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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심(心)-마음을 따르라

분에 넘치는 행복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11. 15.

(Courtesy of Michał Robak)

분에 넘치는 행복

귀국한 지 6년이 지났다. 거제도에 산 지도 6개월이 지났다. 귀국해서 어떻게 먹고 살지? 거제도에 가면 부족한 생활비를 어떻게 마련하지? 이런 질문들이 가장인 내게 닥친 숙제였다. 귀국하는 게 적절한 선택이고, 거제도로 이주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확신이 생계를 꾸려야 하는 과제 앞에 흔들렸다. 흔들려도 귀국했고, 요동해도 이주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면, 필요한 것들이 제때에 공급될 거라고 믿으며. 우리만이 해야 할 일감이 있다면, 그 일이 우리를 책임져 줄 거라고 기대하며. 이런 믿음과 기대는 과거의 경험에 빚지고 있다. 인생의 소명을 깨닫고 실행하기 전에도, 밥을 굶은 적이 없는 경험 말이다. 나는 그저 어느 날 태어났고, 부모님의 희생 어린 돌봄으로 컸다. 내가 기여한 거라고는, 당신들의 셋째 아들 노릇한 것밖에 없다.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마다하신 적이 없다. 경사진 곳 많은 동네에서 타기 위험한 자전거나, 곁길로 빠질까 봐 농구부원 등록에 반대하신 것 말고는. 분에 넘치는 사랑이었다.

 

지난 어느 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찾아 주셨다. 일찌감치 나를 만나 주셨지만, 내가 자꾸 당신의 존재를 잊거나 무시했을 테다. 그렇지만 때마다 일마다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다. 때로는 기도 응답으로, 때로는 마음속에 소원을 심어 주심으로, 때로는 친구나 선배나 스승을 통하여, 때로는 분별력을 허락해 주심으로, 최선의 길을 보여주셨다. 비인(匪人)은 아예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고, 대의를 좇는 대인(大人) 친구들을 여럿 붙여 주셨다. 그들이 지금까지 함께 삶을 나누고 소통하는 인생의 벗들이 되게 해주셨다. 외국에서 영문학[혹은 영어교육학]을 가르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경륜을 알리고 싶다는 내 소원을 잊지 않으시고,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 주셨다. 그리하여 말레이시아에서 최고의 학생들을 만나 가르치는 복을 한껏 누렸다. 이제 적절한 때가 되자, 다시 귀국하는 길을 보여 주시고 지난 6년 동안 인도해 주셨다. 지금처럼 책 읽고, 글 쓰고, 나누는 길 말이다. 성서와 인문학을 잇는 과업으로 불러 주셨다. 지난 60여 년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 허물과 죄악을 거듭 용서해 주시고, 오래 인내하시면서 내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기를 기다려 주셨다. 분에 넘치는 은혜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이 쓴 소설 중에 “설득”(Persuasion, 1817)이란 작품이 있다. 그녀의 마지막 소설이자, 유고작이다. 스물일곱 살인 앤 엘리엇(Anne Elliot)이 프레드릭 웬트워스 대령(Frederick Wentworth)과 우여곡절 끝에 사랑에 골인한다는 이야기다. 열아홉 살에 첫사랑인 웬트워스와 약혼했으나, 당시 그가 재산도 부족하고 사회적 지위도 낮다는 이유로 가족과 러셀 부인의 설득에 의해 약혼을 취소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나폴레옹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재산을 모아 금의환향하게 되고, 우연히 앤과 다시 만나게 된다. 앤과 웬트워스 각각의 삶 속에서 다양한 사건과 복잡한 관계가 전개되는 가운데, 두 사람은 각각 서로를 아직껏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이전의 약혼을 갱신하게 된다. 그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후에 만나 나누는 대화 중에, 내게 감동적으로 다가온 내용이 있다.

 

앤이 웨트워스에게 이전에 자기가 설득당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와 같은 분의 뜻을 따르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모험이 아니라 안전을 권하는 그 설득은 결과적으로는 나쁜 충고였지만, 자기는 그분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고 여겨 따랐기 때문에 자책할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강한 의무감'(a strong sense of duty)은 여성이 물려받을 만한 괜찮은 자질이라고 언급한다. 비록 어릴 때였지만, 자녀의 의무감에 대한 자신의 확신대로 행동하고 나중에 그것으로 인해 후회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이에 덧붙여 그녀의 고백에 응답하는 웬트워스의 말도 참 덕스럽고 은혜로웠다. 아직은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러셀 부인을 용서하게 되겠지만, 지난날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부인보다 더 큰 적이 한 명 있었다면서 그게 바로 자기 자신’(My own self)이었노라고 고백한다. 1808년에 자기가 몇천 파운드를 벌어서 영국으로 돌아와 라코니아호의 함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자기가 앤에게 편지를 써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게 바로 자신의 지나친 자존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제대로 평가하려고 하지도 않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고통스럽게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미소를 띠우고는 한 마디 덧붙인다.

 

“인생의 역경과 패배를 겪은 다른 위대한 인물들처럼, 저도 제 의지를 누르고 운명을 따르도록 해야겠습니다. 내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겠지요.”(Like other great men under reverses, I must endeavour to subdue my mind to my fortune. I must learn to brook being happier than I deserve.)

 

웬트워스가 겸허한 자기 성찰을 통해 영적 성숙을 이루어 앤과의 온전한 화해로 나아가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장면이다. ‘자신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말을 통해, 교만했던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겸허한 자세와 자기가 감내해야 할 것이 역경과 패배가 아니라 앤과 재결합하는 행운이라는 언급을 통해, 현 상황에 대해 감사한 심정을 함께 드러내고 있다. 거제도로 이주해 온 이후로 우리가 누리는, 분에 넘치는 복에 대해 웬트워스가 대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