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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다양한 종교의 세상에서 길을 찾다: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자세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5. 5. 31.

(Courtesy of Quang Nguyen Vinh)

선교, 다양한 종교의 세상에서 길을 찾다: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자세

그저께 저녁에 그리스도인들이 타 종교와 타 종교인들을 어떻게 이해하면서 그들과 대화해 가야 하는지에 대해 잠시 강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종교와 신념이 공존하는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의 약 절반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개신교(20%), 불교(17%), 천주교(11%) 순으로 분포되어 있고, 무종교 인구는 51%에 달합니다. 세계적으로는 80억 인구 중 약 71억 명이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교(26억), 이슬람교(20억), 힌두교(11억), 불교(5억) 등이 주요 종교를 이루고 있고, 무종교 인구는 9억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타 종교를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글은 그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선교와 타 종교라는 주제를 탐구하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지혜와 자세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선교와 타 종교를 다루는 지침: 계시와 신비 사이에서-

타 종교와 선교라는 복잡하고 때로는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 우리는 신명기 29:29의 말씀을 중요한 지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마치 항해사와 같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멈춰 서야 할 지점을 알려주는 등대와 같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계시된 일 (The things revealed).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내신 진리,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유일성, 십자가와 부활, 구원의 길과 같은 핵심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단호한(dogmatic)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건물의 주춧돌과 같아서, 우리 신앙 전체를 지탱하는 기초가 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타협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세상의 다양한 사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감추어진 일 (The secret things). 반면에,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나 신비, 예를 들어 타 종교의 궁극적인 운명이나 하나님께서 왜 세상에 그토록 다양한 종교적 현상을 허용하시는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고 겸손한(agnostic)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표현입니다. 섣부른 판단이나 정죄보다는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계시된 진리에 대한 확신과 감추어진 신비에 대한 겸손함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자세는 우리가 타 종교를 대할 때 독단이나 배타성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를 굳건히 지키며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양손에 각각 다른 무게의 짐을 들고도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것과 같은 지혜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교 선교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스도교 선교의 타협할 수 없는 핵심이자 심장과 같은 부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만약 이 부분이 흔들린다면, 기독교 신앙은 그 본질을 잃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다각적이면서도 일관되게 그분의 독특하고 유일한 위치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 1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단순한 위대한 스승이나 선지자를 넘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다른 어떤 종교 창시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특징입니다.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선언합니다. 다른 길이나 방법으로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과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 (사도행전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분의 사역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다른 종교적 수행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 (디모데전서 2: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는 중보자가 필요한데, 그 유일한 중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유일성을 더욱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진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육신(Incarnatioin).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으로 나타나신 사건을 넘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인간의 연약함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겸손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냅니다.

 

기적.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 특히 마태복음 8-9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트리오’(trio, 세 가지) 기적 사례는 그분이 자연(바다와 풍랑]과 수많은 귀신을 다스리시고, 질병을 치유하시며, 심지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권능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표적이었습니다. C.S. 루이스가 시사했듯이, 이러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 앞에서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Liar), ‘정신이상자’(Lunatic), 아니면 ‘주님’(Lord)"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삼자택일’(trilemma)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통해 죄의 삯인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자, 그분의 모든 말씀과 신성이 최종적으로 확증된 사건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헛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정수이며, 예수님의 유일성을 가장 강력하게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깊고 확고한 믿음은 그리스도인 선교의 흔들릴 수 없는 출발점이자,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우리 각자는 끊임없이 ‘나는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인식하며, 그 믿음 위에 나의 삶을 세우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신앙의 뿌리가 깊이 내릴수록, 다원화된 세상의 수많은 도전과 유혹 속에서도 우리의 선교적 사명은 흔들리지 않고 열매 맺을 것입니다.

 

-타 종교, 어떻게 이해하고 다가갈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복잡하고 다양한 타 종교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 신학적으로는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 주요 접근 방식이 논의되어 왔으며, 각각은 성경 해석,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비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배타주의 (Exclusivism). 이 입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명시적인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는 구원의 길이 없으며,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inerrancy)과 축자영감설[verbal plenary inspiration, 성경의 모든 부분(전체, plenary)과 각 단어 하나하나(축자, verbal)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믿는 신학적 입장]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접근이 대표적이며, 교리 수호와 적극적인 선포 및 변증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깁니다. 이 관점은 복음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부족하고 공격적인 태도로 비칠 수 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다원주의 (Pluralism). 이 입장은 모든 주요 종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제공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여러 유효한 구원의 길 중 하나일 뿐이며, 특정 종교만이 유일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역사비평적 성경 연구를 수용하며, 종교 간의 상호 이해와 대화, 그리고 공유된 윤리적 가치 추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존 힉(John Hick, 1922-2012))과 같은 신학자들이 대표적이며, 종교 간의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기독교의 핵심적인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포괄주의 (Inclusivism).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한 유일하고 보편적인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거나 명시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익명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타 종교 안에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빛이나 진리의 씨앗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대화와 증거, 그리고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관계 형성을 추구합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예수회 사제였던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란 개념을 채택한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문서에서 이러한 관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요 접근 방식들을 살펴볼 때, 제가 견지하고자 하는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이라는 ‘배타주의의 핵심’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타 종교와 그 신자들을 향해서는 ‘연성 포괄주의’(soft inclusivism)의 태도를 취하는 ‘중도적(via media) 접근’입니다. 이 ‘연성 포괄주의’는 ‘강성 포괄주의’(hard inclusivism)와 대비되는 입장입니다. 즉 후자가 타 종교 자체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계시의 통로’로 확고하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전자는 타 종교가 적극적인 ‘구원의 수단’이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이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인 신앙’(explicit faith in Christ)을 가진 사람들만을 넘어, 그분의 주권적인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은 인정하는 유연성을 보입니다[D. A. Carson,  “The Gagging of God: Christianity Confronts Pluralism”(1996), Michael Goheen, “Introducing Christian Mission Today”(2014)]. 그래서 이 ‘중도적 접근’, 즉 ‘배타주의의 핵심을 가진 연성 포괄주의’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배타주의적 핵심을 분명히 견지하면서도, 타 종교인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좀 더 열린 자세를 모색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조화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보편적인 구원자이심을 고백하지만, 명시적인 신앙만이 항상 구원의 전제 조건은 아닐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인정합니다. 이 입장은 타 종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선포만이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대화, 증언, 협력의 방식을 모색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논의와 더불어,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타 종교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셨는가?” 제럴드 맥더모트(Gerald R. McDermott)은 이 질문이 “왜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오래된 신정론(theodicy)적 질문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고 지적합니다(“God's Rivals: Why Has God Allowed Different Religions? Insights from the Bible and the Early Church”, 2007). 인간의 유한한 지혜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섭리를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적 섭리’(permissive will)를 인정하며, 그분께서 더 크고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한시적으로 다양한 종교 현상을 허락하셨을 수 있다는 겸손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우리가 빼어나다거나 칭찬할 만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영이 그 모든 은사를 그의 뜻에 따라 인류 공동의 선을 위해 골고루 나눠 주셨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기독교 강요”). 이는 타 종교 문화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선하고 가치 있는 요소들, 예를 들어 유교의 핵심 가치인 ‘인의’(仁義)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자비’(慈悲)와 같은 원리들(정찬주,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궁극적으로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원리들은 구약 율법의 핵심인 “공의와 긍휼과 신실하심”(justice and mercy and faithfulness, 마태복음 23:23)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이 기독교의 구원론과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얼마든지 인간 사회의 보편적 윤리나 선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타 종교를 대할 때는 우리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되, 동시에 겸손과 존중의 자세로 그들의 문화와 가르침을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기독교 복음과의 공통점과 명확한 차이점을 분별력 있게 인식하고, 지혜롭게 소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타 종교인에게 다가서는 그리스도의 증인: 7가지 지혜(7가지 ‘ㄱ’)-

이미 확고한 신념 체계를 가진 사람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 1919-1989)와 그의 동료들이 1956년에 출간한 저서 “예언이 끝났을 때”(When Prophecy Fails)는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주는 고전적 연구입니다. 이 연구는 1950년대 미국의 한 UFO 종교 집단[도로시 마틴(Dorothy Martin), 필명 마리안 키치(Marian Keech)가 이끌던 ‘구도자들’(The Seekers)]을 참여 관찰한 기록입니다. 이들은 1954년 12월 21일, 대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며 외계인이 비행접시를 타고 와 자신들만 구원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예언이 빗나갔을 때, 신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주목했습니다. 놀랍게도, 예언이 명백히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예언을 믿고 직장을 그만두거나 재산을 처분하는 등 돌이키기 어려운 중요한 ‘투자’를 했던 핵심 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우리의 작은 그룹이 밤새도록 퍼뜨린 빛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파괴로부터 구원하셨다.”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통해 예언 실패를 합리화했습니다. 더욱이, 이전에는 언론을 기피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오히려 자신들의 신념을 더욱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외부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깊은 신념과 반대되는 명백한 증거에 직면했을 때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함, 즉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줄이기 위해 기존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거나 새로운 정당화를 찾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인간 심리의 단면들은 타종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섬세하고 지혜로운 접근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다음은 그 길에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7가지 지혜입니다.

 

기쁨 (Joy).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기쁨은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모습은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타 종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복음의 능력을 반영하는 살아있는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 (Prayer).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로마서 8:6-7, 고린도전서2:14, 고린도후서 10:4-5 참고). 따라서 타 종교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가장 우선적이고 강력한 전도의 방법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옥토와 같이 부드러워져서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나 진리의 빛을 볼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회 (Opportunity). 골로새서 4: 5-6처럼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는 권면을 따라야 합니다. 즉 타 종교인들의 깊은 필요들을 지혜롭게 포착하여 다양하게 선을 베풀 뿐 아니라, 그들과 지혜롭고 예의 바르게 대화하는 중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선하고 의로운 삶의 태도(‘에토스’, ethos) 자체가 그들이 복음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

 

경청 (Listening). 진정한 소통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17:11의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트인 마음으로, 타 종교인의 생각과 가치관, 삶의 고민들을 깊이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비판하거나 논쟁하기보다, 그들의 입장에서 공감하려는 노력(‘파토스’, pathos)은 마음의 벽을 허물고 신뢰를 쌓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이것은 과학사가 마이클 셔머가 잘못된 사실을 믿는 이들을 설득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그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구별 (Distinction). 타 종교인과 대화할 때, 그들의 종교나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나 선한 요소들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지혜로운 접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요소들과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예: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대속적 죽음과 부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등) 사이의 명확한 차이점을 혼동하지 않고 분명하게 구별하여 전달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가 결국은 같다는 식의 모호한 태도는 피해야 합니다.

 

고백 (Confession). 궁극적으로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핵심 진리를 분명하고 확신 있게, 그러나 동시에 사랑과 겸손과 존중의 태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설명과 논리적인 변증(‘로고스’, logos)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기회가 생기면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개심 (Conversion). 흔히 ‘개심’이라고 하면 타 종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사도행전10:43-48, 10:34-35 참고). 그러나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회심 사건을 언급하며, 그 사건은 이방인 고넬료뿐만 아니라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에게도 엄청난 인식의 전환과 자기중심적 신앙으로부터의 ‘개심’을 가져다준 사건이라고 통찰했습니다. 즉, 타 종교인과의 진정한 만남과 대화는 우리 자신의 편협한 생각과 선입견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더 크고 넓으신 마음을 깨닫게 하며, 우리 자신의 신앙을 더욱 깊고 성숙하게 만드는 ‘상호적 개심’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대화에 참여하는 양쪽 모두를 예수님께로 더욱 깊이 이끄시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실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레슬리 뉴비긴, “오픈 시크릿“, 1978).

 

요약하자면, 타종교인에게 다가서는 그리스도의 증인은 먼저 삶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고,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며 간절한 기도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또한, 지혜롭게 선을 행하며 복음을 나눌 기회를 선용하고, 진심으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경청하며 공감대를 형성해야 합니다. 동시에, 보편적 선함은 인정하되 기독교 핵심 진리와의 구별을 명확히 하며, 사랑과 존중의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담대히 고백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과정이 상대방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더 깊은 개심으로 이끄는 상호적 변화의 여정임을 이해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결론: 확신과 겸손으로 세상과 나누는 복음-

선교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여정, 즉 마라톤과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코페르니쿠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가져온 패러다임의 전환이 적어도 백 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듯이, 한 개인의 세계관이나 한 사회의 문화적 신념 체계가 변화하고 복음이 뿌리내리는 데에는 상당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급함보다는 꾸준함으로, 즉각적인 결과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특히 타 종교를 믿는 젊은 세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목을 알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를 선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19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언급했듯이,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를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다음 세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또한, 미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웬들 필립스(Wendell Phillips, 1811-1884)가 말했듯이, “혁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다. (...) 혁명은 떡갈나무가 성장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서 나온다. 그 기반은 오래전부터 쌓인 것이다.”라는 통찰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는 즉각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선교, 다양한 종교의 세상에서 길을 찾다: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자세”라는 주제의 핵심은 결국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 사랑과 진리를 겸손과 존중의 태도로 세상의 모든 사람과 지혜롭게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타 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살아있는 다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과 나눔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지혜로 가득 차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선교적 여정 속에서 우리 자신 또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편견과 아집이 깨어지고 새롭게 '개심'하는 깊은 은혜를 경험하며,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한 제자로 자라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