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자랑
-오늘의 혼돈과 어제의 혼란-
나라가 여전히 혼돈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탐하던 암군(暗君)이 구속된 후에도 그 수하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위헌적이고 무법한 행태로 국가 안보가 위태롭고 국내 경기가 바닥을 치는 것 따위는 아예 그들의 안중에 없다. 오로지 자기 기득권만 지킬 수 있다면, 무슨 무도하고 무리한 일이라도 불사할 태세다. 혼군(昏君)의 아바타에 불과한 현 권한 대행이 드러낸 위헌적 행위를 보라. 그 주군의 체포·수색 영장 집행 건, 내란특검 도입 건,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 임명 건 등에서 그는 국민과 헌법의 편 대신 주군과 위헌의 편에 섰다. 이로써 자신이 내란 동조자라는 점을 부죄(負罪)한다는 사실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영장 집행 시엔 '법과 원칙'이나 '법치주의 유지' 운운하여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가, 내란특검에 대해선 '헌법 질서와 국익 수호'를 거부 이유로 들더니, 재판관 1인 미임명에 대해선 '여야 합의 부족'과 '삼권분립 원칙'을 들먹였다. 개입해야 할 때는 책임 회피했다.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조짐이 보이면 헌법과 국익을 핑계대며 얼버무렸다. 게다가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국회 몫으로 여야가 합의하여 선출한 헌법재판관 3명 중 1명을 미임명하는 꼼수를 부리면서도, 삼권분립 원칙과 여야 합의를 운운하며 견강부회했다. 그야말로 '아무말 대잔치'다. 그래도 한때 '천재 관료'라는 칭송을 받은 이가 아니었던가? 이쯤 되면 그가 지난 세월 자신의 천재성을 어떻게 발휘하며 살아 왔는지 자명해진다.
그를 보면 답답하고 괘씸한 마음이 들지만,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대통령이 임명한 특수경력직 공무원인 권한 대행과는 달리, 선거를 통해 우리의 대표로 뽑은 다수의 여당 국회의원들이다. 그들은 위헌적인 비상계엄 해제를 막아서고, 온 천하에 드러난 내란 우두머리를 두호하며, 심지어 법원에 대한 폭력 사태를 유도하거나 방임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들이 과연 자기들 각 개인이 대한민국의 엄중한 헌법기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까? 이로써 그들도 내란 주도 세력 못지않게, 자기 이익에만 눈먼 부화뇌동자라는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 셈이다. 국민이 뽑지 않은 암군의 수하들뿐 아니라,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그들도 죄다 내란으로 야기된 국가적 혼란과 사법시스템 붕괴의 책임을 져야 한다.
얼마 전에 구약의 예레미야를 읽는 중에 혼란하고 위태로운 우리나라 사정이 많이 떠올랐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기(기원전 587년) 전후에 무려 40년간이나 사역한 구약의 선지자다. 백성이 범한 온갖 죄악으로 인해 유다가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맞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와 장래의 회복이 임할 것을 선포했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당시 유다 백성에게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간곡하게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백성을 오도한 것은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연유다. 예를 들어 2:8을 보라. "제사장들은 나 주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지 않으며, 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알지 못하며, 통치자들은 나에게 맞서서 범죄하며, 예언자들도 바알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들만 쫓아다녔다."(새번역)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지도자뿐 아니라 종교 지도자도 모두 죄악 가운데 헤매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들의 인도를 받은 백성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동일한 죄악을 범하며 이리저리 흩어진 것은 당연한 결말이었다(10:21, 50:6). 그런데 2:8을 다시 주목해 보라. 그 지도자들이 지은 죄악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당신을 찾지도 않고 당신을 거역하면서, 도리어 우상을 숭배했다는 점이다. 그것을 백성들이 배우고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당시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였다.
-주님의 기쁨거리=우리의 자랑거리-
예레미야에서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계시한 본문을 한 곳 묵상해 보자. 9:23-24이다.
▪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3 Thus says the LORD, "Let not a wise man boast of his wisdom, and let not the mighty man boast of his might, let not a rich man boast of his riches;
24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of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exercises lovingkindness, justice and righteousness on earth; for I delight in these things," declares the LORD.)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과 자랑할 것을 하나님께서 지목해 주셨다.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혜와 능력과 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대상들이다. 유튜브만 한번 접속해 보라. 자기에게 돈과 권력과 실용적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고 과시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랑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돈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온 세상 사람들이 따르고자 하는 금과옥조가 된다[워렌 버핏을 보라]. 권력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성한다[트럼프 대통령을 보라]. 실용적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보편성을 띤 잠언으로 변신한다[스티븐 코비를 보라]. 하나님은 돈과 권력과 실용적 지식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대신에 당신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신다. 구체적으로는 당신이 사랑[=hesed,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는 언약적 사랑]과 정의[=mishpat, 공평한 판단과 행동 혹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구체적인 행동 방식]와 공의[=tzedakah, 도덕적 올바름과 의로움 혹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인격적 소양]를 온 세상에 구현하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신다. 즉 하나님은 신실한 언약적 사랑을 베푸시고, 포괄적이고 온전한 올바름을 현시하시는 한편,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공평하게 판단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행동하시는 분이심을 열어 밝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이런 것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온 세상에 실현하시는 분이심을, 넘치는 자부심으로 자랑하는 사람을 찾기란 사막에서 눈 내리는 것을 보기만큼이나 어렵다.
왜 그럴까? 돈과 권력과 실용적 지식은 날마다 우리 눈앞에 등장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SNS나 유튜브에 접속하거나 티비를 틀거나 신문을 펼치면, 이런 것들을 소유한 이들이 판을 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활약은 눈에 띄지도, 잘 언급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그런 매체를 통해 당신의 활약상을 광고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온 세상에 편만하게 구현된 사랑과 정의와 공의는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것들이 죄다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지속되고 있지만, 그 사실을 하나님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안목과 믿음이 없으면 파악조차 할 수 없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역사는 살인과 폭력과 방탕과 허영과 탐욕의 자취로 온통 물들어 있다. 하나님의 보호를 떠난 인간의 두려움이 빚은 결과였고, 빈 하나님의 자리를 채우려는 인간의 발버둥이었다. 만일 인간의 욕정이 발산되는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벌써 종언을 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도 인간의 삶은 지속된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와 은혜로운 관여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의 법을 새겨 두셨다. 이 세상 어디, 어느 시대에도 통하는 보편적인 원리와 법칙 말이다. 아무리 극악한 인간이라도 이 원리를 어기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도록 만드셨다. 아무리 이기적인 사회라도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목숨을 거는 소수를 남겨 두셨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을 거쳐 개인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보편적인 원리 사이에 활발한 교호작용이 진행되도록 배려하셨다. 그 결과 사회의 각 구성원이 생존하고 번영하려면 모두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하도록 이끄셨다. '유엔헌장'(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1945)이나 '유엔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을 필두로 하여, 각국에서 마련된 헌법과 구체적인 법률들이 바로 그 예다. 이러한 보편적 원리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세계가 돌아가고, 각국 내에서 질서 있고 평화로운 삶이 운영된다. 날마다 공기를 자유롭게 마시는 것처럼,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 원리와 법률을 자유롭게 누린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이 법률들이 제정되고 운용되는 것이 바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구현하시는 하나님의 업적이다. 믿음이 없이는 이 사실을 파악할 수 없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에 직접 관여하시기도 한다. 지금까지 악한 세력이 지구 전체를 집어 삼킨 예가 없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대륙을 넘나드는 전쟁이 인류 역사의 각 시대마다 숱하게 전개되긴 했지만, 그 어떤 세력도 전 세계를 손아귀에 넣지는 못했다. 예컨대 전쟁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지역을 포함했던 제2차세계대전을 보라.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및 일본의 히로히토가 작당하여 벌인 그 전쟁이 한때는 그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듯했지만, 결과는 그들의 참패였다. 그렇지만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국지적인 침략 전쟁이나 악의 창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를 들자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벌이는 전쟁, 하마스/헤즈불라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 아프리카 곳곳에서 진행 중인 국지전들 말이다. 그것들도 예외가 아니다. 다른 역사적 현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복잡하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드러나는 삶의 현실일 뿐이다. 당장에는 악한 세력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정의가 구현된다. 이전 역사가 이 사실을 확연히 열어 밝힌다.
집단적인 예로는,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돌이켜 보라. 한결같이 각 왕국이나 제국이 흥했다가 망했다. 흥한 기간면에서 각각 차이를 보이긴 했지만, 예외 없이 각국은 패망의 길을 걸었다. 그 흥망성쇠를 주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성경의 두드러진 계시 내용이다(다니엘 2:21, 4:17, 5:21 참조). 개인적인 예로는, 창세기의 요셉을 보라. 그의 형제들이 그를 노예로 팔았을 때, 그들은 자유의지로 악한 선택을 했으나,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어 많은 생명을 구원하셨다(창세기 50:20).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보라. 가룟 유다의 배신과 빌라도 총독의 판결은 악한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였다(요한복음 19:11, 마태복음 26:45-56 참조). 그러므로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긴장을 유지하며 조화롭게 상호작용하는 신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구현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취하는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육체의 할례와 마음의 할례-
그래서일 게다. 앞에서 상고한 예레미야 본문에 이어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 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25 “Behold, the days are coming,” says the Lord, “that I will punish all who are circumcised with the uncircumcised—
26 Egypt, Judah, Edom, the people of Ammon, Moab, and all who are in the farthest corners, who dwell in the wilderness. For all these nations are uncircumcised, and all the house of Israel are uncircumcised in the heart.”) (New King James Version)
이 세상에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펼치시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이가 있고, 그 하나님께 반역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이다. 전자가 이스라엘인이 대표하는 할례받은 자이고, 후자가 그 주변 이방 나라 백성처럼 할례받지 않은 자이다. 그런데 할례받은 이스라엘도 심판을 받게 된다고 언급한다. 그들이 외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으나,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할례받는다는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할례는 원래 구약에서 하나님이 유다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남자 후손들에게 허락해 주신 충성의 표식이다. 그것은 '자기를 저주하는 맹세'(self-cursing oath)를 상징했다. “내가 주님께 충실하지 않다면, 내가 내 포피를 잘라낸 것처럼 주님도 나와 내 자손을 끊으시기를 빕니다.”(If I am not faithful to Yahweh, may he cut off me and my offspring as I have cut off my foreskin.) [Karen Lee-Thorp, "Story of Stories"] 즉 할례의 핵심은 주님께 대한 충성이다. 육체적인 포피를 베는 것은 '마음의 포피'(the foreskins of your heart)를 잘라내는 것의 상징에 불과하다(예레미아 4:4). 죄와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이 변혁(inner transformation)되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할례라는 말이다. 결국 할례받은 자들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외면상으로 할례는 받았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변혁된 삶으로 빚어내지 않는 이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의미다.
-적용 두 가지-
마음의 할례와 연관된, 아래 두 구절에 주목하면서 두 가지만 적용하자.
▪(신명기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Moreover the LORD your God will circumcise your heart and the heart of your descendants, to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so that you may live.)
▪(로마서 2:29) "오히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새번역)
(But he is a Jew who is one inwardly; and circumcision is that which is of the heart, by the Spirit, not by the letter; and his praise is not from men, but from God.)
첫째, 참된 삶을 누리도록 날마다 마음을 찢자.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마음의 할례를 받는 목적은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결과는 '살기 위해서다'(you may live). 참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리도록 창조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는 삶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대적하던 행태에 물든 우리가 이런 참된 삶으로 회복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시도록. 그리고 이 기도는 매일 진행되어야 한다. 육체적이고 외적인 할례는 일회적이지만, 영적이고 내적인 마음의 할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성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마음과 모든 영혼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일회적인 헌신의 결단으로 지속될 수 있겠는가? 마음의 할례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지속적으로 마음을 챙겨 마음을 정화하고 갱신하는 영적 성장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기도함으로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
둘째, 넉넉한 사랑(hesed)을 베풀고, 의로운 품위(tzedakah)를 발휘하며, 삶의 현장에서 약자를 돕자(mishpat). 성령과 발맞추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을 실현해 가시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낙망하는 일이다. 당장 우리 눈앞에 그런 것들이 좌절되는 것처럼 보여도 뒤로 물러나지 말고, 장차 하나님의 방식으로 당신의 때에 그것들이 온전히 성취되는 날을 고대하며 한 발 더 내딛자. 악한 자와 악한 세력이 잠시 흥왕하는 것처럼 보여도 주눅들지 말고, 그들이 '미끄러운 곳'에 서 있기에 곧 파멸당할 것을 확신하면서 마음을 다잡자. "주께서 참으로 그들[=형통한 악인들]을 미끄러운 곳(slippery places)에 두시며 파멸(destruction)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in a moment)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시편 73:18-19) 로마서 말씀처럼, 할례받은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를 좇아 사랑과 정의와 공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삶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칭찬으로 갚아주신다. 아서라,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기대는 삼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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