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를 버리고 달리는 기차
사람은 이성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는 신약성경 한 구절(마태복음 4:4)을 패러디한 것이다. 빵이 삶의 기본 양식이지만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듯이, 이성이 인격의 주된 골격을 이루긴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 외의 것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절대시한 시절이 있었다. 그 이전의 역사와 전통을 구태의연하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성과 과학적 논리를 신격화한 시대였다. 그 시대가 인류사의 근대를 열었고, 지금까지 그 시대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근대를 탈피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열망이 세계 곳곳에서 분출하는 듯하지만, 근대의 존재감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아직도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이 근대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과학적 원리와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공립 학교의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것을 보라. 각국의 전통과 역사를 함께 가르치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과목은 근대적 산물이다. 그 근대가 빚은 세계 전쟁과 자연 훼손과 생태계 파괴를 절실하게 경험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오늘도 힘차게 달리는 근대의 기차 위에 올라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계는 운전자를 버리고, 눈이 멀어 우주를 맹목적으로 질주하고 있다.”(The machine has dropped the driver; it is racing blindly into space.)
“이성은 완결되는 순간, 비합리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이 되어버린다.”(At the moment of consummation, reason has become irrational and stultified.)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 School)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59-1973)의 혜안이 담긴 명언이다. 지금부터 약 백 년 전인 1930년대 이후에 등장한 이 학파에 속한 사상가들[테오도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발터 벤야민, 위르겐 하버마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를 모두 비판하며, 현대 사회가 문화, 경제, 정치 수단을 통해 억압을 어떻게 지속시키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 1944,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공동 저술)으로 유명한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주의가 이성에 의한 해방을 약속했지만, 역설적으로 기술적 통제와 관료주의적 시스템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윤리적 고려가 배제된 이성이, 권력과 착취의 도구로 전락한 것을 비판했던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도구적 이성 비판”(Eclipse of Reason, 1947)이란 저술을 통해서 ’도구적 이성‘의 부상을 비판했다. ’도구적 이성‘이란 이성이 도덕성과 인간의 목적을 무시하고, 효율성과 유용성으로 축소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유형의 이성은 인간적 가치를 무시하고, 이윤, 통제, 기술적 발전을 우선시하여 인간을 비인간화한다고 보았다. 즉 이성을 ‘오로지 자신을 위한 도구로만’(reason exclusively as an instrument of the self) 간주했던 ‘개인’(the individual)이 이러한 ‘자기 신격화’(self-deification)의 반대되는 결과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도구적 이성‘에 대한 그의 비판이 앞에서 언급한 두 문장[“Eclipse of Reason”에서 인용]에 담겨 있다.
’이성의 완결‘은 근대철학이 추구한 목표였는데도, 어떻게 그것이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첫째, 진보의 이름으로 자행된 환경 파괴를 보라. 한편으로 그것은 이성적 행동이었다. 경제 성장을 극대화하고 기술 발전을 위해 천연자원을 체계적으로 활용해 온 것이었으니까[예: 산림 벌채, 화석 연료 채굴]. 그렇지만 그것은 비이성적 결과를 낳았다. 장기적인 환경적 영향, 즉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감소, 자연재해 등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결국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자원을 남용하는 합리적인 논리가 자원의 지속 가능성을 훼손하고 생태 위기를 유발한 셈이다. 둘째, 관료제 시스템이 초래한 인간의고통을 보라. 한편으로 그것은 이성적 행동이었다. 효율성, 표준화, 책임성을 보장하기 위해 설계된 공적 시스템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비이성적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경직되고 비인간적이 되어, 규칙과 절차가 인간의 필요보다 우선하게 되고, 소외, 불의, 심지어 참극을 초래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 단적인 예가 홀로코스트였다. 그 참사는 합리화된 관료제를 통해 대량 학살의 논리를 실행하며, 과도한 합리성이 어떻게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셋째, 의사결정에서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되는 것을 보라. 한편으로 그것은 이성적 행동이다. 산업, 정부, 일상생활에서 효율성을 최적화하기 위해 자동화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것이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비이성적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도덕적 판단이나 맥락적 이해 능력이 없는 기계나 AI 알고리즘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편향적이고 불공정하며 해로운 결정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역사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채용 시스템이 차별을 조장하게 되어, 합리적인 과정을 거쳤지만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넷째, 많은 나라에서 실시 중인 이윤 중심의 의료 산업을 보라. 한편으로 그것은 이성적 행동이었다. 의료 시스템을 효율화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영화와 비용 절감 조치를 채택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비이성적 결과를 낳았다. 그 민영화로 인해 치료 접근성이 줄어들고, 수익성이 환자 복지보다 우선시되며, 환자 건강을 악화시켰으니까. 그리하여 일부 민영화된 의료 시스템에서는 생명을 구할 약이 과도한 가격으로 책정되어 불필요한 고통을 유발한 예가 허다하다.
이 네 가지의 사례는 수많은 역사적 선례 중 일부에 불과하다.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주의의 폐해와 도구적 이성의 폐단을 갈파한 게 무려 80년 전 일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거나 막 종료된 시점이었다. 그 시절 이전부터 이미 그 폐해와 폐단이 온 천하에 널리 알려졌지만, 이성과 합리성과 효율성의 잣대로만 모든 사업과 인간 및 자연과의 관계와 온갖 사회 현상을 재단하려는 분위기는 여전히 농후하기만 하다. 그리하여 역사를 통해 전수되고 현실 속의 감각을 통해 누리는 경험의 세계와 보편적인 원리나 고귀한 감정이나 영속적인 미를 추구하는 상상력의 가치와는 절연된 합리적 사고방식만이 세상의 판을 짜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지만 기억하자. “경험이 갖는 다양성은 사유 능력에 흠이 되기보다는 역동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 내면의 가치 등은 증명될 수 없지만, 인간에게 매우 소중하다.”(박홍순,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철학 수업”) 이성은 자기 비판 과정을 통해 경험과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고귀한 내적 자원과 통합되어야 한다. 이성의 절대화를 꾀하는 시행착오를 겪은 철학은, 이제 인류의 경험에 기반한 역사와 인간의 상상력에 뿌리를 내린 문학이나 예술과의 유대를 통해 인문학적 중생(重生)을 경험할 수 있다. 이성과 경험과 상상력이 어우러지는 장,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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