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성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천사의 빵’,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2)
-단테가 열어 밝히는, 역사가 된 신화-
“신곡”을 읽으며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단테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루면서 보인 과단성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 동물, 장소 및 다양한 이미지들을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전용한 경우가 자주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피테르[=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인 제우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폰이라는 상상의 동물로 묘사하는 장면은 파격적이기까지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유피테르로 상징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러자 그 녀석은 내가 안내자에게 자신에 대해 묻는 것을 깨닫고 외쳤다. ‘나는 살았을 때처럼 죽어서도 똑같다. / 유피테르가 자기 대장장이를 독려해 / 그에게서 날카로운 번개를 얻어 내 / 최후의 날에 나를 쳤을지라도, / (...) 유쾌한 복수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그러자 나의 길잡이는 내가 들어 보지 / 못한 아주 강한 목소리로 말하셨다. / ‘오, 카파네우스여, 너의 오만함이 / 꺼지지 않는 한 더욱 벌을 받을 것이니, / 너 자신의 분노 이외에는 어떤 형벌도 / 네 고집스러운 분노에 어울리지 않으리.’ / 그러고는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 말하셨다. ‘저자는 테바이를 공격한 / 일곱 왕들 중 하나로, 예나 지금이나 / 하느님을 존경하지 않고 경멸하지만, / 내가 그에게 말했듯이, 그의 경멸은 / 자기 가슴에나 어울리는 장식물이다. (...)’” [지옥-14곡]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서 카파네우스를 만났을 때 서로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그는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왕 중 하나로, 그때 유피테르를 모독한 것 때문에 유피테르가 대장장이[=불의 신인 불카누스]에게 받은 번개로 죽임 당한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지옥에서 뜨겁게 불타는 모래밭에서 불비를 맞으며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만한 자세로 유피테르를 비웃으며 빈정댑니다. 그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접한 베르길리우스가 그를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고 경멸하는’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가 경멸하는 것은 오로지 그에게만 어울리는 장식이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 로마에서 최고의 신으로 받든 제우스 혹은 유피테르를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표현합니다. 다음으로 이 유피테르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과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나에게 허용된다면, 우리를 위해 땅 위에서 / 십자가에 못 박힌 오, 최고의 유피테르여, / 정의로운 당신의 눈길은 어디로 향합니까? / 아니면, 당신의 지혜의 심연 속에서 / 준비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지성을 / 초월하는 선을 위해서입니까?” [연옥-6곡]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연옥에서 베르길리우스의 고향인 만토바 출신 소르멜로를 만났을 때, 단테가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조국 이탈리아에 대해 한탄을 늘어놓는 장면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두 번째 행의 ‘유피테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그 앞의 수식어들로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가 짐승으로 묘사되는 아래의 두 부분도 참고해 보세요.
▪“그 네 마리 짐승들 사이의 한가운데에는 / 바퀴가 둘 달린 승리의 수레가 있었는데, / 그리폰의 목에 매달려 끌려오고 있었다.” [연옥-29곡]
▪“이분은 우리 펠리컨의 가슴에 / 남아 있던 문이며, 또한 십자가로부터 / 위대한 임무에 선택되었던 분이라오.” [천국-25곡]
첫째 인용은 연옥 여정을 마감하고 지상 천국으로 올라간 세 시인[단테, 베르길리우스, 스타티우스]이 낙원에서 마텔다를 만난 후에 접한 경이로운 행렬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행렬 전체는 신약 성경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구체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네 마리 짐승’은 에스겔 1:5, 요한계시록 4:6에 등장하는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신약의 네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수레는 교회를 나타내고, 그 두 바퀴는 구약과 신약, 또는 도미니쿠스 성인과 프란치스코 성인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수레를 목으로 끄는 그리폰은 상상의 동물로서 사자의 몸체에다 독수리 머리와 날개에, 깃털로 뒤덮인 등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아마도 그리폰이 “몸 하나에 두 가지 성격을 가진 동물”(연옥-31곡)로 인식된 것 때문에,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갖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활용된 듯합니다. 둘째 인용은 사도 요한이 천국에서 빛 가운데 나타났을 때, 베아트리체가 그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보라는 위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 언급됩니다(요한복음 19:26-27). 그렇지만 여기에서 베아트리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펠리컨으로 비유합니다. 펠리컨이 자기 가슴을 부리로 쪼아 나온 피로 새끼들을 먹여 살린다고 당대인들이 믿은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떠올린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들 외에도 아래와 같이 천국이 올림포스나 로마나 심지어 수도원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아름다움과 착함 중에서 어느 것이 / 더한지 모를 나의 누이는 벌써 높은 / 올림포스[=천국]에서 승리의 영광을 누리지.” [연옥-24곡]
▪“그대는 잠시 동안 이 숲에 머물다가 /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저 로마[=천국]에서 / 나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연옥-32장]
▪“축복받은 수도원[=천국]에 옷을 두 벌 / 입고 올라온 빛은 단지 둘 뿐이니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 그런 사실을 그대들의 세상에 전하라.” [천국-25곡]
<은유로 변환한 신화>
이상의 예들을 통해 단테의 영적이고 문학적인 측면 두 가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단테가 이 세상에 회자되는 신화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과 유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그리고 상징하는 것들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신화가 존재하고,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신적 존재들이, 얼마나 경이로운 환경 속에서, 얼마나 탁월한 능력을 현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죄다 원초적인 신과 시원적인 낙원과 구속사적인 역사를 반영한다고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악인에게도 허락하셨듯이, 당신의 창조적인 영감과 지적 능력을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선사하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위대한 분이시라고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발견하는 진선미는 죄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천국을 그리는 이 위대한 서사시 속에 그토록 많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자유자재로 활용한 것이 그 증거가 됩니다.
둘째는 단테가 은유와 같은 수사적 기법의 대가였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첫째 측면과 직결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와 영감이 깃든 것들로 파악한 그는 그것들을 하나님과 당신의 사역과 연관 짓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유피테르로 표현함으로써,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물과 상황을 끌어다 자기가 의도한 뜻을 보다 창의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위에서 본 사례처럼 교만한 인간을 처단하시는 하나님의 면모를 카파네우스를 다루는 유피테르를 통해 보다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지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 카파네우스는 엄청난 체격과 체력을 겸비했으나 오만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은 전사였습니다. 그가 다른 6명의 전사와 함께 테바이를 포위했을 때, 그곳 성벽에 서서 제우스도 자신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이런 오만한 태도에 주목한 제우스는 벼락으로 카파네우스를 쳐서 죽였고, 그의 아내 에바드네는 남편의 시신이 불태워지는 장작더미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이 카파네우스는 ‘휴브리스(hubris)’, 즉 “그리스 비극에서, 과거의 성공을 바탕으로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다가 신과 갈등을 일으키고, 그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르게 되는 주인공이나 영웅의 특성”(우리말샘사전)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단테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이 교만이 하나님께 얼마나 적대적인 행태인지를,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이야기의 보고를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제시합니다.
<대를 잇는 휴브리스의 행진>
이야기를 조금 덧붙여 보자면, 카파네우스는 또 다른 휴브리스의 주인공들과 연관됩니다. 그는 왜 테바이를 공격했을까요? 테바이의 교만한 왕 에테오클레스는 자기 형인 폴리네이케스와 해마다 한 명씩 번갈아 다스리기로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형을 축출합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해서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토스의 사위가 되고, 아드라스토스는 사위의 왕위를 되찾아 줄 목적으로 카파네우스를 포함한 7명의 장수를 이끌고 테바이로 진격합니다. 결국 그 침공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이 전투 중에 테바이의 왕 에테오클레스는 폴리네이케스와 상대하여 싸우던 중에 서로의 손에 죽어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왕좌에 오른 그들의 외삼촌인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는 애국자로 여겨 명예로운 장례식을 치러주지만,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이므로 그의 시신을 죽은 그곳에 방치해 두라고 명령하면서 누구라도 그 시신을 매장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의 시신이 개와 독수리의 먹이로 전락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가 저승으로 가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 반인륜적 행태였습니다. 이때 두 형제의 여동생인 안티고네는 왕이 내린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큰 오빠의 장례를 치릅니다. 그 매장 중에 발각된 안티고네는 크레온이 자기를 생매장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알고 자결합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남매들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입니다. 그는 원래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강간하고, 크리시포스는 자결함]와 이오카스테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장차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사실상 펠롭스의 저주]이 알려집니다. 화들짝 놀란 라이오스 왕은 그가 죽도록 내버리지만, 기적적으로 타향인 코린토스의 왕가에 입양되어 왕자로 자라게 됩니다. 장성하여 자기가 양자라는 사실을 접한 그는 피토 신전에서 자신에 대해 그의 친부모가 자기에 대해 받았던 것과 똑같은 신탁을 받습니다. 코린토스를 떠나 떠돌아다니던 중에, 길을 비켜주는 것 때문에 시비가 붙은 한 남자와 그 일행을 죽이게 되지요. 그 후 테바이에 도착한 그는 시민들을 잡아먹던 괴물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아침엔 네 발, 정오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를 풀고 그것을 제압한 후[=치욕을 느낀 괴물은 바위에서 떨어져 자결함] 테바이의 영웅이 됩니다.
당시 테바이의 실권을 쥐고 있던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자기 누이동생이자 선왕의 과부인 테바이의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시키고 왕권도 건네지요. 왕이 된 오이디푸스와 왕비 이오카스테는 4명의 남매[=폴리네이케스, 에테오클레스, 안티고네, 이스메네]를 둡니다. 그런데 테바이에는 기근과 역병이 돌기 시작하는데, 오이디푸스는 그 국가적 혼란을 자신이 완벽하게 해결할 것이라는 오만한 태도를 표출합니다. 그것을 잠재우려면 선왕이었던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를 찾아 처벌해야 한다는 신탁이 주어집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그 범인을 끝까지 추적해서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증언을 모으던 중 자신이 바로 그 범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스핑크스 사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델포이로 가던 라이오스 왕을 그가 죽였고, 그 왕이 바로 친아버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오카스테가 먼저 자결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그녀를 껴안고 그녀의 황금 핀으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른 후, 테바이를 떠나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순식간에 공공의 적으로서 ‘신성한 복수의 대상자’로 전락한 오이디푸스의 방랑에 동반자가 된 이도 역시 자기 딸이자 누이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였습니다. 그들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동행했다가 나중에 테바이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라이오스, 오이디푸스, 에테오클레스처럼 대를 이어 휴브리스의 전범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자주 등장합니다.
<은유에 대한 이해와 활용>
사후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과감하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은유의 대상으로 전용하는 단테의 모습이, 천국의 다양한 면모를 묘사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온갖 비유와 이야기를 활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오버랩됩니다. 그는 율법 조문을 앵무새처럼 되뇌기만 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자연을 접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늘상 접할 수 있는 사물과 생명과 상황에 빗대어 천국의 메시지를 녹여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비유들을 들을 때는 바로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만, 그것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기억에 남아 묵상의 재료가 되었고 천국의 참모습을 열어 밝히는 영적 양식이 되었습니다. 비유를 빚어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게 아닙니다. 그가 12세에 보여주었던 사례처럼, 늘 차분히 앉아, 듣고 [혹은 관찰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가르치는 과정이 18년간 이어진 산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촌철살인의 한마디, 형세를 역전시키는 질문 한 가지, 시의적절한 비유 한 자락은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것들을 받을 만한 옥토의 마음을 준비한 이들을 변혁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단테의 본을 통해서, 은유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긴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특히 무언가를 가르치는 교사나 강사,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나 전도자들에게 더욱 절실한 자질입니다. 은유란 어떤 것을 설명하면서 그것과 특정한 방식으로 동일한 다른 어떤 것을 언급하는 창의적인 방법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형상화된 보조관념(vehicle)을 통해 원관념(tenor)을 나타내는 표현법입니다. 여기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연결해 주는 것은 이 둘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정한 측면, 즉 본질(ground)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금언은, 시간을 설명하면서 시간과 ‘소중함’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돈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이 금언에서 시간은 원관념이고 돈은 보조관념인데, 시간의 본질 중 하나인 ‘소중함’을 돈이라는 보조관념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지요. “사랑은 전장(戰場)이다.”(Love is a battlefield.)라는 표현은, 사랑을 설명하면서 사랑과 ‘치열함’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전쟁터를 언급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이 표현에서 사랑은 원관념인데, 사랑의 본질 중 한 가지인 ‘치열함’을 전장이란 보조관념을 통해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성된 은유가 어떤 기능을 해낼까요? 두 가지 주요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원관념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지각할 수 없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원관념을, 지각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운, 형상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게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설득이나 격려나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둘째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 냅니다. 형상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수많은 생각과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시간이 돈이다.’라는 은유가 소개된 후부터 영어권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다’, ‘시간을 투자하다’, ‘시간을 낭비하다’, ‘시간을 아끼다’, ‘시간을 빼앗다’와 같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기능을 ‘은유는 설득의 아버지이자, 창의의 어머니’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김용규, 김유림, “은유란 무엇인가”)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은유가 교수 활동의 매개로 활용되는 경우이므로, 위에서 언급한 첫째 기능에 주목하면서 둘째 기능의 가능성도 함께 모색해 보겠습니다.
은유법 활용의 대가인 C. S. 루이스의 글 속에 나오는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는, “인생은 싸구려 호텔의 불편한 침대와 같다.”(life is rather like a lumpy bed in a bad hotel.)는 표현입니다(“Yours, Jack”). 역사학 예비 시험에서 쓴맛을 본 자기의 대자(godson)를 위로하고 격려할 양으로 보낸 편지 중에 나옵니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불쾌한 시기로 회고하는 기간을 통과하고 있지만, 그 시기가 계속되진 않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은유입니다. 그가 처한 난감한 상황이라는 원관념의 의미에 대해 어리둥절해 하는 대자에게, ‘싸구려 호텔’에서 접하게 되는 ‘불편한 침대’라는 보조관념을 통해 그 의미를 명징하게 밝히고 있지요. 현재 처한 상황의 본질은 ‘불편하지만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잠자는 건 생각도 못하고 어떻게 그 침대에 누울까 싶다가도, 시간이 얼마 지나기만 하면 곤하게 잠에 빠져들게 될 뿐 아니라 나중에 깨어나서는 그 침대가 아주 안락하게 느껴지는 상황이 떠오르지 않나요? 이 상황이 그려지고 그 경험이 느껴지는 순간, 그 대자는 그 낙심천만한 상황을 극복해 낼 힘을 얻게 됩니다. 게다가 그 이후에 직면하게 될 맥 빠지는 순간에도 ‘하룻밤만 묵다 가자!’는 창의적인 모토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우리 모두에게 닥친 문제는 죽음이냐 삶이냐가 아니라, 지금 기관총을 맞고 죽느냐, 40년 후에 암으로 죽느냐다.”(there is no question of death or life for any of us; only a question of this death or of that -- of a machine gun bullet now or a cancer forty years later.)라는 표현입니다[“전시의 학문”(Learning in War-Time)]. 세계대전에 직면해 있는 학자들에게 다가오는 세 가지의 적 중에 세 번째가 두려움(fear)이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죽음과 고통에 대해 무관심할 필요는 없지만, 상상력의 환상에 대해 경계하라는 뜻으로 지적한 내용입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고통당하며 죽는 것과 생명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대조될 수 있는 것인 양 상상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상상은 우리가 결국엔 이런저런 방식으로 죽게 될 것을 망각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여기에서 원관념이 전시에 닥친 문제라면, 보조관념은 지금 기관총을 맞고 죽는 것과 40년 후에 암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 문제의 본질은 ‘죽는 시기와 원인의 차이’입니다. 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매일 죽음이 실질적인 문제로 다가와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세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백한 것처럼 이런 상황이 도리어 축복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대비하며 살아갈 힘을 얻게 될 뿐 아니라, 평온한 삶의 환경을 누리며 살더라도 ‘오늘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50년 후에 자연사할 수도 있다!’라는 창의적인 생각을 염두에 두게 될 것입니다.
<은유의 자리매김: 계시 전달과 새 개념 창조의 도구>
은유를 자유롭고도 과감하게 활용한 예수 그리스도와 단테의 면모는,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가 좇아야 할 본입니다. 은유를 통해 난해한 개념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의 의미를 생생하게 파악함으로써, 정신이 명료해지고 감정이 정화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한발 더 나아가 그 은유적 표현을 기반으로 새로운 표현과 아이디어들을 창조해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은유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이지, 계시 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지지하는 입장은 하나님이 유피테르라는 것이지, 유피테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이 하나님인 것은 아니라는 말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당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숭배의 대상이나 절대적인 애정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시편 18:3)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그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의 뿔, 산성 자체를 숭배하거나 사랑할 수는 없지요.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면, 그리스도교 목회자나 교사나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단테처럼 은유적 표현들을 만들고 활용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그 측면에서 계속 성장해 가야 합니다. 자신의 설교나 강의나 전도 내용에 하늘의 빛과 생명이 깃든 은유적 표현이 담겨, 그것들을 접한 이들이 ‘aha moment’[=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명확해지는 순간]를 누릴 수 있도록 성령의 영감을 구하며 그 말씀 사역을 준비하는 게 절실합니다. 이에 덧붙여 이미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다양한 은유의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긴요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인도 설화나 중국 민담들을 말씀 사역에 포함한다면, 우리의 설교나 강의나 전도가 얼마나 풍성하고 생생해질까요? 지금까지처럼 그저 미국과 영국이 배경을 이루는 제한된 사례들을 단조롭고 상투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이제 지양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다양한 인문학적, 문화적 자원들을, 만인에게 해와 비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부어 주신 선물로 봅시다. 그리하여 지혜롭고 트인 마음으로 그것들을 선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갑시다. 은유의 의미를 이해하고, 은유적 표현을 창조하며, 손에 넣을 수 있는 다양한 은유적 묘사를 선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이 추구하는 본령 중 하나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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