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과 하양은 한 뿌리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지형의 혼동을 야기한 주범은 개념의 혼동이다. 아니, 그 개념의 혼동을 이용한 자들이다. 민주주의의 반대어가 사회주의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사실상 민주주의(democracy)는 정치적 용어로서, 그 반대어는 독재(autocracy)나 권위주의[authoritarianism, 군사 정권처럼 강력한 중앙 집권과 제한된 정치적 자유, 반대 의견의 억압이 특징인 정부 형태]다. 사회주의(socialism)는 경제적 용어로서, 그 반대어는 자본주의(capitalism)다. 즉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 범주가 다른 개념이라는 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동안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마치 민주주의의 반대어가 사회주의인 것처럼 주장되고 수용되었다. 특히 1970-80년대에 ‘무늬만 민주주의’ 정부를 반대하는 지식인과 학생들을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사회적으로 매장한 경우가 어디 한둘인가. 사실상 그들의 저항은 ‘독재’ 정권 혹은 권위주의 정권을 반대하면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거나 회복하자는 의도였다. 정치적인 지형 변화를 요구한 것이지, 경제적인 체제 변화를 꾀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범주가 서로 다른 용어를 쓴 이들이 노린 것이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적들을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규정지음으로써, 독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자신들의 본색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21세기 대명천지 세상에 아직도 그런 작전이 통한다고 보는 구시대적인 인사들이 우리나라 정계에는 수두룩하다. 그런 자들을 걸러 내라고 각종 민주적인 선거가 존재한다.
사실상 우리나라 정치 체제의 현안은 ‘독재’ 종식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반대어 중 한 가지인 ‘과두정치’ 혹은 ‘소수 독재 정치’(oligarchy)의 조짐이 이미 오래전부터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즉 부유층, 특정 가문, 군사 권력 같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부 형태 말이다. 고대에는 스파르타 같은 지역에서, 현대에는 부유층이나 군사 엘리트가 지배하는 일부 국가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난다. 우리나라도 1970-80년대에 군사 엘리트가 판을 치는 세상을 경험했지만, 이 21세기에 현 정권 같은 양상이 펼쳐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소위 ‘검찰 공화국’이라는 말이 회자된 지도 벌써 2년 반이나 지나지 않았는가. 법무부의 하청으로서 법무부의 감독과 책임하에 민복을 위해 봉사해야 할 이 검찰 집단이, 우리나라의 정치 역사 고비고비마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그 몸집을 불려 나가더니 이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 형국이다. 그 수장이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더 말할 게 무엇인가. 즉 현 상황은 ‘소수 검찰 세력의 독재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대기업과 언론 기업이 정치 권력을 길들이고, 각각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인 영향력 확대를 꾀하면서 민주주의의 구현과 확장을 막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세력들이 협업하는 ‘소수 독재 정치’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적이다.
한편으로 경제적인 지형도 한번 살펴보자.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 사회주의 지형에 속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예컨대, 지난 21대 국회가 개원할 때, 국회의원 300명 중 정의당 소속은 6명, 무소속은 5명이었다. 무소속 의원 모두가 정의당과 같은 계열로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제외한 289명이 죄다 ‘자유 시장 경제’(free market economy)를 지지하는 인물들이었다는 말이다. ‘자유 시장 경제’는 자본주의보다 더 엄격한 형태(a stricter type of capitalism)를 취하는 경제 체제로서, ‘규제되지 않은 경제 교환 시스템’(an unregulated system of economic exchange)으로 불린다. 즉 세금, 품질 관리, 할당량, 관세와 같은 영역에서 정부가 중앙 집권적인 경제 개입을 하지 않거나, 최소화된 형태로만 개입하는 경제 체제를 의미한다(“Britannica Money”). 전 세계 선진국 가운데 우리나라와 같이 이렇게 절대다수의 국회의원이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사정이 이러한데도, 오호통재라. 아직도 ‘빨갱이’를 운운하면서 섀도복싱하는 인물들이 국회 안팎에 포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라도 우리 정치인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애매모호한 정치적 프레임 뒤에 숨어 정쟁에만 골몰할 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고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양지로 나와 오직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이행하는 경쟁에 몰두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치, 경제적 범주를 잘 구분하고, 각 범주에 속하는 개념들을 세심하게 정의하고 규정하면 얻는 이익이 쏠쏠하다. 서로 반대되는 개념들이 그 복잡한 상호 의존성을 설명해 주면서, 서로를 보완하거나, 강화하거나, 서로 더 확연한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 자연계의 혼돈과 질서를 생각해 보라. 생태계는 무작위 돌연변이, 자연재해와 같은 혼돈과 안정적인 먹이 사슬, 번식 주기와 같은 질서의 균형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 혼돈과 질서는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즉 혼돈은 다양성과 적응을 도입하고, 질서는 생명을 유지하며, 각 극단은 생태계 균형에 필수적으로 작용한다. 둘째, 두려움과 용기를 생각해 보라. 두려움은 종종 용기와 공존하며, 두려움이 있을 때만 용기 있는 행동이 의미를 가지지 않는가. 즉 용기는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셋째, 건강과 질병을 생각해 보라. 예컨대 백신은 약화된 질병의 형태를 취하여 면역을 형성하지 않는가. 건강과 질병은 역설적 관계에 놓여 있다. 질병은 건강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며, 이것은 더 심각한 형태의 질병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다. 넷째, 예술에서 빛과 그림자의 역할을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시각 예술과 사진에서 빛과 그림자의 대조는 깊이감, 초점, 감정적 영향을 창출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둘은 상호 의존한다. 즉 그림자 없이 빛은 정의될 수 없고, 빛 없이 그림자는 형태와 맥락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상호 보완성이나 상호 의존성은 정치나 경제 체제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가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나 자유 시장 경제를 표방하는 국가 중에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실용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필요 때문이다. 사회적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제 시스템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 자본주의 시장이 실패하는 영역 때문이다. 순수한 자본주의는 공급과 수요의 시장 원칙에 의존하여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긴 하지만, 특정 경제 세력에 의한 독점, 환경오염과 같은 외부효과, 도로, 항만, 공원과 같은 공공재 마련, 국방이나 치안과 같은 안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때 정부가 규제, 세금, 보조금과 같은 사회주의적 장치를 통해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여,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정한 결과를 보장하게 되는 것이다. 들째, 사회 복지 제도 도입의 필요성 때문이다.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는 부의 집중으로 인해 불평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가운데 의료, 교육, 주택 같은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 정부가 누진세, 사회보장제도, 공공 의료 시스템과 같은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불평등을 줄이고 취약 계층을 위한 안전망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필수 서비스 관리의 필요성 때문이다. 의료, 교육, 공공 서비스와 같은 영역은 필수불가결한 공적 요소이기 때문에, 이윤 추구 동기가 극대화되는 수요와 공급 시스템에만 맡겨둘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수익성이 우선시되어 그 서비스의 접근성과 형평성을 해칠 수가 있다. 이때 정부가 이러한 필수 서비스를 직접 관리하거나 강력히 규제하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국민 모두가 그 서비스의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 방식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시스템의 강점을 결합하여 지속 가능한 발전과 사회적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영어 ‘black’(=검정)과 프랑스어 ‘blanc’[블랑=하양 / 몽블랑(Mont Blanc)=흰 산])의 어원이 같다는 것을 아는가? 언어 천재로 불리는 신견식 작가에 의하면, 프랑스어 ‘blanc’은 원시게르만어 ‘blankaz’(=빛나는, 밝은, 하얀)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현대 독일어 ‘blank’(블랑크=빛나는, 반짝이는)에 그 원뜻이 남아 있고, 현대 영어 ‘blank’(=공백, 멍한)는 프랑스어에서 차용된 말이다. 영어의 ‘검정’과 프랑스어의 ‘하양’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인도유럽조어 ‘bhleg-’에 닿는다. 그것은 ‘빛나다’, ‘불타다’라는 뜻이다. “한쪽은 하얀 불꽃을 내뿜으며 재가 하얗게 남을 때까지 불타는 반면, 다른 한쪽은 검게 그을리도록 탄다.” 그의 말이다. ‘하얗게 불타는 존재’와 ‘다 타서 검게 그을린 존재’가 나란히 공존하는 세계를 접하며, 인문학을 공부하는 진정한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이다(신견식, “언어의 우주에서 유쾌하게 항해하는 법"). 어떤가, 우리도 이런 즐거움 한번 누려보지 않겠는가? 서로 극단적인 반대 개념이나 경험이라고 여긴 것들을 지혜롭게 관련지으면서, 새로운 차원의 성숙을 도모하고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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