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천동설을 지지한다?
그리스도교와 성경에 대한 오해가 많다. 그리스도교가 주름잡던 중세 시대를 암흑 시대라고 한다든지, 그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둥근지 몰랐다든지, 그들은 성경에 근거해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는 것들이 그 사례다. 이 세 가지 사례 모두 오보(misinformation)나 허위정보(disinformation)에 해당한다. 중세를 암흑 시대로 일컫은 사람들은 계몽주의에 도취된 일부 지식인들이었다. 이성과 과학을 맹신한 나머지,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배한 중세를 모든 이성의 빛이 완전히 차단된 시대로 깎아내린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역사학계는 중세를 근대국가의 토대로 이해한다. 중세에도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역사가인 이언 모티머(Ian Mortimer)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는 만일 중세 역사가들이 단어 연상 게임을 한다면, ‘12세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분명히 ‘르네상스’라고 답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14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진행된 르네상스와는 관련이 없는 '12세기의 르네상스'다. 그 지적 부흥 운동을 추동한 것은 피에르 아벨라르의 선구적 사고방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과 풍부한 아랍어 번역본이었다(이언 모티머, "변화의 세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르네상스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 이전에 쌓이고 쌓인 지적 역량이 12세기에 온전히 무르익은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곳곳에 산재한 수도원들이 교육과 연구를 감당해 오던 중, 급기야 이 시기 어간에 본격적인 교육 연구 기관들이 등장한 것이 이 사실을 방증한다.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이 1088년에, 다음으로 옥스퍼드 대학이 1096년, 파리 대학이 1150년에 설립되었다.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다.
다음으로, 중세 지식인들 중에 평평한 원판 모양의 지구(Flat Earth)를 믿고 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 이래 식자층에서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허위정보가 어떻게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을까? 역사가인 주경철 교수는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을 든다. 그가 1828년에 콜롬버스에 관한 책을 쓰면서, 콜롬버스는 근대적 지식인으로서 지구구형설을 받아들였으나, 당시의 종교인들과 관료들은 지구를 원판 모양으로 인식하는 무지몽매에 빠져 있었다고 묘사한 것이다. 콜롬버스를 영웅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폄훼한 경우다(주경철, "히스토리아"). 일찍이 기원전 6세기에 활약한 피타고라스가 지구가 구형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와서는 다양한 실제 관찰 자료들이 증거로 제시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연히 이 고대의 지식은 중세로 이어져 수용되었다. 중세 천문학을 평정한 프톨레마이오스(85?-165?)가 그린 천체도에서, 구형인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적인 중세의 천동설은 지구 구형설을 전제로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가 중세의 지식을 집대성하여 녹여 넣은 "신곡"(1321)에도, 지옥은 예루살렘 아래쪽 지하에 위치해 있고, 연옥은 그 정반재 쪽 '남반구'의 대양 한가운데에 솟아있는 산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은 당대의 보편적 지식이었다.
끝으로 중세인들이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신곡"이 잘 묘사하고 있다. 중세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개진한 우주 모형에 따라, 지구를 중심으로 9개의 하늘이 돌고 있다고 보았다. 즉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불박이별들의 하늘 및 그 모든 하늘을 회전시키는 ‘최초 움직임’(primum mobile)의 하늘이다. 바로 그 너머에 하나님의 거처인 최고 빛의 하늘인 엠피레오가 자리 잡고 온 우주에 생명을 부여하고 유지한다고 이해했다. 문제는 왜 이러한 천동설이 중세를 주름잡았느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중세의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매료되었고, 그가 천동설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 시대에는 주로 플라톤의 철학 사상이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과학 사상이 더 많은 지식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가 “유일무이한 철학자”(the Philosopher)이며, 구원의 길을 제외한 모든 세상사를 아우르는 지혜의 원천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세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계시와 그의 사상을 통합하려고 시도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태양과 별들이 지구를 돈다고 착각했다. 수 세기 후에 그의 천체 이해를 프톨레마이오스가 지지함으로써, 중세기 내내 이 천동설이 천문학의 표준 이론이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을 해 보자.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것일 뿐,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은 천동성이나 지동설을 주장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과학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지동설을 지지하는 표현도 눈에 띈다. 전자의 예는, 마태복음 13:6, 이사야 45:6에서 볼 수 있다. '해가 뜨다', '해가 지다'와 같은 표현들은 우리가 지금도 쓰는 표현이 아닌가. 후자의 예는, 욥기 9:6, 26:7을 들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욥기의 구절들은 1633년 갈렐레오(1564-1642)가 가톨릭 법정 앞에서 자기의 지동설 주장이 성경과 합치한다면서 인용한 구절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13:6) 해가 뜨자 [그 씨앗들이]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But when the sun had risen, they were scorched; and because they had no root, they withered away.)
(이사야 45:6) 그렇게 해서, 해가 뜨는 곳에서나, 해가 지는 곳에서나, 나 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겠다. 나는 주다. 나 밖에는 다른 이가 없다. (so that from the rising of the sun to the place of its setting men may know there is none besides me. I am the LORD, and there is no other.)
(욥기 9:6)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시어 땅을 그 밑뿌리에서 흔드시고, 땅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을 흔드신다. (He shakes the earth from its place and makes its pillars tremble.)
(욥기 26:7) 하나님이 북쪽 하늘을 허공에 펼쳐 놓으시고, 이 땅덩이를 빈 곳에 매달아 놓으셨다. (He spreads out the northern skies over empty space; he suspends the earth over nothing.)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성경이 틀렸다고 설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도리어 “성경은 진정으로 그 의미가 이해될 때마다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다.”(the Holy Bible can never speak untruth—whenever its true meaning is understood.)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이 확연히 틀렸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라는 저작을 발표한 이후에 축적된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의 결과였을 뿐이다.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하고,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씩 공전하며, 지구 축이 회전한다는 세 가지 이론을 주장한 이 책은 해가 갈수록 그 위상이 더 강고해졌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당대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갈릴레오가 지지하는 지동설이 "터무니없고 거짓이며, 성경에 명백히 반대되는 이단적 주장"(absurd and false and heretical, because it is expressly contrary to Holy Scripture)이라고 억측하고 정죄했다(Stephen Lang, "What the Bible Didn't Say"). 그들이 성경을 빙자하여 지동설을 깎아내렸지만, 성경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시대적 가르침에 매몰된 그들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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