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인문학은 비빔밥이다
성서인문학은 ‘퓨전요리’(fusion cuisine)가 아니다. 퓨전요리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음식 재료, 조리 방법 따위를 조합하여 만들어 낸 새로운 음식”(“우리말샘”)을 말한다. 그 과정에서 재료들이 합쳐져 원래의 출처가 흐려질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요리 전통 간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김치찌개를 보라. 발효된 김치의 독특한 매운맛이 돼지고기, 두부, 육수와 어우러져 완전히 변형된 요리가 된다. 찌개 안에서 각 재료가 하나로 녹아들어 김치조차 독립적인 재료로 인식되지 않고 통합된 전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라면도 퓨전요리다. 원래 중국식 밀면에서 영감을 받아 일본에서 발전한 요리지만, 일본식 다시, 간장, 된장, 고유의 육수가 결합되어 탄생했다. 국물, 면, 토핑이 완벽히 어우러져 이제는 중국적 뿌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 독창적인 일본 요리가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커리 락사(Curry Laksa)도 마찬가지다. 중국, 인도, 말레이 요리 전통이 합쳐져 탄생한 진한 코코넛 커리 수프로서, 크림 같은 코코넛 밀크, 매운 커리, 중국식 면이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맛을 창출한다. 그런데 보라. 성서인문학이 성서와 인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비롯된 관점과 시각들을 의도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통일된 구조나 아이디어로 제시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서로 기원과 초점이 다른 성서와 인문학은 각각 그 고유한 관점과 시각의 특수성이 보존되면서 균형 있게 결합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인문학은 ‘비빔밥’[bibimbap, 영어사전 등재 용어]이다. 비빔밥은 ‘합성 요리’(synthesis cuisine) 중 하나다. ‘합성 요리’란 다양한 요리 전통에서 나온 요소들을 결합하면서도 각 요소의 독특한 특징을 유지하는 요리다. 서로 잘 어울리지만 각 재료가 개별적인 성격을 잃지 않으며, 균형 잡힌 조화를 이룬다. 예컨대 비빔밥처럼 나물[시금치, 콩나물, 당근, 버섯 등], 김치, 통조림 참치, 육회, 계란, 주꾸미볶음, 성게알 같은 다양한 재료들이 들어가도, 각 재료는 개별적인 맛과 질감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요리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서인문학에서도 성경적 통찰과 인문학적 관점이 논리적이고 창의적으로 융합되어 독창적인 결과를 빚어내지만, 각각의 개별적 특성은 그대로 보존되어 제시된다. 성서인문학을 그저 성서와 인문학적 요소들을 적당히 혼합한 것(syncretization)으로 보는 이들이 오해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혼합과 비슷한 용어인 퓨전(fusion)과 통합(synthesis)의 세심한 차이를 간과한 것이다.
비빔밥이 영양가 만점인 음식이듯이, 성서인문학도 인문학을 삶의 지침으로 읽는 일반인과 성서를 신앙의 텍스트로 읽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양 함양과 신앙 성숙의 장이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겠다.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1813년)을 독해한 과정이 낳은 결과물을 한번 살펴보자. 그녀의 장편 소설은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 1811년)부터 시작하여 “설득”(Persuasion, 1817년)까지 총 여섯 권이다. “오만과 편견”의 내용을 관찰하면서 분석하다 보면, 엘리자베스(Elizabeth)와 다아시(Darcy)가 품고 있는 인격적 결함이 근원적인 ‘자기기만’(self-deception)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석하게 된다. 두 사람은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이 영적 암흑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복을 누리게 되는데, C. S. 루이스는 그 과정을 ‘자기기만 탈피’(undeception) 혹은 ‘영적 각성’(awakening)이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묘사한다. 그가 창안하거나 차용한 단어들이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흥미로운 연애 이야기로 짐작하고 읽던 도중에, 슬그머니 자신의 인격적 결함과 허점을 간파하게 되고, 그것들을 극복하면서 선한 덕성을 쌓기 시작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만일 독자가 일반인이고, 이때 성서적인 인간관이 설득력 있게 소개된다면, 자신의 경험과 성서적 지식을 접목하여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자기기만’이란 용어의 의미를 더 깊이 파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개인적인 차이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인간 모두의 상태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자기기만 탈피’란 용어를 통해,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인격적 해방의 시발점이 된다는 점을 깨닫고, 새로운 차원의 “자기 인식”(self-knowledge)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 만일 독자가 그리스도인이고, 이때 열린 마음으로 그 작품의 다양한 인문학적 논의와 보편적 시각에 주목하게 된다면, 주인공들이 드러내는 갖가지 오만과 편견 양상이 죄다 자신의 ‘자기기만’ 스토리라고 절감하게 될 것이다. '몰래 지켜보는 사람'(a fly on the wall)이 되어,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섬세한 감정과 미묘한 사고방식이 절묘하게 소통되는 인문학적 경험이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소설에서 전개되는 모든 과정이 자신을 새로운 차원의 ‘영적 각성’으로 인도하는 인문학적 장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반인도, 그리스도인도 각각 인문학적 요소와 성서적인 지식을 통합하는 과정(synthesis)을 통해 이런 덕을 누리게 된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아닌 일반인 여러분께 한 말씀 드린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가 2019년에 ‘프로젝트 독서’ 활동의 일환으로 개최한 “성서인문학 ‘세상의 시작’”의 소개문은 다음과 같이 문을 연다.
“성서는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구문명의 원류이자 인류 공통의 정신적 젖줄입니다. 인문학의 원천인 성서는 특히 서구 사상과 문학,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기반 지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사실상 기독교의 경전으로 협애하게 이해되면서 비(非)기독교인 관심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독교인이 성서를 열심히 읽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렸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지 않은 책.”
‘인류 공통의 정신적 젖줄’이지만, 안타깝게도 일반인과 그리스도인 모두가 멀리하는 책이 성경이란 말이다. 책 읽기 좋은 이 가을의 끝자락에 ‘인문학의 원천’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태인 성경을 집어 들고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이참에 성경의 개관을 잠깐 소개해보겠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옛 언약, 새 언약이란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총 66권이다. 권 수에 너무 압도되지 않아도 된다. 한 장으로 된 책도 있다. 그 66권은 아래와 같이 구분된다.
구약(39권) = (5+12) + 5 + (5+12) / 신약(27권) = (4+1) + (13+8) + 1
구약 39권은, 역사서 17권(5+12)과 예언서 17권(5+12) 사이에 시가서 5권이 샌드위치 되어 있다. 역사서 첫 5권이 모세5경이고, 12권이 모세 사망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다. 예언서 첫 5권은 대(大)예언서이고, 12권은 소(小)예언서다. 그 내용의 많고(대), 적음(소)에 따른 분류다. 신약 27권은, 역사서 5권(4+1)과 편지글 21편(13+8)과 예언서 1권이다. 신약 역사서 5권 중 4권이 바로 복음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적이 소개되고, 다른 1권(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형성된 초기 교회가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이 기술된다. 편지글 중 처음 13권은 사도 바울이 작성한 것이고, 나머지 8권은 다른 사도들이 기록했다. 마지막 예언서 1권이 바로 그 유명한 '요한계시록'[저자: 사도 요한]이다. 신약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복음서를 다 읽는 게 부담된다면, 누가복음을 읽고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도 된다. 구약을 읽을 때는 군데군데 등장하는 족보나 제사 종류나 특정 집단 인명 소개에 발목 잡히지 않기 바란다. 대충 읽어도 상관없다. 역사서 17권을 한꺼번에 읽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시가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와 번갈아 읽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다. 번역은 읽기 수월한 것으로 택하면 된다. 일단 성경 전체를 일독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모쪼록 편견이나 선입견을 접어둔 채, 트인 마음으로 서구 문명의 양대 근원 중 하나인 ‘헤브라이즘’(Hebraism)을 이해한다는 심정으로 정독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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