 주목해 보세요. 사회적 불명예를 감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언약 공동체에서 자기 가족의 실체가 상실됨으로써 가정의 입지가 사라지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N. T. 라이트).

 

성경이 간음을 엄금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개인의 도덕적 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그 가족 전체의 삶을 파괴하는 사회적 범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크뤼제만, “자유의 보존”). 고대 유대 사회에서 인간 생활은 대부분 대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했기에, 가정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었습니다. 가족 구성원의 생존을 위한 곡식이나 물품을 생산하고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곳은 오직 가정뿐이었습니다. 이런 공간 내에서 자신의 자녀를 낳고 그들을 양육하여 재산을 상속해주고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는 일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간음은 바로 이런 가정사를 위태롭게 하여 이웃이 누리는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중차대한 범법행위였습니다. 그리하여 간음을 범한 남녀는 둘 다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레위기 20:10, 신명기 22:22).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런 극형도 많은 일반인의 간음 행태를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범죄와 관련된 율법을 가르치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도 이것과 연루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사무엘상 2:22, 예레미야 23:14).

 

-프리섹스의 이면-

결혼한 이들 간에 발생하는 간음을 개인의 일탈로 간주하고, 미혼 연인 간의 프리섹스나 ‘원 나이트’[one-night stand, 잘 알지 못하여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과 성관계를 함]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해야 할 무슨 통과의례로 여기는 사회적 통념이 우리 주위에 만연합니다. 이런 세태에 대해 “안나 카레니나”가 어떠한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요? 미국 윌리암스 칼리지(Williams College)의 줄리 캐서데이(Julie Cassiday) 교수가 이 작품에 대해 강의하는 중에 접한 질문이 바로 이 문제와 연관됩니다. “1960년대 후반 피임약(the pill)과 성 혁명이 가져온 자유연애(free love)는 19세기의 많은 도덕적 가치들을 부정했습니다. 물론 인간의 감정은 여전히 변함없지만, 오늘날 이혼율 증가, 깨어진 가정, 그리고 휴대전화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적 콘텐츠 등 그에 따른 현실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톨스토이의 시대에 뒤처진 도덕적 관점이 여전히 이처럼 긴 분량의 소설적 탐구를 통해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캐서데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먼저 역사적 맥락의 한계를 짚었습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이혼이 어려웠던 이유와 같은 역사적 배경은 오늘날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톨스토이가 작품 속에서 다루는 도덕적, 윤리적, 심리적 딜레마는 여전히 현대 사회에도 유효하다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배신을 느끼고, 거짓말을 하며, 약속을 어기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하면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적 고뇌와 심리적 갈등이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톨스토이가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이러한 묘사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인간 사회의 도덕적 문제와 인간관계에 대한 귀중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은 캐서데이 교수가 18세에서 22세 사이의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가르칠 때 이미 경험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노골적으로 성을 묘사하는 콘텐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 속에 놓여 있는 그 학생들도 이러한 도덕적이고도 심리적인 딜레마에 공감했습니다.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프리섹스나 성적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그 행위에도 상호 존중과 신뢰가 불문율로 존재할 뿐 아니라, 그 주체들은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합니다. 관련 당사자들에게 쾌락만을 안겨다 주는 프리섹스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이런 면모와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한 가지는, 안나와 브론스끼가 무려 1년간이나 그토록 갈망하던 그 “매혹적인 행복한 꿈”(entrancing dream of bliss)이 충족된 후 그들이 취한 행동과 그들 마음속에 생긴 변화였습니다. 안나는 브론스끼의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기쁨으로 황홀해서였을까요? 정반대였습니다. “하느님! 저를 용서하세요!”(My God! Forgive me!)라고 내뱉을 정도로, “그녀는 뼈저리게 죄책감(physical sense of her humiliation)을 느꼈다.” 브론스끼는 어떠했을까요? “반면 그는 흡사 자신에 의해 생명을 잃은 육신을 바라보는 살인자(murderer)의 심경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벌거벗은 영혼이 마주한 수치심이 그녀를 짓눌렀고, 곧 그에게도 옮아왔다.”(Shame at their spiritual nakedness crushed her and infected him.) 외도를 범하는 이들에게 경고가 되는 장면입니다. 그것을 저지르기 전에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하나의 욕망”이나 “매혹적인 행복의 꿈”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을 결행하는 순간 당사자들의 마음은 지옥으로 변했으니까요. “무시무시한 수치심”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감정”만 남았을 뿐입니다. 안나와 브론스끼가 느끼리라 여긴 행복이란 결코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혐오스럽게 끔찍한 공포만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뿐이었지요.

 

성경은 섹스가 이러한 도덕적이고도 심리적인 딜레마를 품고 있는 이유를 다각도로 설명해 줍니다. 특히 신약의 고린도전서에서 제시하는 성행위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고린도전서의 집필자인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Corinth,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코린트 지협의 남단에 있던 항구 도시] 사회가 성행위에 대해 오해한 세 가지 지점에 대해 주목하면서, 그것의 의의를 열어 밝힙니다. (Karen Lee-Thorp, Story of Stories)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적 시각. 그 지역의 일부 그리스인들은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로 이어졌습니다. 첫째, 영적인 사람은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자유분방한 견해와 둘째, 영적인 사람은 육체의 욕망, 특히 음식과 성욕을 억제해야 한다는 금욕적인 견해입니다.

 

결혼과 성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일부 사람들은 결혼 외 성관계는 물론 결혼 자체와 결혼 생활 내에서의 성관계까지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결혼하지 않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를 영적인 사람의 본보기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그러한 생활 방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권장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혼을 권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시각. 현재 우리가 논의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견해입니다.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는 매춘이 일반적인 오락으로 여겨졌고, 외도와 같은 문란한 성행위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시각에 대해, 자유로운 성행위가 결코 무해하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그것은 반드시 영적인 결과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성관계는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매춘부와 성적 관계를 맺게 되면, 그녀와 한 몸이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몸과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며, 성령께서 그들의 영뿐만 아니라 몸에도 거하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인 몸을 창녀와 합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육체적인 행위가 영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가르쳤으며, 결국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프리섹스와 원 나이트가 성행하는 현세대를 향한 성경의 경고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