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의 역사적 사건들이 모두 신화다?
-기적과 그 의미-
한 달쯤 전에 어느 교회에서 성경 읽기에 대해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어떤 성도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경의 기적들을 다 믿어야 하는가? 제가 설교 중에 예수님이 동정녀를 통해 태어나신 것, 물 위를 걸으신 것,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같은 기적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님이 질문하신 의도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다음 세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것입니다. 현재 성경의 기적들이 믿어지지 않아서 고민된다는 의미이거나, 기적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므로 다 무시하고 예수님의 교훈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지 않느냐는 제안이거나, 기적들은 무시하더라도 그 배후의 의미에 주목하면 되지 않느냐는 입장이겠지요.
첫 번째 경우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결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꾸준히 읽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머지않아 그 기적들의 의미뿐 아니라 그것들의 역사적 실재성도 신뢰하게 될 테니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로마서 10:17, 요한복음 7:17)이자, 저를 비롯하여 많은 성도가 경험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복음서의 기적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게 되는 과정이 주로 이렇습니다. 초신자나 관심자가 마음을 열고 성경을 펼쳐 복음서를 읽어가다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인격을 다각도로 접합니다. 파격적인 예수님의 말씀과 초자연적인 기적들로 인해 당황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언행과 사역을 통해 배어 나오는 당신의 지혜와 연약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향한 당신의 열정적인 사랑과 언행일치를 구현하는 당신의 진실한 인품으로 인해 감동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진실한 면모[에토스]에 매혹되면, 당신의 사랑도 참된 것으로 인식하여 그 사랑이 마치 자기에게도 미치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파토스]. 이런 상태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을 수용하고 신뢰하는 단계와는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말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점쯤 되면, 예수님이 베푼 기적들이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이전의 생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기적들이 모두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확증하기 위해 활용하신 가시적인 도구였다는 점도 깨닫게 되면, 더욱 그 기적의 진실성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역사적 사건들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성도님이 기적에 대해 두 번째와 세 번째 입장을 취하는 경우입니다. 두 경우 모두 애당초 합리적 사고로는 기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실제 복음서 역사에서 일어났을 리 없다고 단정합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의 경우는 기적 대신 교훈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교리와 기적을 다 덜어 낸 후, 성경을 재구성해야겠지요. 아마도 미국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시도한 두 가지 형태를 띨 것입니다. 첫째는 “나사렛 예수의 철학”(The Philosophy of Jesus of Nazareth, 1804)이란 작품처럼 모든 기적을 없앤 뒤,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만 주제별로 배열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둘째는 “제퍼슨 성경”(Jefferson Bible)이라고도 불리는 “예수의 삶과 도덕”(The Life and Morals of Jesus of Nazareth, 1820)이란 작품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한 후에, 예수님 장례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갑자기 끝나는 것일 수 있겠지요. “(그들은) 큰 돌을 무덤 문에 굴려다 놓고 떠났다.”[(they) rolled a great stone to the door of the sepulchre, and departed.)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요. 제퍼슨은 자기 작품이 ‘상식의 산물’(the product of common sense)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존 스토트, “The Incomparable Christ”). 하지만 기적과 교리는 다 제외되고 오직 상식으로 수용 가능한 내용만 담은 이런 성경이 그 성도님에게 어떤 위로와 격려가 될지 의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세 번째의 경우는 기적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들이 가리키는 영적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주력합니다. 여기에서 그 영적 의미를 복음서 문맥에서 찾는다면,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 의미가 기적의 현장 곳곳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9:1-8에 보면 예수님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먼저 그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하신 후에 그 중풍병을 바로 고쳐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의 근원적인 문제가 중풍병이 아니라 바로 죄였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치유 기적의 의미가 본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능(authority)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입니다(6절). 이 사례뿐 아니라 예수님이 베푸시는 모든 기적은, 당신이 자연계, 영계, 질병, 죽음을 다스리시는 구세주이시라는 사실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요한복음 20:30-31 참조). 그 모든 기적이 이 엄중한 영적 진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증거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적들과 이런 영적 의미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성경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이 경우는 마치 루돌프 불트만(1884-1976)이란 독일 신학자가 “비신화화”(de-mythologizing)라는 개념을 주창하면서 내세운 입장과 비슷합니다. 그는 신약 전체를 보는 해석의 틀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성서 해석학이나 조직신학을 비롯한 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대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인간 실존과 결단의 이야기로 해석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Jesus Christ and Mythology, 1958)라는 책에서 ‘비신화화’에 대해 그가 펼친 논지를 조금 추적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가 자신을 복 된 시대의 왕인 메시아(the Messiah)라고 주장했는지, 혹은 자신을 하늘 구름을 타고 올 인자(Son of Man)라고 믿었는지에 대해서, 신약 학자들 간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만일 예수가 그렇게 주장하고 믿었다면, 예수는 자신을 신화(myth)에 비추어 이해한 것이다. 게다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 십자가 죽음과 같은 개념들은 죄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널리 유포된 신화였다. 이제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이런 개념들을 어떻게 이성과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현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다. 여기에 3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맹목적으로 믿기, 둘째는 신화적 개념을 품은 신약 본문을 건너뛰고 걸림돌이 되지 않는 다른 본문을 선택하기, 그리고 셋째는 “신화적 개념을 버림”(abandon the mythological conceptions)으로써, “신화의 외피 속에 감춰진 더 깊은 의미”(a still deeper meaning which is concealed under the cover of mythology)를 간직하기다. 즉 동정녀 탄생,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와 같은 것들은 신화적 개념에 불과하므로, 다 버리고 나서 그것들 배후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이 세 번째 가능성이 바로 “비신화화”(de-mythologizing)이다.
불트만이 말하는 신화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반 사전에서 그 단어를 정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즉 그에게도 신화란, ‘자연 현상을 설명하거나 종교적 신념이나 사회적 관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에 지어낸 잘 알려진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단어를 복음서가 제시하는 동정녀 탄생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부활과 같은 기적이나, 메시아나 인자 같은 신성한 개념들에 적용하여, 그것들이 역사적인 실재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방점을 둡니다. 그것들은 단지 깊은 영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옛날이야기나 옛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가 예로 든 것처럼 예수가 자신을 구세주인 메시아 혹은 최후의 심판주인 인자로 ‘믿었다면’, 그것은 자기가 현재 역사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고 장차 역사의 종료 시점에 세상을 심판할 실제적인 주인공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옛적 개념에 근거해 자기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이해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예를 들면서도 그는 두 번씩이나 말장난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그러한 자기 정체성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는 것이 복음서 속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데도, 그는 특정 신약 학자들을 거론하면서 예수님이 취한 입장에 대한 판단을 유보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믿은 내용이 기적으로 입증된 역사적인 실상임을 복음서가 밝히고 있는데도, 마치 예수님이 그 옛날이야기에 기대어 자기 신원을 확립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호도합니다.
-‘비신화화’ 작업의 오류-
<1. 과학주의와 “연대기적 속물주의”>
여기까지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지만,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은 다각도로 무리하고 무도한 시도였습니다. 첫째, 그 작업은 그가 과학과 현대의 우월성을 맹신하고 숭배한 결과물입니다. 그는 ‘비신화화’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현대의 세계관을 기준으로”(the modern world-view as a criterion) 삼아, “성경의 세계관(the world-view of Scripture), 즉 기독교 교리와 교회의 설교에서 너무 자주 등장하는 과거 시대의 세계관(the world-view of a past epoch)을 거부하는 것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있지요. 연면한 역사를 통과하며 형성된 성경의 세계관으로써, 잠정적인 상태에 놓인 현대의 세계관을 평가하는 게 신학자가 취해야 할 방향이 아닌가요? 그런데도 그는 성경의 세계관 대신 현대의 세계관을 기준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메시지가 더 이상 쓸모없는 고대 세계관(an ancient world-view which is obsolete)에 묶여 있다.”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대 세계관과 현대 세계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는 ‘신화적 사고방식’(mythological thinking)이고, 후자는 ‘과학적 사고방식’(scientific thinking)이라는 데 있다고 합니다. ‘신화적 사고방식’이라는 표현이 고상하고 이지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불트만의 사전에서는 옛날이야기나 구닥다리 개념에 근거한 사고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낡고 묵은 사고방식으로는, ‘과학’(science)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항상 과학의 결과물인 ‘전문적인 수단’(technical means)[즉 의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의 혜택]을 활용하는 현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고대 세계관이라고 폄하하는 성경의 세계관이, 도대체 어떤 내용을 품고 있다는 말일까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동정녀 탄생,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 십자가 죽음에 덧붙여, 한 가지 더 소개합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 전제된 세계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며, 악령이 모든 악과 병의 원인이라는 세계였다고 전제합니다. 반도 맞지 않은 주장이지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사단이 그 세상을 지배한다고 예수님이 가르쳤다니요. 창조하신 이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 세상의 주님이시고 사단은 여전히 악한 조연에 불과하므로, 사단의 지배라는 표현은 제한적이라고 토 달아야 합니다. 게다가 모든 악과 병의 원인으로 악령을 지목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심각한 신학적 오류입니다(https://hubil-centre.tistory.com/38 참조). 현대 신학의 거장이라는 불트만이 모순되게도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하다는 방증입니다. 독서의 기본을 무시하고, 자기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성경을 읽은 탓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예수님이 품었다는 세계를 신화적(mythological), 혹은 구닥다리 개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 개념이 “고대 그리스에서 과학(science)이 시작된 이래 그 과학이 형성하고 발전시킨 세계이자, 모든 현대인(all modem men)이 받아들이는 세계라는 개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예수님의 세계 개념이 현대 과학과 상충하기 때문에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지요.
그가 얼마나 과학에 꽂혀 있는지 말해 주는 언명입니다. 자기가 활약하던 그 시대를 오로지 과학이나 과학적인 세계관이 주름잡고 있었다는 인식 자체가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시대착오적인지 모릅니다. 지금 인용하는 불트만의 책이 1958년에 출간되었지만, 원래 그 내용이 강연의 형태로 제시된 것은 1951년입니다. 그 시기는 합리적 사유와 이성의 계몽을 통해 인류 문화의 진보를 꾀했던 계몽주의가 양차 세계대전이란 참혹한 결말을 낳은 것으로 인해, 인류 전체 차원에서 이성의 한계와 인간의 죄성과 과학기술의 오남용의 폐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던 때였습니다. 더구나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지죠. 문화적으로 보면, 그 시기는 모더니즘(modernism)이 거의 막을 내리고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싹트던 시기였습니다.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문예 운동으로서, 우선 합리주의(rationalism)라는 계몽주의(Enlightenment) 개념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서구 문화 내에서 과학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세속화(secularization)가 가파르게 진행되던 중대한 변화에 대응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단절을 주장하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가 객관적 실체(objective reality)나, 과학적 또는 역사적 진실이라는 객관적 진리(objective truth)는 없다는 파격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특히 과학과 기술(심지어 이성과 논리)은 인류 진보의 수단이 아니라 기존 권력의 의심스러운 도구(suspect instruments of established power)로 간주했지요(Encyclopedia Britannica).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과학을 잣대로 삼아 연면한 역사를 이어온 성경과 전통적인 교리를 구닥다리 취급하고, 자기 편견에 따라 성경 내용을 분해하며, 자기 마음에 드는 철학 한 분파의 시각으로 그 분해한 것들을 해석한 것이 과연 그 현대 사조를 제대로 대변한 것일까요?
다시 말하자면, 앞에서 불트만이 언급한 내용은, 그가 얼마나 과학주의(scientism)에 경도되어 있는지 확연히 보여 줍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을 폄하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과학이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지혜가 아니지요. 합리적 의심에서 시작하여, 객관적인 관찰과 가치중립적인 실험과 검증 단계를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과학의 전 과정이 인류의 지적 발전을 견인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과학이 유일한 권위이고, 진리의 모델이자 중재자가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할 때, 과학주의 혹은 과학 우상숭배(the idolatry of science)로 변질됩니다. 과학주의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여기에서 광주과학기술원 이용주 교수가 지적한 문제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절대적인 객관성은 존재할 수 없고, 완전한 가치중립성이란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해버릴 때, 과학은 이성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탈과학의 영역으로 나아갑니다.”(“스무 살의 인문학”). 즉 합리적 의심에서 출발한 과학이 과신에 찬 과학, 맹신과 미신에 사로잡힌 과학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류 문화의 한 영역인 과학은 누리고 가꾸어 갈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트만은 마치 과학이 발전시킨 세계가 불변의 진리만을 담은 보고인 양, 그 과학적 진리와 상충한다고 판단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세계를 단칼에 잘라 내어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바로 과학주의자요, 과학 숭배자라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입니다.
현대와 현대적 가치만을 숭상하는 이런 자세는, 전형적인 “연대기적 속물근성”(chronological snobbery)이 발현된 결과이기도 합니다(C. S. 루이스, "Surprised by Joy"). 무비판적으로 현대적인 것이 과거의 유산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이 맹신은, 진보(progress)에 대한 현대인의 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변화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변화가 오류(error)의 상태에서 진실(truth)의 상태로 나아가는 단순한 과정일 수는 없습니다. 먼저 과거의 유산 중에 미신에 기반한 것도 얼마든지 있지만, 인류 문명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언어, 가족, 의복, 불의 사용, 가축 기르기, 바퀴, 배, 시(poetry), 농업”과 같은 선사시대 유물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온갖 과학 문명의 혜택이 가능했을까요? 그리고 과거의 유산 중에, 시대의 부침과는 무관하게 보편적인 삶의 원리와 인간의 본질을 열어 밝힌 걸작이 얼마나 많은지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성과 상식을 제대로 갖춘 현대인 중에 누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축을 이루는 그리스 철학(BC 4-5세기)과 세네카, 에픽테토스, 아우렐리우스가 대표하는 로마의 스토아주의(1-2세기)를 시대착오적이라고 무시하거나 깍아내릴까요? 그리고 그 현대인 중에 누가, 셰익스피어(1564~1616)의 희곡이 구시대적이기 때문에 읽거나 공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까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트만은 그리스 철학자 시대보다 훨씬 나중에 기록된 신약 성경은 시대착오적인 기적들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들이 점철된 기록물로 취급하지요. 선입견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이런 이성주의, 과학주의 맹신도들이 바로 무려 천년이나 되는 중세 시대를 ‘암흑시대’로 호도하고 폄훼하기도 한 장본인들입니다(https://hubil-centre.tistory.com/90 참조). 이에 덧붙여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 자체를 맹신하면, 현재 우리가 가진 강점에만 매몰될 뿐,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아우르는 적절한 관점을 형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관점은 과거 각 시대가 노정한 장점과 단점을 구분하면서, 모든 시대를 꿰뚫는 보편적인 원리에 끊임없이 접속하는 균형 잡힌 분별력에서 비롯됩니다. ‘비신화화’를 부르짖는 불트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자질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폄하>
둘째,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은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깎아내렸습니다. 독서의 기본을 무시한 결과였지요. 읽어야 할 작품의 텍스트 자체의 성격도 파악하지 못한 데다, 그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공을 들이지도 않은 채, 자기 선입견만 냅다 앞세우기에 바빴습니다. 불트만이 과신한 이성과 과학적 사고로 따지자면, 복음서는 역사서라는 장르에 속합니다. 그 저자들이 특정 역사 시점에, 특정 지역에서, 특정 인물들에게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했다는 점을 확연하게 밝히면서, 그 증거를 나열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그 서두에서 자기가 쓴 글이 목격자들과 전파자들이 전해 준 대로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1:1-4). 그러면서 유대왕 헤롯 시대에 발생한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부터 풀어 놓기 시작합니다(1:5). 2장에서 소개하는 예수님의 탄생 시점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백성들에게 호적 등록하라는 칙령을 내린 시기로서,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와 겹친다는 역사적 정보를 제공합니다(2:1-2). 게다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가 서른 살쯤이었다면서(3:23), 그때가 바로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활동하던 때라고 지적하지요(3:1-2). 누가라는 저자가 얼마나 신빙성이 높은 인물인지 궁금하다면, 윌리엄 램지 경(Sir William Ramsay)의 평가에 주목해 보세요. “누가는 일류 역사가이다. (…) 이 저자는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램지 경이 도대체 누구냐고 따져 물을 불트만에게는, 그가 ‘독일 역사학파’에 소속된 학자로서 위대한 고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는 점만 밝혀 두겠습니다. 누가복음뿐 아니라 복음서 전체의 역사적 신빙성은 이미 오랫동안 논의된 주제입니다. 서지학적인 증거 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 수준도 그 내용의 신빙성을 충분히 뒷받침합니다. 이쯤 되면 복음서가, 처음부터 그 내용이 꿈이라고 밝힌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1678)과 같은 옛날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역사서라는 점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나요?
복음서 텍스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서른 살 될 때까지 전인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잘 갖추어 성숙하신(누가복음 2:40, 52) 후에, 3년 반 정도의 공생애 기간을 보내셨습니다. 그 시기에 예수님은 주로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사람들의 다양한 중대 필요들을 채워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각양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각종 질병을 치유하고, 죽은 자를 되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며,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키셨습니다. 각각의 기적이 특정한 필요를 온전히 채워 주었지만, 그 기적들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영생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실재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20:30-31)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이 공생애 기간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궁극적인 목적을 항상 의식하셨습니다. “인자(the Son of Man)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왔다.”(마가복음 10:45)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 수난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서만 각각 세 번씩 예고됩니다[마가복음 8:31-33, 9:30-32 및 10:32-34 참고]. 당시 제자들은 이 명시적인 예고를 도무지 깨닫지 못한 채,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항의하거나 자기 중에 누가 가장 큰가를 두고 논쟁하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네 번째 유월절 기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신 증거를 다각도로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두고도, 불트만은 복음서에 기록된 주요 사건들과 언명들이 역사적인 실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도리어 그것들은 신화, 즉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강변합니다. 메시아가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 임하거나,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음당한다는 신화들이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지요. 굳이 예수라는 인물이 출현했다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의 역사관이 담긴 아래 인용문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일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 which is capable of historical proof)이 아니다. 객관적인 역사가(The objectifying historian)라면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영원한 로고스(the eternal Logos), 즉 말씀(the Word)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그가 언급하는 ‘역사적인 증명’이나 ‘객관적인 역사가’라는 표현 속에서, 절대적인 객관성이라는 성취 불가능한 목표를 역사에 적용하려는 치기만만한 역사가가 아른거립니다. 그렇지만 복음서의 역사성에 대한 자기 평가가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도 없는 ‘객관적인 역사가’의 인정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지요. 역사적인 신빙성이 높은 복음서가 어떠한 사건들과 언명들을 기록해 두었고, 그것들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우리의 주목 대상이니까요. 그러나 불트만은 복음서의 기록 내용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선입견에 근거한 자기 사변에 따라 그 내용을 왜곡하기에만 골몰합니다. 그가 “신약 신학”(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1952)이라는 책에서 역설하는 내용을 한번 보세요. “바울의 케리그마[kerygma, ‘선포’(proclamation)라는 의미를 띤 헬라어]든, 요한의 케리그마든 예수의 인격(the personality of Jesus)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사실상 초대교회의 전통은 심지어 무의식적으로라도(even unconsciously) 예수의 인격이라는 그림 한 장(a picture of his personality)을 보존하지 않았다. 그것을 재구성(reconstruct)하려는 모든 시도는 주관적 상상력의 작용(a play of subjective imagination)일 뿐이다.”
세계적인 신학자로 명망이 높은 이가 어떻게 이 정도까지 예수님과 교회를 깎아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도 논평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그가 이렇게 말한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지요. 그의 언명은 교회가 예수를 능력 있는 교사요, 기적을 행하는 자요, 선지자요, 심지어는 종말에 임할 인자라고 선포하긴 했지만, 결코 헬레니즘식의 “거룩한 자”(divine man)로 선언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애써 설명한 후에 내린 결론입니다. 예수님을 기어코 신성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겠다는 불트만의 결의가 묻어나지요. 그 문단에 사용된 다른 두 번의 “인격”(personality)이란 단어에는, 강조하는 의미로 따옴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것을 포함하는 문장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초기 교회는 자기 가르침에 인상적인 권위를 제공한 예수의 놀라운 “인격”을 보고, 그가 메시아적 의미를 띤 존재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 “인격”이 아무리 위대했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영적이고 신비로운 존재”(the numinous)의 형태인 것처럼, “신비로운 그의 본질”(the mystery of his nature)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불트만이 요리조리 종횡무진으로 난삽한 말의 성찬을 벌인 의도를 알 수 있지요.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그의 인상적인 “인격”이 말해 준다는 말은 아예 입밖에도 꺼내지 마라! 복음서에 근거해 예수님의 됨됨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저 옛날이야기에 불과한 신화를 이런저런 주관적 상상력을 다 동원하여 재구성하려는 행태에 불과하다! ‘내로남불’의 끝장판이지요. 복음서 내용과 구성에 대해 진단하고 논평하면서, 그 출처도 불분명한 온갖 권위를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으로 행사하려는 그의 모습을 보세요. 복음서 몇 권은 써 본 저자 같지 않나요?
참 이상한 일이지요. 신약 성경을 정상적으로 정독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지 않나요?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예루살렘에서부터 교회가 형성되어 세계 각지로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의 거장이라는 불트만의 눈에는 그 명약관화한 사실이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자이자 과학주의자인 그가 취해야 할 선택의 영역이지요. 도리어 독서의 기본을 지키며 정독하면 곧바로 발견할 수 있는 복음서의 정수를 인식하지도 못했다는 데 그의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C. S. 루이스가 언급한 대로, “그들은 양치류 포자[양치류를 번식시키는 미세한 입자로,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음]를 본다고 하면서, 대낮에 10미터쯤 떨어져 있는 코끼리는 보지 못합니다.”(They claim to see fern-seed and can’t see an elephant ten yards away in broad daylight.) 여기서 그들이 누구일까요? 불트만처럼 정상적인 일반 독자에게 “자기들이 옛 문서의 행간을 읽어 낼 수 있다”(they can read between the lines of the old texts)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이들입니다(C. S. 루이스, “Modern Theology and Biblical Criticism”). 행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그들을 왜 믿어야 할까요?
<3. 복음을 대체한 실존주의 철학>
셋째,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은 복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실존주의 철학(Existentialist philosophy)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독자에게는 해석의 전제(presuppositions)가 되는 어떤 개념(certain conceptions)이나 사전 이해(previous understanding)가 이미 존재한다. 이 전제나 개념은 어떤 전통(tradition)에 근거해 있고, 또 이 전통은 어떤 철학(philosophy)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다. 이 시점에서 자기가 제안하는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이다. 해석자가 이미 품고 있는 개념과 철학적 시각이 해석에 미치는 영향력에 주목한 것은 옳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학적 상황이, 해석할 역사적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하여 해석하는 자유를 해석자에게 부여한 것은 아닙니다. 불트만이라는 해석자도 예외일 수 없지요. 그런데도 불트만은 자신의 신학 작업에 반대하면서, 자기가 기독교 메시지를 인간의 합리적 사고(human rational thinking)의 산물로 변질시켰다고 오해한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비신화화’ 작업은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genuine freedom)와 자유로운 순종(free obedience)의 길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신비’(God's mystery)가 지닌 진정한 의미를 분명히 제시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면서 그 신비는 이론적 사고(theoretical thought)의 영역과 연관되는 게 아니라, 개인적 존재(personal existence)의 영역과 관련이 있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그것과 연관된 신앙도 ‘하나님이 어떤 존재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행동하는가’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서, 결국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의 자연적 의지와 욕망(natural wills and desires of men)에 대한 신비라고 덧붙이지요. 즉 ‘비신화화’ 작업을 전개하는 자기 관심사는, 하나님에 대해 이론적이고 합리적으로 궁구하는 데 있지 않고, 역사적 존재인 각 개인이 현재 어떤 의지와 욕망을 품고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느냐에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입장이 그와 실존주의 철학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실존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 존재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어떤 철학이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관점과 개념을 제공하는가를 묻는다면, 실존주의 철학에서 배워야 할 것 같다. 이 철학이 인간 존재(human existence)를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은 ‘너는 이런 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는 존재해야 한다’(you must exist)라고만 말한다. 인간만이 존재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역사적 존재(historical beings)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각자의 현재는 항상 자신의 과거에서 나와, 자신의 미래로 이어진다. 각자 각각의 ‘지금’(each “now”)이 자기 과거와 미래에 관해 자유로운 결정(free decision)을 내리는 순간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각자 홀로 죽어야 한다. 그 외로움 속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실존주의 철학은 내 개인적 존재(my personal existence)에 대한 질문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지만, 개인적 존재를 내 자신의 책임(my own personal responsibility)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 말씀(the world of the Bible)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도록 도와준다.
한편으로, 자신의 ‘비신화화’가 인간에게 자유와 순종의 길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열어 밝힌다는 그의 입장은, 이전에 과학주의와 ‘연대기적 속물주의’를 내세우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짓밟던 그의 모습과 판이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똑같은 인물입니다. 그 장엄한 ‘하나님의 신비’를 언급하면서도, 성경 말씀 곳곳에서 하나님의 신비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골로새서 2:2, “God's mystery, that is, Christ Himself” 참조) 대신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실존주의 철학을 갖다 앉혔으니까요.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옛날이야기로 가득 찬 성경 말씀을 공들여 ‘비신화화’해서 도달한 게 실존주의 철학인데, 그 철학이 ‘내 개인적 존재’에 대한 질문에 아무 답도 주지 않는다니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습니까? 또 왜 그 철학의 인도를 따라 다시 구시대적인 세계관으로 가득 찬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나요? 더구나 우리 각자의 존재가 현재 시점에서 과거와 미래에 비추어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 중의 상식인데, 그것을 굳이 예수님에 관한 성경의 계시를 무시하면서까지 실존주의 철학에서 배울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불트만이 ‘실존주의 해석방식’(an existentialist interpretation)이라고까지 부른 ‘비신화화’ 작업이 도달한 막다른 골목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역설한 대로, 온 세상 곳곳에 구세주에 관한 온갖 신화들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그 신화들이 죄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신비를 통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역사가 된 신화”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쪼록 서두에서 언급한 그 성도님이 성경을 읽으실 때, 성령의 조명이 밝게 비추어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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