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꽃이 되는 인생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하듯이, 내일 할 일을 오늘 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 들어 더 절실하게 깨닫는 점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아도 이 교훈이 맞다. 오늘 할 일도 이미 넘치는데, 내일 할 일을 미리 오늘로 가져올 필요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내일 할 일 중에는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일도 존재한다. 이런 종류의 일은 오늘로 가져올 수도 없다. 미리 미래의 일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경우를 말한다. 백해무익하다. 그런데도 자꾸 사로잡히는 것은 습관이다. 그 걱정되고 두려운 생각 앞에 ‘교통순경’을 세우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무리 바빠도 ‘교통순경’이 멈추라고 하면 바로 그 자리에 서듯이, 갈지자를 걷는 내 생각을 세워주는 ‘교통순경’이 필요하다. 오늘 할 일에 몰두하는 것도 다른 한 방법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데, 내일 일을 걱정하고 두려워 할 새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오늘의 일이 있는가가 관건이 될 수 있다. 그런 일이 없다면 찾자. 더 이상 늦기 전에.
오늘 할 일 중에는 의무적으로 꼭 감당해야 할 일도 있지만, 기쁨으로 누려야 할 일도 있다. 오늘 그것을 놓치면, 사라져버린다. 내일 그것을 누릴 수가 없다. 이런 측면을 생각할 때마다, 기억에 떠오르는 글 한 자락이 있다. 진 웹스터(Jean Webster)의 “키다리 아저씨(Daddy-Long-Legs)”에서 여자 주인공인 주디(Judy)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낸 한 편지 중 마지막 부분이다. 주디는 거기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창하고 대단한 즐거움이 아니라, 작은 일상적인 기쁨에서 엄청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자기가 진정한 행복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사는 거예요. 영원히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얻는 것이지요.”(that is to live in the now. Not to be for ever regretting the past, or anticipating the future; but to get the most that you can out of this very instant.) 주디는 그것을 ‘집약적인 삶’(intensive living)이라고 부른다. 매 순간을 음미하고, 현재 순간에 완전히 몰입하면서 그 순간의 기쁨을 완전히 인식하며 즐기는 삶이다. 그녀가 이런 지혜를 얻게 된 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잘 관찰한 결과였다. 사람들 대부분이 어떤 목표를 쫓으면서 숨이 차고 지칠 정도로 바쁘게 달려가느라, 지나치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늙고 지쳐버리고, 목표에 도달했는지조차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비록 위대한 작가가 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길가에 앉아서 작은 행복들을 많이 쌓아가기”(sit down by the way and pile up a lot of little happinesses)로 결심했다고 밝힌다. 주디는 서서히 ‘여자 철학가’(philosopheress)로 성장하고 있었다.
올해(2024년)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기대수명은 남자가 81.4세이고, 여자가 87.1세다. 이미 60대에 접어든 나는 앞으로 20년도 살지 못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20대라면 무려 60년, 30대라면 50년이나 되는 긴 여생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 여생이 아무리 길어도, 날마다 내일 할 일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면서 보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 몰두할 일이 있고, 오늘 누릴 일감이나 즐길 대상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긴 기대수명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그 방향성을 바로 조정해야 한다. 이미 변화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예전처럼 단 한 번 선택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도록 지도해선 안 된다. 좀 더 유연한 자세로 평생교육에 힘쓰면서, 평생 다양한 일감을 모색하는 것이 정석이 되도록 계도해 주어야 한다. 얼마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 보람을 누릴 수 있는 일감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특정 지식을 암기만 하는 것이 교육의 중심이 되어선 안 된다. 요즘만 하더라도, 이미 지식의 양이 문제가 되는 시대가 끝나고, 지식을 어떻게 확보해서 무엇을 위해 활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마우로 기옌(Mauro F. Guillen)이 지적했듯이, “더 나은 대안은 젊은이에게 인생의 소명은 교실과 직장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다양한 일자리와 경력을 경험하고 실험하는 과정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멀티제너레이션, 대전환의 시작”(The Perennials))
이 책 원제에 등장하는 ‘Perennials’(퍼레니얼)는 도대체 누구일까? 기옌은 그들을, “자신들이 출생한 세대(decades)가 아니라, 일하고, 배우며,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정의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요즘과 같이 장수하는 시대에 자기가 언제 출생했는지가 무엇이 문제인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순간에 공존한 세대가 겨우 네다섯 세대정도였지만, 지금은 여덟 세대가 동시에 지구에 공존하는 시대가 아닌가. 이제는 그 여러 세대와 어떻게 지혜롭고 유연하게 관계를 맺고 협업하는 가가 관건이다. 나이 많은 세대가 젊은 세대와 관계를 맺는 것이 수월한 일이 아니듯이,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세대와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도 녹록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서로 트인 마음과 품위 있는 태도로 상대에게 다가가 서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미 우리 주위는 평생 세 가지 직업을 갖는 것이 흔한 트렌트가 되어 버린 세상으로 바꿔버렸다. 회사가 내보내지 않아도, 자기 발로 걸어서 나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지속적으로 학습하면서, 새로운 자기 인식에 도달하게 됨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일감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이 ‘퍼레니얼’은 고정관념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들과 주변 세상과 계속 접속하면서 “늘 꽃이 피는 모든 연령/종류/유형의 사람들”로 삶을 구가한다. 날마다 만발한 꽃을 누리는 일상뿐 아니라, 자신이 매일 꽃이 되는 인생,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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