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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심(心)-마음을 따르라

우리 마음보다 크신 하나님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6. 15.

우리 마음보다 크신 하나님

거제도로 이사 온 이후에 차분하게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변이 조용한 가운데 공기도 맑고 경치도 좋은 곳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지난날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 기억이란 게 참 묘합니다. 현재 내가 평안하고 여유가 있을 때는 즐겁고 행복감을 안겨주는 과거가 곧바로 떠오르지만, 현재 내가 불안정하고 여유가 없을 때는 괴롭고 우울했던 과거가 연이어 떠오르곤 합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이전에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도 그다지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곤 하지요. 이렇게 과거를 더듬는 시간을 갖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떤 기억은 언제 그것을 떠올려도 항상 마음을 무겁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억은 바로 제가 과거에 저지른 실수나 과오나 죄와 연관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러한 것들을 기억하면서 가슴이 아팠지만, 이번에는 그 결과가 이전과 달랐습니다. 그 일들을 찬찬히 복기하면서 그 원인을 따져보기도 하고, 다른 상황과의 연관성을 짚어보기도 하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악된 행위에 관해서는 아낌없이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송두리째 주님께 다시 맡겼습니다.

 

-21년의 의미-

복기한 내용 중 두 가지만 나누겠습니다. 먼저 말레이시아에서 보낸 21년에 관한 되새김이었습니다. 그 기간 제 가족이 참여한 말레이 회교권 선교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단 한 명의 말레이인도 저와 아내가 나눈 복음을 통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활용해서 복음 전할 문을 얻고자 애썼으나, 기꺼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듣겠다는 이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다양한 상황과 기회를 통해 우정을 다지면서 영적 관심사를 나누었어도, 성경에 관해서는 하나같이 마음을 닫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교단에서는 보람찬 나날을 누렸습니다. 모든 관계의 시발점에서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혔습니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강의, 연구 및 학생 지도와 같은 교수 활동을 담당했습니다. 공정하지만 자비롭게 학생들과 교수들과 교직원들을 대했습니다. 특히 강의 중에는 영어교육이라는 장을 통해, 보편적 원리를 존중하는 인간상과 황금률이 선양되는 사회 건설에 기여하자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어떠한 종교나 이데올로기라도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이 원리에 어긋난다면 그릇된 것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도 거듭 분명히 명토를 박았습니다. 외국인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연구비 한 푼 받지 못한 채 진행한 연구 결과,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 국제저널 논문 출간이 일곱 편[AHCI & SSCI (2) + scopus (5)]이나 이루어졌습니다. 제 강의와 학생 지도의 목표는 학생들을 자연법(the law of nature)을 존중하는 ‘훌륭한 이교도’(good pagans)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C. S. 루이스). 그들의 생애 언젠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어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이상이 그 21년간의 삶을 복음 전도와 교수 활동으로 대별하여 나눈 궤적이었습니다. 이 행적의 의미를 파악하는 중에 제 가족이 그 땅으로 진출한 근본적 이유를 되짚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유대인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진리를 대신해서”(on behalf of the truth) 33년이란 기간 동안 유대인의 종으로 사신 것을 본받기 위함이었습니다(로마서 15:8-9).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몫을 감당하시고 승천하셨으니, 제 가족에게는 이방인들이 주님을 찬양하도록 돕는 일이 남은 것으로 이해했고 저희에게 허락해 주신 이방인들이 바로 말레이인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창의적 접근 지역으로 분류되는 그 땅으로 진출하기까지 약 18년이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제 은사에 합당한 전문인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땅으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를 간구했고, 그곳에서는 기회를 사서 그들과 우정 관계를 맺고 대화하며 그들의 필요를 섬겼습니다. 나중에 대학에 교수 활동의 장이 열렸을 때는 그동안 준비해 둔 전문성으로 그들의 지적, 정서적, 영적 필요를 채워 갔습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교수 활동은 더 활발하게 진행되어 보람 있는 열매가 맺혔으나, 복음 전도 영역은 지지부진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왜 말레이인들에게 복음 전할 문이 열리지 않았는지, 저희에게는 아직 감추어진 일입니다. 연구 활동의 열매는 드러났으나, 제(혹은 제 가족)가 제자들이나 동료들이나 이웃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제자들과 동료들과 이웃들이 제(혹은 제 가족)게 전달해 준 마음의 일단만을 파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교수 활동에 관해서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지만, 복음 전도 활동에 관해서는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복기하는 과정에서 이 영역에 관하여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영화배우 제인 폰다(Jane Fonda)가 2012년 TED 강연에서 “인생 복기”(life review)에 관해 나눈 내용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인생3막의 시발점인 60세에 지난 1막과 2막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 부모와 조부모가 누구이며, 조부모가 부모에게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살펴본 것이지요. 그 결과, 그녀는 자기 탓으로 자책한 많은 과거사가 실상 자기 잘못이 아니었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1/3이 유전적인(genetic) 요소가 결정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우리 과거사 중 많은 것들에 관해 우리가 책임질 일이 없다면서 관객들을 위로했습니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지지부진했던 복음 전도사역의 의미에 관한 힌트도 얻게 되었습니다. 제 탓으로 자책할 영역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돌이켜 보면 영적 암흑 상태에 놓인 말레이인들의 운명에 관해 마치 내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고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넘은 생각이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태도였습니다. 15세기 초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무려 600년이나 되는 말레이인들의 영적 역사는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니었고,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영국이라는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그들의 땅을 식민지로 삼고 수탈하는 데만 여념이 없어 닫힌 복음의 문에 관해 왜 제가 책임을 져야 할까요? 더구나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진행된 십자군전쟁으로 인해 닫힌 말레이인 마음의 문에 관해 어떻게 제가 책임질 수 있을까요? 이 영역은 제가 힘쓰지 말아야 할, “큰일(great matters)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things too difficult for me)”이었습니다(시편 131:1). 그 대신 제가 마땅히 해야 했던 일은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안식하듯이, 이 복음 전도사역에 관해서도 주님을 영원히 바라는 일뿐이었습니다(2-3절).

 

요한일서 3:18-20을 보세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greater) 모든 것(all things)을 아시기 때문이라” 이 구절 속에 '우리 마음'(our heart)이란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우리 마음'의 가책으로 고뇌하기보다는 진리의 편에서 행하고 있다는 평온한 확신을 품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이모저모에 관해 남들은 물론 우리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판단만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소견은 좁기만 합니다. 우리 기억은 불완전하고 부정확합니다. 제대로 인과관계를 분별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십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단번에 모두 보십니다. 저희가 21년을 인내하며 말레이 친구들을 섬기고 저희 은사와 전문성을 활용하여 그 젊은이들의 필요를 채운 일은,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않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만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시면서, 당신 앞에서 우리 마음이 평온한 확신을 누리게 하십니다. 복음 전도와 교수 활동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과 허물이 있어 마음에 가책을 느끼는 경우가 있더라도, 괘념하지 말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우리 마음이 파악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

인생 복기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두 번째 교훈입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거나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absolutely necessary)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에 범한 죄악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C. S. 루이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명백하게 잘못된 과오나 죄악을 범한 경우들이 슬그머니 머리에 떠오릅니다. 무지하거나 부주의하거나 깨어 있지 못해 저지른 허물이나 죄악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이미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받은 영역들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그것들이 마음에 떠올랐을 때, 우리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숱하게 많지만, 시편 32:1-2을 다시 한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허물(transgression)의 사함을 받고(forgiven), 자신의 죄(sin)가 가려진(covered)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no deceit),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not impute iniquity)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두 구절은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각 구절 안에서 두 절이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이 두 구절에 3가지 죄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1절의 ‘허물’(transgression)은 ‘공공연하고 고의적인 거역의 죄'(open and deliberate rebellion)를 가리키고, ‘죄’(sin)는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ignorant sin)나 계획된 죄(premeditated sin)를 의미하지만, 2절의 죄(iniquity)는 제멋대로 행하는 죄(waywardness)를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짓는 모든 죄가 망라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 보세요. 1절에서 이 허물이 사함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죄가 들어 올려졌다(lifted off), 제거되었다(taken away)는 의미입니다. 죄가 가려졌다고도 말합니다. 죄가 숨겨져(concealed), 보이지 않고(out of sight), 더 이상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유발할 수 없다(no longer able to cause guilt or fear)는 점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2절에서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죄가 계산되지 않고 무시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주님의 용서가 완전함을 드러내지요. 그 조건은 2절 첫 절에 제시된 대로 간사한 마음으로 죄악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빛 가운데 자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진실하게 자백하면, 우리 모든 죄는 온전히 사함받습니다. 그래서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가 반복되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완전한 용서가 우리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 두 구절을 풀어 써보면 이렇습니다. “복 되어라. 거역한 죄가 들어 올려 제거되고,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는 숨겨져 보이지 않는 자. 복 되어라. 제멋대로 행한 죄를 야훼께서 계산하지 않으시는 자. 그는 마음에 거짓이 없네.” 할렐루야! 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 주신 과거의 죄악을 다시 떠올리며 자책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대가가 지급되었으므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온전히 사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는 자세이니까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셔서 당신의 약속대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1:9를 보세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all unrighteousness)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1:7)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이 용서는 우리 모든 죄를 위해 이미 드려진 화목 제물(“the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에 근거합니다(2:2). 더구나 화목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변호인(an Advocate)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시기까지 하십니다(2:1).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가 자꾸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책하는 것은, 무용한 일일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구원받은 영혼들과는 달리 과거에 푹 빠져 있다고 한 게 우연이 아닙니다. C. S.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자꾸 과거를 되새김질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오래된 피부가 영원히 허물 벗는(sloughing that old skin off forever) 날을 더욱 간절히 고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 복기-

제인 폰다가 언급한 “인생 복기(life review)라는 표현은 미국의 노인학자(gerontologist)인 로버트 버틀러(Robert Butler)가 만든 말입니다. 그는 많은 노인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과거사를 돌이켜 보면서 그것들을 재구성하거나 다른 시각으로 이해함으로써 그것들과 화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병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일 뿐 아니라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생 복기'라고 일컫게 된 것이지요. 이 과정은 인생을 회상하는 것(Reminiscence)과는 다릅니다. 회상은 과거의 경험과 사건을 단지 회고만 할 뿐, '인생 복기'처럼 과거 경험을 재구성하거나 재평가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 복기' 과정을 통해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어, 오랫동안 묵은 갈등을 해결하거나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삶의 평온을 되찾고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무의미한 삶을 살았다고 간주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여기거나,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복기 과정이 수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공황 상태나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지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새로운 안목으로 과거와 화해하게 되면, 현재와 미래의 삶이 새롭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십에 읽는 주역 의 저자인 강기진 씨가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바꿔야 할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라는 것이지요. 과거란 바꿀 수 없다고 단정하고, 미래를 바꾸려면 현재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뒤집는 역발상입니다. 사실상 현재는 지속적으로 과거로 변하고, 미래도 끊임없이 현재로 유입됩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신선한 시각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재해석하지 않으면,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구태의연한 사고와 타성에 젖은 행동으로 물들게 됩니다. 우리의 과거를 바꿈으로써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바꿔야 합니다. 거제도에서 펼쳐질 새로운 미래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