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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하강하는 욕정의 삶과 상승하는 성찰의 삶이 연주하는 이중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4)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5. 3. 15.

(Moscow, Courtesy of Serg Alesenko)

하강하는 욕정의 삶과 상승하는 성찰의 삶이 연주하는 이중주,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4)

-인생의 의미 탐구-

이 작품이 안나의 결혼 생활과 불륜 행각만 주를 이루었다면, 러시아식 ‘막장 드라마’라는 평판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묘사하는 프랑스식 퇴폐상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테니까요(이현우,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그 대신 이 작품은 안나의 이야기와 거의 대등한 분량으로 레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안나가 맺은 인간관계를 통해 부부간에 발생하는 사랑과 배신의 역학 관계와 불륜이 초래한 깊은 고뇌와 죄책감의 현실이 드러났다면, 레빈이 겪은 삶의 궤적을 통해 한 인간이 겪는 도덕적 갈등과 존재론적 탐색 과정이 완연히 계시됩니다. 한편으로 레빈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돌아보며 도덕적 타락과 양심의 가책을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며, 진정한 행복은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에서 온다고 깨닫지요. 다른 한편으로 레빈은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이성과 신념의 한계를 인식할 뿐 아니라,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다가, 결국 신과 영혼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러한 측면은 그가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레빈이 밟은 사유의 궤적>

먼저 레빈이 지난 2년간 이어온 사유의 궤적을 한번 되돌아보겠습니다. 그것을 간단히 정리하면서, 특히 그가 삶의 의미를 탐색해 가던 중 이성의 한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 도달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죽음과 삶의 본질에 대한 초기 깨달음. 레빈의 사유는 병든 니꼴라이 형을 보면서 처음으로 죽음과 고통, 그리고 삶의 무상함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형의 죽음으로 삶의 유한성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죽음이 “일상 속에서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엿볼 수 있는 틈새”가 된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삶을 설명하지 못하거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악마의 사악한 조롱거리“에 불과하다고 느끼면서,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삶의 본질적 문제에 깊이 고뇌합니다.

 

삶 속에서의 기쁨과 사유의 간극.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같은 행복한 경험을 통해 기쁨을 맛보며 살아갔습니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행복했지만, 이는 자신의 삶이 본능적으로 따라온 영적 진리, 즉 신을 위한 삶를 의식적으로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깨닫습니다.

 

신념의 기초와 의식적 깨달음. 레빈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배운 영적 진리, 즉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는 믿음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이런 신앙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왔음을 인정하며, 그 신앙 없이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성과 영적 진리의 대조. 레빈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이성적으로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의 사유는 오히려 그를 혼란과 회의감에 빠뜨립니다. 스스로가 만든 논리의 틀 안에서 갇혀 진정한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으니까요. 결국 그는 인간의 이성이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성은 오히려 생존 경쟁과 이기심을 합리화하는 도구일 뿐, 그것을 통해 ”비합리적인“ 선과 사랑 같은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는 이러한 이성적 한계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측면을 “이성의 교활한 기만”과 “이성의 사기”로 간주합니다.

 

삶이 주는 답변. 레빈은 삶 자체가 무엇이 선하고 나쁜지에 대한 답을 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에게 내재된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외부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그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자신의 영혼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인정하며, 이는 이성이 아닌 초월적이고 영적 차원의 각성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더 이상 이성적인 답을 찾으려 애쓰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사유의 종합적 결론. 레빈은 이성이 아닌 영적 본능과 신앙을 따라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는 한편으로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초월적 가치와, 신적 진리에 대한 신뢰를 반영하며, 인간의 삶이 단순히 이성적 설명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레빈의 사유는 죽음과 삶의 본질에 대한 고뇌에서 시작해, 이성과 신념의 역할을 비교하며, 결국 삶의 의미는 인간에게 내재된 영적 진리올곧은 신앙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으로 귀결됩니다. 이 영적 각성은 그가 삶의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레빈이 도달한 영적 각성>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의 8부에 묘사된 이러한 영적 각성은 레빈의 사상과 세계관의 전환을 묘사하는 중요한 장면이 된다는 말입니다. 레빈이 깨달은 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목적에 대한 깨달음. 레빈은 인간이 자신의 이해와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 존재(=신)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은 인간의 삶이 단순히 물질적이고 과학적인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며, 삶의 궁극적 목적이 선과 신성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善)의 본질에 대한 이해. 레빈은 선이란 인과 관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이유나 보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선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 모든 사람에게 내재된 보편적인 지식으로 존재합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 재인식. 레빈은 자신이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인식했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지성이나 논리를 통해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본질적으로 느껴지는 충동과 직관을 통해 깨달아진 것입니다.

 

기적의 재정의. 레빈은 기적을 찾으려 했던 과거의 태도를 돌아보며, 진정한 기적은 외부적인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항상 존재해 왔던 진리를 깨닫는 과정임을 이해합니다. 그는 "유일하고 항상 존재하며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는 기적"이란 표현을 통해 이 깨달음이 이미 그의 삶과 세계에 내재되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신과 영혼의 연결. 레빈은 농부 포카니치가 고백한 “신과 영혼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감동하며, 이 간단한 진술이 인간의 삶과 충동의 본질을 완벽히 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삶을 가능하게 한 힘이 바로 신적인 것임을 인정하며, 이를 통해 삶의 방향과 의미를 확신합니다.

 

인간 보편성에 대한 인식. 레빈은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이 진리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으로서의 선과 신성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강화합니다.

 

요약하자면, 레빈의 깨달음은 삶의 목적, 선의 본질, 그리고 신성에 대한 보편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는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내재된 충동과 직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끄는 진정한 힘을 발견하며, 인간 존재의 초월적이고 신적인 본질을 받아들입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 레빈의 삶>

레빈은 이 작품에서 이성과 신앙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답을 찾아 헤매는 인물입니다. 초반에 그는 이성적 사고와 논리에 의존하여 삶의 의미를 탐구하려 했지만, 결국 이성만으로는 삶의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죽음, 사랑, 행복, 그리고 삶의 목적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 앞에서 이성적인 설명이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경험하며 좌절감을 느끼지요. 그러나 레빈은 삶의 다양한 경험, 특히 키티와의 결혼과 아들의 탄생을 통해 이성을 초월하는 힘, 즉 신앙의 영역을 인식하게 됩니다. 키티의 출산 과정에서 그는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신의 존재와 섭리를 느끼게 됩니다. 또한 농부 포카니치가 현시한 "하느님을 기억하며 사는 삶"의 본을 통해, 레빈은 단순하지만 깊은 신앙의 힘을 발견하고, 자신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영적인 진리에 눈을 뜨게 되지요.

 

레빈은 결국 이성과 신앙이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성은 삶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지만,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신앙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성적인 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을 향한 믿음과 헌신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레빈이 도달한 궁극적인 깨달음입니다. 레빈은 이 영적 각성을 통해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고, 이전보다 더욱 성숙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성과 신앙의 조화,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그리고 궁극적인 행복을 향한 여정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시합니다.

 

이성의 용도에 대해 레빈이 품고 있는 사상은 이성에 대한 경험주의적 혹은 자연주의적 관점입니다. 이성은 가치중립적인 분석 도구일 뿐이며, 윤리나 목적은 이성 바깥의 요소[감정, 신앙, 직관 등]에서 온다는 입장입니다. 예컨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이 이성은 단순히 사실을 분석하고 수단을 계산하는 도구일 뿐, 윤리적 가치나 목적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순수이성은 초월적 존재[신 혹은 목적론적 질서]에 대해 확증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입장과 대조적으로 이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혹은 목적론적 관점도 존재합니다. 이성은 단순한 논리 도구가 아니라 윤리를 탐구하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한다는 입장이지요. 예를 들어, 플라톤(Plato, BC 428/427년 혹은 424/423-348/347)은 이성이 ‘이데아’[Idea, 변하지 않는 완전한 원형 혹은 본질]를 인식하는 능력이며, 궁극적으로 선(善, The Good)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고려가 필연적으로 포함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는 이성이 인간의 목적(텔로스, telos)을 탐구하는 기능을 하며,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과 도덕적 선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가 이성이 하나님의 법을 인식하고 자연법을 따르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의 이성은 단순한 논리적 도구가 아니라 윤리적 가치를 탐구하고,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신과의 합일]을 향하도록 설계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레빈이 이성에 대해 품은 사상은 주로 이성의 용도와 한계를 망각한 채 이성을 오용한 유물론적 혹은 무신론적 입장에 대한 경계와 도전으로 드러납니다. 당대에 이런 입장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나 원리, 즉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식, 이성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그 어떠한 원인과 결과도 가질 수 없는 지식”을 무시하거나 폄하했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경험주의적으로 활용되어 자연 현상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증진한 것은 무시할 수 없지만, 실제적인 “삶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고 활용하지 않기에, “어디서 오고 무엇을 위한 것이며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삶”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지요. 유물론적인 이성이 가득 찬 곳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마치 “장난감 가게나 무기상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사람과 같은 처지”입니다. 그래서 레빈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따뜻한 외투 대신 모슬린으로 지은 옷을 입은 채 처음으로 영하의 날씨에 처한 사람 같은 기분이었고, 어쨌든 간에 자신은 벌거벗고 있으며 불가피하게도 고통스럽게 죽고 말 것임을, 이성이 아닌 자신의 온 존재를 통해 의심 없이 확신하게 되었다.”

 

<신앙의 망각과 이성의 기만: 안나의 삶>

이성과 신앙에 대해 레빈이 도달한 영적 각성은 또 다른 주인공인 안나가 저지른 궁극적인 실수를 돌아보게 합니다. 안나의 진정한 허물은 불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그 신앙을 망각한 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버리고 자기 이성, 자기 뜻, 자기 욕심대로 산 삶의 방식이 근본적인 과오였습니다. 왜곡된 생각으로 자기를 기만하면서까지 자기가 책임지고 돌아보아야 할 가족과 이웃을 망각한 행실이 잘못이었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안나는 이러한 과오를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자기 몸을 달려오는 기차에 던진 후에야 자각했으니까요. 그녀가 기차에 뛰어들기 직전에 취한 행동을 묘사하는 다음 장면을 한번 주목해 보세요.

 

“다음 차량을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멱을 감으러 물속에 들어가기 직전에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성호를 그었다. 십자가를 기리는 익숙한 손짓이 그녀의 마음속에 처녀 적과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들을 일깨웠다. 갑자기 모든 걸 덮고 있던 어둠이 걷히면서 환한 기쁨들로 가득한 예전의 삶이 그녀의 눈앞에 한순간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퀴들 사이의 중간 지점이 앞으로 다가온 순간, 그녀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며 고개를 어깨 밑에 파묻은 채 차량 밑으로 뛰어들었고, 두 손을 딛고 일어설 채비를 하듯 가벼운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경악했다. ‘내가 어디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러는 거지?’ 그녀는 몸을 일으켜 뒤로 젖히려 했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한 것이 가차없이 그녀의 머리를 떠밀더니 등을 끌고 갔다. ‘주여,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저항할 여지가 없음을 느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 장면을 통해 안나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인 무의식적인 종교적 반응뒤늦은 자각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즉 비록 지난 몇 년간 신앙을 잃고 방황했지만, 그녀는 죽음 앞에 서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신앙적 몸짓을 취하고, 어린 시절의 신앙적 기억을 떠올리며,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 용서를 구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그녀가 완전히 신앙을 잊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 있던 신앙적 감각이 마지막 순간에 다시 표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비극은 더욱 극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작가가 안나의 비극적 삶을 신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조명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안나의 그릇된 사고방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살하기 전에 여러 번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자살하겠다는 뜻을 은연 중에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만을 향해야만 하는 브론스끼의 “사랑이 줄어든 것”이라고 판단한 안나가 그와 말다툼한 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자기가 출산한 직후 자기를 놓아주지 않던 남편을 떠올리며 한 생각에 주목해 보세요.

 

“‘왜 내가 죽지 않았을까?’ 그때 했던 말과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이 문득 선명해졌다. 그 하나로써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그래, 죽는 거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세료자의 수치와 모욕도, 내 치욕도, 그 모든 게 죽음으로 구제될 거야. 내가 죽으면 그이도 후회하고 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게 되겠지. 나 때문에 괴로워할 거야.’”

 

그 이후에 브론스끼와 또 다른 말다툼을 한 후 온종일 그를 기다리다가 자기 방으로 간 안나는, 귀가한 그가 자기 방이 아닌 그의 방으로 가버리자 죽음을 다시 떠올립니다.

 

“이윽고 죽음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의 마음에 사랑을 다시 회복시키고, 그를 응징하며,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악령이 벌여 온 그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기 전 그 첫 번째 차량의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중간지점을 응시하면서 이렇게 되뇌지요, “저기야, 정중앙으로 뛰어드는 거야. 그[브론스끼]를 벌주고, 모두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거야.”

 

죽음을 향해 몸을 던지는 순간까지 그녀는 죽음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묘책으로 여겼습니다.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이 자기가 죽는 것이 남편을 후회하게 하고, 브론스끼를 벌주며, 모두와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라고 연거푸 생각한 것이야말로 “이성의 교활한 기만”과 “이성의 사기”였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걸러내고 오류를 방지하는 이성의 역할을 선용한 게 아니라, 아무런 비판이나 점검 없이는 쉽사리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이성의 피해자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안나는 결국 자기가 품고 발전시킨 거짓된 이성적 논리로 자살이라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 후에야 비로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즉 ‘내가 어디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러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삶을 레빈은 죽음보다 더 두려워했지요. 그러면서 안나는 주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 작품의 제사(題詞, epigraph)[“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로마서 12:19)]가 지적한 대로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지만, 죽기 직전에 회개한 강도(누가복음 23:40-42)처럼 주님은 안나를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