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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타 종교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되기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5. 16.

(거제도 장승포 해안 도로 풍경)

타 종교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되기

지난 주 한 모임에서 “선교와 타 종교”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022년 통계에 의하면 80억 세계 인구 중에 종교를 가진 사람은 무려 71억[=그리스도교 26억+회교 20억+힌두교 11억+불교 5억+기타 8억(모두 반올림함)]이나 되고, 무종교 인구는 9억, 즉 전체 인구 중 11%에 불과합니다. 이런 세계적 추세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종교 상황은 예외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인구가 31%(=개신교 20%+천주교 11%)이고 불교가 17%인데 반해, 무종교 인구는 무려 51%나 되니까요. 그렇다면 국내 선교의 주된 대상은 인구 절반이 넘는 무종교인들인 데 반해, 세계 선교의 주된 대상은 인구 과반이 되는 45억의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타 종교인들인 셈입니다.

 

-타 종교에 대한 3가지 입장-

타 종교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취하는 입장은 3가지로 대별됩니다. 1982년에 앨런 레이스(Alan Race)가 주장한 것으로, “배타주의”(exclusivism), “포괄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입니다. '배타주의'는 매력적이지 않게 들리지만, 구원이 다른 종교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나타냅니다. 다음으로 '포괄주의'는 그리스도의 숨겨진 사역을 통해 구원이 다른 종교의 신자들에게도 확장될 수 있다는 입장으로, 가톨릭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지한 것입니다. 여기에다 '다원주의'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를 각각 주제넘고 배타적인 것으로 보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궁극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을 거부할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독립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확언합니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교가 종교적 지형을 지배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단지 많은 종교 중 하나로, 예수를 단지 다른 많은 구세주 중 한 명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 연합(ecumenism)에 대해 이렇게까지 폭넓은 견해를 견지하는 것은 인류를 광범위한 태피스트리로 인식하면서, 그 속에서 각 종교가 마치 다양성 속의 일치를 상징하는 무지개의 색처럼 고유한 색채를 더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 “The Contemporary Christian”(1992)]

 

-다원주의와 배타주의-

이런 입장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다양한 시대적 문화 현상과 조우하고 교류하는 과정 속에서 각각 형성된 것입니다. 우선 ‘다원주의’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전통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사례와 같이 역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지역 속에서 발견됩니다. 힌두교, 회교, 그리스도교, 시크도, 자이나교, 불교가 여러 세대에 걸쳐 공존해온 인도에서도 오랜 종교적 다원주의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중세의 유럽은 그리스도교가 장악한 상태였으나, 다른 지역들은 자체의 다양하고 다원화된 종교적 전통을 유지해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통일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국교가 불교였지만, 도교, 유교, 무속신앙과 같은 종교를 허용해주었지요. 근대 이후에는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이 강조되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원주의’의 기반이 되는 종교적 관용과 중용적 태도(tolerance and moderation in religion)가 지지받은 바 있습니다. 특히 식민주의가 종말을 고하면서 많은 나라가 독립하여 민족적인 종교 전통을 회복하고, 온갖 분쟁의 원인이 된 종교에 대한 성찰을 통해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다양한 개성과 진실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다원주의’가 더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는 신앙뿐 아니라 이성의 가치조차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득세하면서 ‘다원주의’는 더욱 보편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스로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궁극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을 거부하는 경향이 형성된 것이지요.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일별해 보자면, 현재 우리가 직면한 ‘다원주의’라는 신학적 입장은 인류 역사 내내 지속된 ‘종교적 상대주의’(religious relativism)와 최근 들어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산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타주의’도 시대적인 문화 현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uniqueness)과 절대성(absoluteness)과 최종적 역할(finality)을 주창하는 이 입장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간을 형성한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20세기에 들어 득세한 ‘근본주의’(fundamentalism) 사조에 의해 그 함의가 다소 왜곡된 점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밀려드는 자유주의 신학 사조에 대항해서 그리스도교의 근본 진리를 수호하려 했던 초창기 근본주의는 고상한 의미를 품고 있었으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의미를 상실한 채 극단적이고도 과도한 측면을 드러내는 신학 사조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자인 제럴드 맥더멋(Gerald R. McDermott)이 ‘극단적인 근본주의’(the fundamentalist extreme)라고 명명한 대로입니다(“God’s Rivals”, 2007). 그리하여 진리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들을 악마적인 것(the demonic)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띠고, 그것들을 전적으로 피해야 할 순전한 어둠의 영역으로 간주하여 연구하거나 인정할 가치가 조금도 없는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유일하게 적절한 접근 방식이 축사(逐邪, exorcism)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믿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배타주의’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를 대변하는 입장이라고 말하는 게 조심스러워졌습니다.

 

-‘포괄주의’-

‘포괄주의’는 ‘배타주의’처럼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역할은 강하게 긍정합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임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이지요. ‘포괄주의’의 주된 관심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도 구원이 흘러가는가에 있기 때문에, ‘강성 포괄주의’(hard inclusivism)와 ‘연성 포괄주의’(soft inclusivism)로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강성 포괄주의’는 세계 종교를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통로”(channels of God’s saving revelation)로서 확고하게 인정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양한 종교 안에서 적극적으로 현존하고 활동하시며 그 종교들을 구원의 통로로 활용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근원은 그리스도이지만, 하나님 구원의 은총은 역사적 나사렛 예수를 넘어 다양한 종교 전통을 통해 흘러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반면에 ‘연성 포괄주의’는 타 종교가 “구원의 수단”(the means of salvation)이 된다는 점은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가 광범위하게 미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즉 타 종교를 구원의 길로 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인 신앙”(explicit faith in Christ)을 넘어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을 인정합니다. [마이클 고힌, “Introducing Christian Mission Today”(2014)].

 

그리스도교 내에서 타 종교에 대한 관심은 초대 교회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이 성경을 집필하던 1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다지는 작업이 우선적이어서 타 종교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일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들의 근원적인 종교 전통인 유대교와의 관계였습니다. 2세기에 접어들자 다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리스/로마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스며 들어감에 따라 이러한 역학 관계가 바뀌었습니다. 그 지역들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소수자로서 주변 환경에 만연한 철학과 종교의 도전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은 타 종교를 믿는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3세기 동안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타 종교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터툴리안(Tertulian)이 대표하는 한 학파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는 데 특히 단호했지만,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이레니우스(Irenaeus) 및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가 대변하는 또 다른 학파는 그리스도교와 다른 신앙 체계 사이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후자 그룹에 속하는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로마 세계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신성한 로고스의 씨앗이 나사렛 예수의 인격으로 나타나기 훨씬 전에 이미 모든 인류에게 흩어져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듯 ‘포괄주의’는 ‘배타주의’와 더불어 각각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전개되어왔습니다.

 

-분별의 원리-

타 종교에 대한 입장 중 복음주의가 견지해야 하는 것은 어느 것일까요? 이것을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원리를 제시하는 성경 구절은 신명기 29:29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sons forever, that we may observe all the words of this law.) 즉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 존재하고, 당신의 뜻으로 밝히 계시해 주신 율법도 엄존한다는 말입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확신을 품고 그 모든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는 불가지론적인 태도가 절실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지 않기를 분명히 의도하신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공부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나 숙련도와 상관없이,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길을 이해하고 존재의 신비를 풀기를 열망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성숙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로 의도적으로 특정 사안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도록 숨기십니다. 우리가 밝히기를 갈망하는 숨겨진 진리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조국이 로마의 통치에서 곧 해방될 수 있을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기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못박으시면서(사도행전 1:7), 그 대신 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과업을 명시적으로 일러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땅끝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는 과업이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셨다고 믿고 신뢰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는 바울의 말처럼 “거울로 보는 것 같이”(고린도전서 13:12) 희미하게 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면, 우리의 일시적인 무지가 지극히 지혜로운 당신의 계획 중 일부였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레이먼드 브라운, “The Message of Deuteronomy” (1993)]

 

모세의 세 번째 설교 내용을 담은 신명기 29장의 문맥에서 ‘감추어진 일’이 언급된 것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가 여전히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 앞에 서서 하나님과의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후손들이 그 언약에 포함된 의무를 저버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때에 이미 경고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언약 의무를 잘 순종해 간다면, 이런 저주가 임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미 알려진 하나님의 율법에 귀 기울이고 순종해 갈 뿐 아니라, 자기 후손들에게도 잘 가르쳐 순종하게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에 기록된 대로 완전한 멸망에 처하게 될지, 그렇게 되지 않을지에 대한 지식은 오직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장래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로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를 권면한 것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과 우리에게 허락된 것을 구분하는 분별력이 절실합니다.

 

-중도적인 길-

이 신명기 29;29의 원리를 타 종교인들에 대해 취해야 할 입장이란 주제에 대입해 봅시다.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일’은,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점을 확정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연합하는 길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감추어진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자비를 부르짖고 구원을 받기 위해 정확히 얼마만큼 복음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exactly how much knowledge and understanding of the gospel people need before they can cry to God for mercy and be saved) (존 스토트, 앞 책) 구원받기에 합당한 명시적 반응의 정도를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던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분명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아니었던 에녹, 멜기세덱, 욥과 같은 이방인들도 구원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인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특별 계시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타 종교나 타 문화 상황 속에서 구원받은 이방인의 전형입니다.

 

‘다원주의’는 과연 이런 성서적인 입장과 상응할까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유일하고 최종적인 구세주의 역할을 부여하는 그리스도교 핵심 교리에 어긋나지요.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배타적 유일성(exclusivity)을 부여하는 성경의 ‘나타난 일’을 명시적으로 부인하므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고려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배타주의’는 어떨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당신과 연합된 자에게 구원이 부여된다는 그 굳건한 입장은 견지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천지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풍성하게 베풀어 주신 일반 은총 혹은 일반 계시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자세는 인정하기 힘듭니다. 타 종교인들이 드러낸 진선미의 세계를 잠시 일별하기만 해도, 그것 모두를 사단적이러고 매도하고 축사(逐邪)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협량한 태도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고등종교들의 가르침 속에는 보편적인 원리와 상응하는 가르침이 엄존합니다. 그 종교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특정 사회 문화들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점이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적어도 인간의 본성과 합하는 종교상의 원리가 존재했기에 그 신자들이 그것을 신봉하고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덧붙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시대와 장소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독단적으로 죄다 지옥행이라고 단언하는 자세는 하나님 소유인 '감추어진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교만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포괄주의는 어떠합니까? 포괄주의자들은 구원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복음과 교회를 통해 계시된 나사렛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존재하는 보편적인 구원 계시”(a universal and saving revelation through other religions)를 통해서도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양한 종교 안에서 적극적으로 현존하고 일하시며 그 종교들을 구원을 위한 통로로 활용하신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근원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은 맞지만, 그 구원은 각기 다른 영적 경로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가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제게는 이런 주장이 ‘나타난 일’에다 ‘감추어진 일’에 대한 과도한 추정이 혼합된 입장으로 비칩니다. 우선 ‘포괄주의’가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원으로 강조하는 것은 맞지만, 그 강조의 정도는 성경이 명백하게 주장하는 배타적 유일성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역사적인 구속 사건을 통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이 성경 속에 명백하게 계시되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가 다양한 타 종교들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통로”(channels of God’s saving revelation)로 활용하고 있다는 주장도 함께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타 종교인 중에 이방인 욥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겸허하게 당신 앞에 서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당신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과, 그리스도교와 상호배타적인 교리를 가진 타 종교를 ‘보편적인 구원 계시’의 통로로 인정한다는 말은 차원이 다릅니다. 예컨대 선지자 무함마드를 알라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예언자로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보다 훨씬 낮은 위치를 부여하는 회교라는 종교 체계가 어떻게 구원 계시의 통로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자체 경전 내용에 온갖 독단적인 해석을 가하는 그 종교 체계에 어떻게 하나님 구원의 은총이 흘러넘칠 수 있을까요? C. S. 루이스가 주장한 대로, “하나님에 대한 상호배타적인 명제 두 가지가 모두 옳을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만나게 되면 그때마다 가차 없이 공격해야 합니다.”(I think we must attack wherever we meet it the nonsensical idea that mutually exclusive propositions about God can both be true.) (“God in the Dock”, 1970)

 

이상과 같이 ‘배타주의’, ‘포괄주의’ 및 ‘다원주의’의 주장들을 살펴본 결과, 타 종교에 대해 복음주의는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까요? 제게는 ‘배타주의’의 핵심에다 ‘연성 포괄주의’ 입장을 통합한 것이 가장 마음에 와닿습니다. 즉 첫째, 구원은 오직 역사적 구속 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굳게 붙잡는 입장입니다. 둘째,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복음에 대해 얼마나 많은 명시적인 반응이 요구되는지는 모른다고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입장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계시를 누리지 못한 구약 신자들이나 이방인 욥의 처지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밖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것입니다. 끝으로 셋째, 타 종교인이나 무종교인을 통해서 드러난 진선미나 지혜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한복음 1:9)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입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이자 인류의 빛으로서 세상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일반 은총'(common grace)의 일부이지만,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구원 은총’(saving grace)과는 구별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는 태도입니다. (존 스토트, 앞의 책) 제가 소개한 이 입장은 강제적으로 여러 입장을 조화하는 것(forced harmonizations)보다는 지적 긴장(intellectual tension)을 선호한 C. S. 루이스의 본을 좇은 것입니다. 논란이 되는 문제를 다룰 때 그는 공통점(the points of common ground)을 강조하면서, 논쟁이 되는 영역(areas of dispute)을 덜 강조하는 중도적인 방식(via media) 혹은 중용의 길을 자주 채택했습니다. [스콧 R. 버슨과 제리 L. 월스, “C. S. Lewis & Francis Schaeffer” (1998)]

 

-비유 한 가지-

존 스토트가 자유주의 신학자인 데이비드 에드워즈와 토론하는 중에 자유주의자(the liberal), 근본주의자(the fundamentalist), 복음주의자(the evangelical)를 구분하면서 비유법 한 가지를 구사한 적이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를 풍선으로, 근본주의자를 새장에 갇힌 새로, 복음주의자를 연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즉 자유주의자는 가스로 가득 찬 풍선(gas-filled balloon)과 같아서 땅에 묶이지 않은 채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근본주의자는 새장에 갇힌 새(caged bird)와 같아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진정한 복음주의자는 연(kite)과 같아서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지만 동시에 항상 줄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복음주의자가 되려면 “전통에 대한 충성심”(loyalty to the past)과 “미래를 위한 혁신적 태도”(creativity for the future)를 독특하게 결합하는 것(particularly unusual combination)이 요구된다고 지적합니다. ["Evangelical Essentials" (1988)] 모쪼록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굳건하게 붙들면서도, 겸허하게 감추어진 일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고, 창의적으로 말씀의 원리와 성령의 인도를 좇아 순종해 감으로 하나님 나라를 더욱 확장해 가고 당신의 의를 온전히 이루어 가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