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인 미래에 접속하기
해마다 12월이 되면 지난 한 해가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한편으로 시간 지나가는 줄 모르고 지낸 측면이 있습니다. 서양 고전 소설들과 새로운 책들을 읽고 그것들 안에 담긴 신선한 시각들을 접하면서 깨닫게 된 것들을 글로 옮기며 지냈으니까요. 다른 한편으로는 서운한 측면도 있습니다. 행복된 나날들 가운데 펼쳐진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들을 붙잡지 않은 채 그냥 흘러 보낸 때가 적지 않았으니까요. 그토록 그리워한 고국 생활로 돌아온 지도 벌써 6년이나 된 현시점에서 이 대목이 더욱 아쉬워집니다. 귀국한 첫해 봄과 가을을 보내며 경험한 그 감격도 이젠 시들해져서 그저 계절이 지나가는 것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국내와 국외 사정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다각도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계속 기울였어도, 어제와 오늘의 자연환경이 어떻게 달라지고 어제와 오늘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피고 주목하는 측면은 부족했습니다. 이런 영역에서 이루어진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과거의 매일 동안 깨어 주위의 상황을 인식하고 마음을 챙기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제 인생은 축소되었고, 소모되었습니다. 과거의 매 순간 펼쳐지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놓쳐버렸으니까요.
더 늦기 전에 마음을 다시 가다듬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당연시하지 않고 매 순간 깨어 있어 현재 이루어지는 세상의 향연에 깊게 접속되어 있겠다는 다짐입니다. 향연이란 단어가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이들이 많이 있을 듯합니다. ‘2022년 서울청년패널 기초분석 결과’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청년(19-36세) 중 절반(55.6%)이 ‘빈곤’ 상태에 처해 있고, ‘우울 증상’을 겪고 있는 청년도 무려 35%나 된다고 하지요. 자산 빈곤 상태란 균등화 가처분 중위소득 50%의 3개월 치[2021년 기준 월 소득 132만2,500원의 3개월 치인 396만7,500원] 미만의 자산을 가진 경우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노인(66세 이상)의 경제적 처지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입니다. 2021년 현재 노인들의 상대적 빈곤율이 39.3%에 달하니까요. 이 빈곤율은 전체 인구 중 중위소득 50% 이하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을 수치로 나타낸 것이지요. OECD 주요 국가들과는 비교 불가능입니다. 40%에 달하는 그 수치가 그 국가들보다 적어도 2배에서 무려 10배 가량이나 높은 수치이니까요. 그러나 깨어 있는 삶 혹은 마음 챙기는 삶은 경제적인 여건뿐 아니라 각양각색의 환경적 요인을 초월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외부적 여건이 어떠하든 인생 자체의 의미와 가치에 눈을 뜨고 매 순간 펼쳐지는 삶의 여정을 선물로 여기며 그 끝이 다하는 순간까지 순명(順命)하는 삶입니다. 비록 경제적 여건이 삶을 영위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에 목숨을 걸 수도 없고 걸어서도 안 됩니다.
-온 세상 재물보다 더 나은 것-
칼 필레머(Karl Pillemer) 교수가 삶의 이모저모에 대해 1,000여 명에 달하는 현자(賢者, experts)들에게서 들은 소중한 조언들 30가지를 책으로 엮은 게 있습니다. “30 Lessons for Living”(“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됨.)이라는 책입니다. 그들은 직업과 연관하여 한결같이 이렇게 조언합니다. “사랑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 온전한 행복을 누릴 일에 종사하라.”(get into something that you love, that you have an aptitude for, and where you’re totally happy) “큰돈을 버는 것”(making a lot of money)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숱한 청년들이 겪게 될 삶의 시나리오에 정말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은 단도직입적입니다. “언제나 돈보다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낸 시간이 훨씬 낫다.”(time well and enjoyably spent trumps money anytime.)라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조금 부족하게 사는 것은 감수해야 하며, 이는 지극히 지극히 당연한 것”(If doing what you love requires living with less, for the experts that’s a no-brainer.)이라면서,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는데 수입이 줄어들까 봐 걱정된다 해도 일단 그 일을 하라.”(if there’s another career you wish you could pursue but you are worried that it will bring a drop in income, do it anyway.)는 것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점은 그 현자 중 단 한 사람도 “언급하지 않았던”(didn’t say) 것이라고 필레머 교수는 지적합니다. 즉 아무도 “행복해지기 위해 원하는 것들을 다 살 수 있는 돈을 벌도록 최대한 열심히 일해야 한다.”(to be happy you should try to work as hard as you can to make money to buy the things you want)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주변 사람들만큼은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며, 그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it’s important to be at least as wealthy as the people around you, and if you have more than they do it’s real success.)라고 말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가 바라는 미래의 수익력을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you should choose your work based on your desired future earning power.)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청년과 노인 세대의 진정한 문제는 경제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지역처럼 전쟁 중에 처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아프리카 빈국의 국민처럼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엄연한 선진국에 살고 있습니다. 정작 문제는 그들이 사랑하는 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일, 의미 있고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일감을 아직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허송하는 데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점은 청년들이 그러한 일감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학교나 가정이 제대로 계도하거나 권장하지 않았고, 중년들은 돈 버는 일에만 매몰되어 있으며, 노인들은 그러한 일감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데 급급한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인 처지가 더 나아진다고 해서 그 모든 세대가 죄다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리게 될까요?
성경에서도 필레머 교수의 보고와 결을 같이 하는 시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래 두 성구에 주목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For this reason I say to you, do not be worried about your life, as to what you will eat or what you will drink; nor for your body, as to what you will put on. Is not life more than food, and the body more than clothing?)
(누가복음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Then He said to them, "Beware, and be on your guard against every form of greed; for not even when one has an abundance does his life consist of his possessions.)
첫 성구에서 예수님께서는 삶[목숨, 생명]과 몸과 관련된 의식주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근심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삶과 몸이 의식주 문제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심으로써 그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의식주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과 몸에 더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 구절의 첫 단어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그 이전 구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의 재물은 중립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물질주의의 원리“(the principle of materialism)입니다(R. T. France).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삶과 몸의 필요를 당신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신뢰하고 당신의 뜻에 순종해서 살기보다 그 필요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당신을 불신하는 태도요, 물질주의의 원리에 사로잡힌 상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대신 재물의 종으로 전락한 처지라는 것이지요.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모은 재물은 아무리 많아도 그 속에 생명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것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일구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누리는 풍성한 삶 대신 선택하고 추구한 물질주의적 풍요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누가복음 말씀의 진의일 것입니다. 인생 말년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젊을 때, 삶의 매 순간을 주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실행해 가야겠습니다. 이 주님 말씀의 진실성을 인생의 선배들이 이미 활짝 열어 밝혔습니다.
-미래와 접속하기-
하루하루 매 순간 깨어 있어 현재 펼쳐지는 세상의 향연에 깊게 접속하는 데 도움을 준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리처드 커티스(Richard Curtis) 감독이 제작한 “About Time”(2013)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변호사인 Tim[Domhnall Gleeson(‘도널 글리슨’으로 발음함) 분]은 대학교수로 근무하다 50세에 은퇴한 아버지 James[Bill Nighy(빌 나이) 분]로부터 비밀을 한 가지 듣습니다. 자기 집안의 남자들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행은 자신들의 생에 국한된 것으로 과거로만 갈 수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양손을 세게 쥐면 자기가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비로운 재능을 여동생 친구인 Charlotte에게 발휘해 보지만 실패합니다. 두 달 동안 자기 집에서 지낸 그녀에게 마지막 날(‘last day’) 밤에 사랑 고백을 하지만, 그동안 시간이 많았는데 마지막 날 밤에 그 고백을 듣게 되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이라는 모욕적인 느낌(‘an ever so slightly insulting afterthought’)이 들어 싫다는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달이 지난 과거로 돌아가, 그녀에게 사랑 고백을 하니, 마지막 날에 보자는 응답을 받게 되지요. 시간 여행이 능사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능력은 다른 곳에서 빛을 발합니다. 런던에서 살던 집 주인인 아버지 친구이자 극작가인 Harry의 연극 주인공들이 대사를 까먹어 연극을 망친 상황을 극적으로 역전시킨 것입니다. 그 극장에 간 덕에 이미 만나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된 책 평론가 Mary[Rachel Adams(레이첼 아담스) 분, Tim 엄마와 같은 이름]와의 만남이 무산되어, 그녀가 좋아한다던 Kate Moss의 사진전에 가서 그녀와 새로운 관계를 틉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친구 Joanna의 파티[Tim이 극장에 가는 대신 참석하기로 한 파티]에서 만난 남자친구 Rupert 와 사귀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파티 시점으로 돌아간 Tim은 Mary와 사귀게 되어 결혼에 골인합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데도 한계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자기 첫째 딸 Posy가 태어난 날 병원으로 오던 여동생 Kit Kat이 남자 친구 Jimmy와 싸운 뒤 술을 마신 후 차를 몰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것을 안 Tim이 이 상황을 바꾸기를 시도하지만, 나중에 Posy 대신 남자아이가 태어나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 병원 상황으로 돌아간 Tim은 아버지에게서 한 생명이 태어난 이후로는 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시간 여행의 한계에 대해 듣게 됩니다. 결국 병상에서 버티면서 Kit Kat이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 Jimmy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 친구를 사귀도록 돕습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아버지는 Tim에게 자기가 경험한, 행복을 위한 비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첫째 부분은 다른 사람들처럼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둘째 부분은 다시 그 매일을 거의 똑같이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부분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긴장과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두 번째는 주목하며(noticing)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Tim은 아버지가 가르쳐 준 비법보다 한 발 더 진전된 교훈을 얻습니다. 스스로 시간 여행을 하는 중에 깨달은 마지막 교훈이었지요. 그것을 깨달은 후부터 그는 더 이상 단 하루도 시간 여행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교훈은 이러합니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가 마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인생의 마지막 충만한 날인 것처럼 즐기기 위해서 일부러 이날로 돌아온 것처럼 노력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함께 시간을 여행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이 놀라운 여행을 만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I just try to live every day as if I’ve deliberately come back to this one day to enjoy it as if it was the full final day of my extraordinary, ordinary life. We’re all travel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 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이 교훈에 따라 그는 딸과 함께 보내는 매 순간에 주의을 기울이며 그 시간을 기쁨과 감격으로 보냅니다.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보내는 긴장된 시간들도 마음을 챙겨 음미하며 보내니 즐겁기만 합니다. 매번 아침 시간에 허둥지둥하다가 숨을 돌리고 주의를 기울이니, 그동안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편의점 직원이 짓는 아름다운 미소도 넉넉하게 누리게 됩니다.
Tim의 아버지와 Tim이 누린 행복의 비법은 한 마디로 미래와의 접속입니다. 아버지의 비법은 인생을 한 번 산 후에 과거로 돌아가 두 번째로 그 인생을 주목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의 삶은 미래의 시각으로 현재를 사는 것이지요. 한 번 미래를 살아보니 어떻게 현재의 나날들을 보내는 게 가장 바람직한지 깨닫게 되었지요. Tim의 비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을 한 번만 살지만, 하루하루를 미래에 닥칠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 충만한 날을 만끽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시각과 결을 같이 하는 유명한 발언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의 언명입니다. “현재 이미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그것도 지금 막 취하려는 행동이 과거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취한 행동이었던 것처럼 살아라!”(Live as if you were living already for the second time and as if you had acted the first time as wrongly as you are about to act now!)[“Man’s Search for Meaning”(1946),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번역 출간됨.] 여기에서 과거 첫 번째 행동이란 것은 사실상 현재에서 보면 미래의 행동이지요. 그 미래에서 겪은 그릇된 행동의 경험이 현재 시점에서 저지를 수 있는 잘못된 행동을 막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필레머 교수가 인터뷰한 숱한 현자들이 베풀어준 교훈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미래를 먼저 살아 본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삶의 교훈이니까요. 이처럼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현재 매일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기’를 도와줍니다.
Tim의 아버지나 Tim은 죽음이란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생을 두 번 산다’라든가 ‘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죽음이란 엄연한 현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빅터 프랭클의 언명은 죽음이란 단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인용된 그의 말은 인간이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어떻게 고통과 죄와 죽음의 의미를 변혁시키는가를 다룬, “비극 속에서의 낙관”(The Case for a Tragic Optimism)이라는 제목의 장(chapter)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요소가 삶에 관한 것이라고 봅니다. 삶을 이루는 매 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삶의 ‘일시성’(transitoriness)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매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살아야 한다’(to make the best possible use of each moment of our lives)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돌이킬 수 없는 것’(the irreversibility of our lives)이라는 사실을 절감할 때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즉 죽음이란 요소가 인생의 일시성과 비가역성을 낳고 이것들이 매 순간 의미 있는 인생을 누리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미래에 주목하기-
프랭클은 죽음을 언급하긴 했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어떤 상황에서든, 심지어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이승의 삶은 잠재적으로 절대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죽음 이후의 삶은 이 땅의 지식이나 통찰력으로 엿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초자연적인 영역인 하늘에서 비롯된 계시만이 내세의 삶에 대해 의미 있는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그 계시의 결정체인 성경은 죽음 이후 혹은 이 세상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궁극적인 상황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to bring all things in heaven and on earth together under one head, even Christ(NIV). 에베소서 1:10(새번역)] 즉 내세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임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을 받으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온 세상의 주관자로 등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으로 인해 새 하늘과 새 땅이 재창조되고,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져 영광스러운 공동체가 형성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 참조). 이승의 삶에 내재된 일시성과 비가역성이 그 의미를 잃는 재창조된 영원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게 될 궁극적인 미래이며,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리처드 커티스 감독과 칼 필레머 교수와 빅터 프랭클 박사가 밝힌 대로 미래와의 접속이 현재의 매 순간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누릴 수 있게 한다면, 죽음 이후 혹은 이 세상의 종말 이후에 펼쳐질 궁극적인 미래와의 접속은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단순히 현재의 매 순간에 주목하면서 즐겁게 삶을 누리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며 당신께서 허락해 주신 사람들을 섬기는 데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지상 명령을 실행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게 되겠지요. 이승의 모든 재물과 재화는 다 파괴되거나 사라지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유일하신 신이요 왕으로 군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장차 새로운 몸을 입고 재창조되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복낙원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궁극적 미래가 너무 영광스럽고 신비롭게 보여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득의만만할 수도 있고, 온갖 일을 다 하느라 탈진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 이후에 혹은 세상의 끝 이후에 우리가 직면해야 할 심판이란 요소는 이런 경향을 교정해 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자신의 책무를 어떻게 감당했는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직고하는 날이 엄존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5:10).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몸으로 실행하는 일상의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입니다(로마서 12:1). 이 일상 속에 경건한 하나님 사랑과 실천적인 이웃 사랑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복된 삶의 기본은 12:3에 계시되어 있는 대로,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는 것”(공동번역)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맡은 본분과 소명을 생애 다하는 날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나가서 돼지를 먹이는 일이건 100년 후에 닥칠 거대한 악에서 인류를 구해 낼 선한 계획을 세우는 일이건, 자신의 소명을 열심히 감당하다가 심판을 맞는 사람은 복됩니다."[happy are those whom it (judgment) finds labouring in their vocations, whether they were merely going out to feed the pigs or laying good plans to deliver humanity a hundred years hence from some great evil.] 우리가 직면할 심판은 처벌(punishment)을 위한 선고(sentence)나 보상(award)이라기보다는 평결(the Verdict)일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한, 절대적으로 정확한 평결(absolutely correct verdict)이자 완전한 비평(perfect critique)이 되겠지요. [C. S. 루이스, "The World' Last Night"]
이 '오류 없는 심판'(infallible judgment)에 직면하게 될 궁극적 미래를 그리며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이 복됩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위에 저항할 수 없는 빛(the irresistible light)이 쏟아질 때 매순간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돌아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가 처한 상황을, 여자들이 가끔 인공 조명 아래서 자기 옷을 살피면서 그것이 대낮에 어떻게 보일지 판단하려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이것은 현세의 전깃불이 아니라 내세의 대낮의 빛에 대비하여 영혼의 옷을 입는 우리 모두의 문제와 매우 흡사하다. 좋은 옷은 그 빛을 감당할 수 있는 옷이다. 그 빛은 더 오래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That is very like the problem of all of us: to dress our souls not for the electric lights of the present world but for the day light of the next. The good dress is the one that will face that light. For that light will last longer.) 덧없는 재물에 연연하는 대신, 매 순간 마음을 챙겨 그 순간을 주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합시다. 우리의 궁극적 미래를 기억하고 염두에 둠으로써 매일 맞이하는 오늘을 여생의 첫날이자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갑시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선물인 은사와 재능에 따라 맡겨주신 직무와 소명에만 충실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Well done, good and faithful slave, 마태복음 25:21)라는 영광스런 평결을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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