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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법대로 경기하자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11. 18.

(Courtesy of Michal Robak)

법대로 경기하자

자기 객관화란 힘들다. 성숙의 시금석이라고 하는데, 자기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수월하지 않다. 자기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기 쉽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들은 그 평가 기준이 없을 때가 많고 상대적이어서 공허한 평가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내가 영어를 못한다, 잘한다라고 말할 때가 그렇다. 무슨 기준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설령 TOEFL이나 IELTS나 TOEIC 점수를 기준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특정 점수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미국에서 일하는 동양계 직원들이 백인들보다 진급이 느리거나, 오래 근무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이 자기 평가 문제가 개입된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양계 직원들은 자기를 과소평가하여 회의 중에 자기 의견도 잘 개진하지 않거나 업무를 맡는 데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반면에, 백인 직원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하여 자기 의견도 잘 내고 업무를 맡는 데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개인적 경향으로 인해 동양계 직원들은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당하고 백인 직원들은 이익을 얻게 되니, 동양계 직원들이 단기간만 근무하고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도 이 직원들이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라는 데 있어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감의 유무에 따라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문제는 분명한 잣대나 기준이 있는데도 자기를 객관화하는 게 힘들다는 것이다. 남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나 기준을 적용하는 데 반해, 자신에게는 그것들을 적용하지도 않거나 느슨하게 적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의 엄연한 허물이나 허점은 깨닫지 못한 채, 타인의 실수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으라고 요구한다. 이런 경향은 개인에게도 있지만, 집단이나 공동체에도 발견된다. 내가 속해 있는 우리나라 개신교회도 그렇다. 세상이 탐욕 가운데 빠져 있고, 죄악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복음을 제시하는 공동체가 교회다. 특히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돈, 권력, 인기, 쾌락과 같은 다른 대상을 우상으로 삼고 있는 것에 주목하면서, 그것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섬겨야 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도구화하는 죄악을 범하는 삶을 참회하라고 권고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원리를 따라서 살 것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렇게 평가하는 교회는 이미 그 원리대로 살아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다시 바로 잡고 그 원리를 준수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과연 실상은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자기 객관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회는 수적인 성장의 정점을 찍고 하강 중이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자기 객관화 부족, 혹은 자기 성찰 부족이 으뜸 원인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 교회 구성원들은 그저 교회 생활의 관성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예배 종류나 패턴, 헌금 방식, 교제 방식, 교회 직분, 전도 양태, 기도 방식, 성경 읽기 방식, 교회 시설 활용 방식과 같은 과거 전통에 순응해 살았을 뿐이다. 이러한 것들이 형성된 배경이나 이유, 그것들의 의미와 영향력 및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재조정의 필요성에 대해서 성찰하고 평가하는 데 실패했다. 원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과 이웃들의 깊은 필요들을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모든 활동의 본질은 잃어버린 채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관성적인 순응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부류와 연령대에 속한 성도들의 영적 필요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신자들이 신앙 생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교회 생활에 참여할 만큼 매력적인 면모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도리어 한두 번 교회를 방문한 그들조차도 실망하고 돌아서게 만드는 구태의연한 종교 활동과 형식적인 대인 관계와 비효과적인 시스템만 남은 형국이다. 현재 거의 모든 교회에서 문제로 대두되는 30/40대 성도들의 부족이나 교회 이탈 현상도 이런 실패의 결과일 것이다. 그들의 깊은 필요에 둔감하거나 공감하지 못했고, 그것들을 채워주기 위해 교회가 변신해야 할 기회를 놓친 탓이 크다.

 

이제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과 과정을 갖는 게 절실하다. 왜 주일에 예배를 꼭 두 번씩 드려야 하는가? 수요 예배는 필수적인가? 예배의 형식을 바꿀 수는 없는가? 설교 방식을 바꿀 수는 없는가? 성가대는 예배의 필수 요소인가? 왜 대표 기도는 장로와 집사들만 해야 하는가? 왜 그렇게 많은 헌금 종류가 있는가? 헌금 내는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십일조는 항상 교회의 몫인가? 왜 헌금 낸 사람들의 이름을 밝혀야 하는가? 헌금 사용이 예배와 성도 양육과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무 이행이라는 측면에 균형 잡힌 배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현재와는 다른 교제 방식[예: 연령별 큰 그룹 혹은 셀 그룹별 소모임]을 채택할 수는 없는가? 왜 위임목사직이나 장로직은 70세까지 유지되어야 하는가? 그 임기를 5년 혹은 10년으로 정한 후에 중임할 수는 없는가? 왜 교회의 당회에는 목사와 장로들만 참석해야 하는가? 20/30/40 대표들, 집사 대표 및 권사 대표가 참석하면 왜 안 되는가? 총동원전도주일은 필수적인가? 왜 노방 전도해야 하는가? 다른 방식으로 전도할 수는 없는가?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는 필수적인 교회 활동인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왜 체계적인 성경 공부가 없는가? 새신자들을 위한 성경공부는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 교회 건물을 꼭 지어야 하는가? 건물 건축할 때 재정은 어떻게 확보하는 게 덕스러운가? 교회 시설을 성도들과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개방할 것인가? 이것들은 관련 항목에 대한 자성 질문의 몇 가지 예에 불과할 뿐, 더 많은 적실한 질문들이 제기되고 재고되어야 한다.

 

자기 객관화를 위한 이런 질문들이 왜 필요한지 한 가지 영역만 짚어 보겠다. 헌금 문제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교회를 처음 방문한 불신자가 교회 주보를 받아 들었을 때, 그 한 부분을 빼곡히 매운 헌금자 명단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까? 그곳에 등장하는 다양한 헌금 종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까? 이런 질문이 자기 객관화를 위한 질문이다. 이런 교회 정책에 대해서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묻는 단계가 아니다. 얼마 전 한 지인과 오랜만에 통화한 적이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지인이 이전에 교회 다니다가 그만 둔 이야기를 꺼냈다. 교회를 계속 출석하다 보니 언젠가 헌금 봉투 대여섯 개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더라는 것이다. 가뜩이나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던 그 지인에게 그것은 마음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것이 교회를 그만 다니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지난 세월동안 신자와 불신자를 불문하고, 헌금과 관련된 부정적인 경험을 토로하는 이들을 접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대신 헌금을 덕스럽게 받아, 투명하고 건전하고 감동스럽게 사용하는 교회에 대해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이 점만은 분명하다. 모두가 민감한 이 돈 문제에 대해, 그동안 우리나라 교회는 적어도 불신자나 새신자들의 시각에서 성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 객관화에서 실패한 영역이다. 

 

앞에서 던진 이런 질문들에는 정답이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그 정답의 방향성만큼은 확연하다. 성경의 원리라는 잣대와 기준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시금석으로 삼되, 현시대 성도들과 불신자들의 필요들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그것들을 가장 효과적이고도 덕스럽게 채울 수 있는 방식으로 전반적인 교회 생활과 사역 방식을 재조정해야 한다. 말씀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과거 신앙 전통이나 익숙한 경험과 습관이기에 지속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거나 다른 것들로 대체해 가야 한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동반될지 모르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과업이다. 이 교회의 개혁 속에 성도 개인의 역할 조정과 기여 방식도 변화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법으로 돌아가 변하지 않고 개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개인도 죽고 교회도 죽는다. 그리고 그 개혁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렇게 말씀의 법과 원리대로 교회의 전반 활동과 사역이 개혁되었는데도, 흡족한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교회를, 당신의 말씀을 좇으며 ‘죽은 한 알의 밀알’로 활용하실 것을 신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붙들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2:24-26) 자기 객관화가 살 길이다. 개인도, 교회도. 이 길만이 죽어도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