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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진보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16.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진보

돌이켜 보면 한 일도 별로 없는데 숨 가쁘게 달려온 60 평생이었습니다. 제 생애가 얼마나 남았는지 종잡을 수 없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에 있어 충실을 기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제 삶 속에 일어난 일 모두가 주님께서 주도하신 것이 분명한데도 마치 제가 그 모든 일의 ‘보스’인 양 처신했기 때문에 제 뜻대로 전개되지 않은 상황에 접하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지난 21년 간 살았던 곳에서 그 백성들을 향해 주어진 제 역할은 단지 한 가지 ‘선물’에 불과한데도 마치 그 백성들의 ‘구세주’인 양 온갖 영역에서 기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던 어리석음도 제 뇌리를 스칩니다.

 

이 시점에서 무릇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란,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자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에서 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됩니다. 이 삶은 그리스도 에서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으며 믿음 에서 감사가 넘치면서 굳게 서는 역사로 계속 이어지게 마련입니다(골1:20, 22, 2:6). 더구나 인생의 목적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고후5:9)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본질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히11:5,6, 창5:22, 24)이 확연하기에 60세를 눈앞에 두고 인생3막을 진행하고 있는 이 의미 있는 시기에 다시 한번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의의와 그 효과적인 방도를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이 영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저희들에게 도전을 준 이들이 두 분 계십시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lyor)와 ‘프랭크 라우박’(Frank Laubach)입니다. ‘테일러’는 19세기 후반기에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구원의 지식 없이 매주 25만 명, 매달 100만 명, 매년 1,200만 명씩이나 죽어 가는 중국인들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지금도 ‘OMF’라는 선교 단체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라우박’은 문맹퇴치 방법을 계발해서 전 세계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선교사로서, ‘Literacy(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위대한 선교적 역사를 이룬 것뿐 아니라 걸출한 경건의 삶을 지속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생애 중 하나님과의 관계 계발에 있어 결정적이었던 상황들을 돌이켜 보면서, 진행 중인 인생3막의 제 삶에 있어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진작을 꾀하고자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 이야기는 “Discipleship Journal”에 실린 앨리스 포이노<Alice Poynor>의 글을 많이 참조했음.)

 

-허드슨 테일러의 경우-

먼저 ‘허드슨 테일러’는 15세에 개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로잡으셔서, “나를 위해 중국으로 가라”는 소명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1853년 ‘중국복음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7년 간 중국 여러 지역에서 사역한 후에 독립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앓는 몸과 낙담하고 좌절된 심령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무려 5년간이나 되는 갈등의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매달 백만 명의 영혼이 그리스도 없이 죽어 가는 상황에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가서 그곳 복음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경험이나 지혜가 부족한 자기가 어떻게 그 이국적이고 호전적인 땅에 아무런 자원도 없이 그 선교사들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갈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그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을 신뢰하게 되어, 1865년에야 비로소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창설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사역에 드려지게 됩니다.

 

개심한 당시로부터 테일러는 영혼들에 대해 엄청난 열심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그를 더욱 사로잡아 온 것은 바로 거룩함에 대한 걸출한 갈망이었습니다.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외면적인 표지들(그의 친구들과 친지들이 경탄해 마지않는)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 유쾌함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20시간 동안 일하고, 하루에 150명의 환자들을 진료하고, 적응 훈련을 시켜주고 보호해 주고 감독해 주어야 할 새로운 일꾼들이 기다리고 있으며, 설교하고 가르치고 운영해야 할 일반 업무들이 즐비한 상황 중에서 테일러에게는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을 것입니다. 종이로 구멍 난 벽을 막아야 하는 너덜너덜한 집에 살고 있던 그에게는 돈이 그의 기도 제목을 주도하는 필요가 되었을 법합니다. 그리고 선교회 안팎에서 들려오는 비판의 소리들이 자기를 삼키고 중국인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는 태도에 직면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아마도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보다 더 잘 수용되는 일을 위해 기도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모든 것들보다 더 거룩해 지기를 원했습니다.

 

영적 투쟁을 해 나가는 중에 그가 확신하기로는, 거룩해지는 길은 믿음을 통해서라는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골2:6).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했습니다(고후5:7). 그렇지만 그러한 시각은 단지 그 문제를 한 발 더 후퇴시키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결국 남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의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어떤 동료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 중에 그는, “어떻게 믿음이 강하게 될 수 있는가? 믿음을 추구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실하신 분께 안식하는 것에 의해서이다”라는 부분을 읽게 된 것입니다.

 

테일러는 바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그 비결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빨아 들여 내 속에 주입할 수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그 포도나무이심을 기억하는 데 있는 것이다... 믿음이 거룩함을 낳도록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한 거룩함에 대한 사실을 기뻐하는 데 있다... 그분과 함께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가 됨으로써 이 거룩함은 우리 것이 된다. 그의 자원들은 내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비롯된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 경험을 “교환된 삶”(the exchanged life)이라고 불렀고, 그 선교회 구성원들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실상 ‘케직’ 사경회(운동)(Keswick movement)에서 “거룩한 삶” 또는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불려 진 것도 바로 이와 동일한 경험이었지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 ‘교환된 삶’, ‘거룩한 삶’), 그것은 테일러가 추구한 것이었고 그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죄악을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새롭고도 강력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동료 선교사 중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그 일 이후에 그가 모임에서 말할 때에는 언제나 새로운 능력이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적인 삶의 영역들 가운데서 새로운 평화가 그를 사로잡았다. 걱정거리들이 이전처럼 그에게 염려가 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대신 그는 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일과가 시작되기 전까지 성경 공부와 기도를 위해 두 시간을 보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하신 것은 그가 이후에 경험하게 될 엄청난 시련을 준비시켜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나 여겨지기도 합니다. 1869년에 테일러의 다섯 살짜리 아이가 병들어 죽었고 그 이후에 발발한 ‘양초우’ 폭동으로 테일러 부부는 거의 죽을 뻔한 적이 있었던 데다가, 그 시기에 그들의 새 아이가 또 죽었으며 나중에 테일러의 부인인 ‘마리아’까지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테일러는 그리스도의 초대를 붙잡았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테일러는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한꺼번에 꿀꺽 삼킬 양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마시는 데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그 근원을 말리고 그 강을 바닥나게 할 두려움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톈친’ 대학살 사건이 발발하여 21명이나 되는 선교사들이 피살되었을 때도 테일러는, “주님께서 통치하신다.”라고 쓰고 있었고, 자신이 중병에 들어 쓰러져 있었을 때에도, “오늘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오늘의 짐을 질 수 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승리의 원천으로 새롭게 이해한 것으로 인해 그는 더욱 강해졌던 것입니다. 그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과로도, 하나님께서 그를 그 일로 부르셨고 그가 현재 있는 곳에 두셨다는 확신으로 인해 그 일들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일들이 바로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으로 인해 더 이상 걱정을 모르고 지내는 느긋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께서 허락해 주신 사랑으로 선교회 내의 불평분자들을 사랑으로 이해하고 대우해 주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린 안식으로 인해 자신과 자신의 사역에 대해 근거 없는 비판을 해 대는 인물들을 고요하고 평화적으로 대우해 줌으로써 참소자들을 잠잠케 했을 뿐 아니라 더욱 많은 새로운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내지 복음화를 위해 더욱 더 많은 사역을 감당하면서 항상 앞으로 전진해 갔습니다. 자신을 시험하는 환경들이 결코 그의 전진을 가로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테일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예외적으로 은총을 받은 어떤 영혼의 특별한 몫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지속적으로 경험하도록 된 것이라는 점을 거듭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이 연합된 삶에는 필연적으로 열매가 따르기 마련이라는 점도 언급했습니다. “모든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 모든 우리 적들에 대한 승리, 순결하고 거룩한 삶, 열매가 항상 더 많이 맺히는 삶,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즐거운 결과입니다.”

 

-프랭크 라우박의 경우-

다음으로, ‘프랭크 라우박’(Frank Laubach)은 프린스턴 대학(1909년 졸[학사]), 컬럼비아 대학(1912년 졸[사회학 석사], 1915년 졸[사회학박사])을 거쳐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한 바 있으며(1913년), 1915년 그의 아내와 함께 선교사(‘유니온’ 회중교회 파송)로서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민다나오 섬에서 여러 교회를 개척한 후에 그는 마닐라에 유니온 대학을 설립하고 그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 후 14년 간 그는 교수로서, 저술가로서, 행정가로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마닐라에 있는 한 대학의 총장 자리가 생겼고 라우박은 그 직책을 절박하게 원했습니다. 그는 총장을 지명하는 일을 위임받은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석했습니다. 그가 총장직 후보로 오른 다른 후보에게 자기 표를 던짐으로써, 그 다른 후보가 한 표 차이로 총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자기 삶이나 자기 사역에 대한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그는 자기를 원하지도 않고 자신의 노력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필리핀 기독교인들을 자기들의 적으로 간주하는 민다나오 섬에 있는 회교도인 ‘모로’족(‘마라나오’족) 중에 정착하려 했던 자기의 꿈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닐라로부터 900마일이나 떨어진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자기 아내와 아들도 함께 갈 수 없었고, 결국엔 거기서의 사역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자기 집 뒤에 있는 언덕(‘시그널 힐’)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울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령 속에 자기가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죄악 된 감정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을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경험은 그의 생애에 있어 두 가지 측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동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가능하다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서 그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그와 그의 아내는 세 자녀를 말라리아로 잃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녀와 남은 한 아들과도,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따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는 절망의 심연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선교사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생기가 없었으며 그의 전 생애가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죽어 있었지만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다메섹 도상’ 경험이었던 ‘시그널 힐’에서의 영적 체험 이후, 그는 곧 바로 하나님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엄청난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 하늘나라 가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기 어려울 만큼 충만하신 하나님을 바로 여기서, 바로 지금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 경험에 대해 쓴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를 바꾸도록 설득하거나 종교적인 토론에서 승리하는 것이 자기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생각에 떨고 당신의 열정으로 불타면서 당신 안에서 살고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임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지난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이제 나는 깨닫는다) 나는 결코 산 것이 아니었고 반쯤 죽어 있었다. 내가 전적으로, 전적인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내 속에 있는 모든 세포 조직이 ‘아니다’라고 말하더라도 그 뜻을 실행하겠다는 것을 결심하고 재 결심하는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나는 그저 썩어 가는 한 그루 나무에 불과했다. 그것은 마치 내 영혼 속에 있는 어떤 자분정(自噴井)이 발견되어 그곳에서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단 하루에 대해서도 (완전한) 성공(즉 성령으로 살아간 것)을 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까지 매일 기쁨 충만한 발견을 하는 기쁨으로 들뜬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 시기부터 매 몇 분마다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동안, “ ‘아버지, 내가 무엇을 말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버지,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쉬지 않고 질문하면서 내적인 음성에 의식적으로 귀기울여 듣기”를 시도했습니다. 그의 의견으로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움직일 때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느끼며, 지금 타자를 치고 있는 내 손가락까지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소원하고, 내가 걸어갈 때 내 걸음걸음도 하나님께서 주도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데에는 엄청난 결단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갈수록 그 과정이 더 수월해진다는 점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간이 흐른 후에는 이런 과정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 노력을 의식적으로 덜 기울여도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라우박이 집필한 편지에는, 항상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 가능한가, 항상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을 마음 전면에 모시는 ‘매카니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 그러나 나는 내 관점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 사실을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단 1초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집중한다는 것은 수많은 방향에서 한 가지 문제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적어도 두 가지 일들, 종종 세 가지나 더 많은 일들의 관계를 동시에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매 순간마다 의식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을 떠올림으로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의 마음속에 잔상으로 남아 계시고, 모든 관념이나 교훈 속에 하나의 요소로 늘 자리 잡으실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나의 남은 생애가 과연 이런 생활을 해낼 수 있을지 한 번 시험해 보려고 합니다.”

 

이 실험은 나중에 더 체계적이고도 실제적으로 구성되어 급기야 매분마다 적어도 일초씩 하나님을 기억하는 단계까지 진전된 바 있습니다. 자신의 실험을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아 그는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 1월 말이 되자 자기의 방식에 대해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었지만, 그는 여러 시간 동안 하나님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는 의식, 작은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협력하고 있다는 의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느낌은 이전에 결코 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신을 초월한 계획 중에서 내 역할을 담당하며 매 시간 단순히 이끌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적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과 협력하고 있다는 이러한 느낌은 나를 그토록 놀라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이런 식으로 느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가 필요로 해서 돌아서 보면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일해야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 내내 나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매분마다 의식하는 부단의 노력을 두 달 동안 기울인 결과를 묵상하면서, 그는 외쳤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다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힘들게 되지 않았다.” 이 말은 특히 ‘모로’족들과 그의 관계에 꼭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식하고 그를 전적으로 자신들의 마음과 삶에 수용해 주었습니다. 자기들과 그의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이고도 종교적인 차이와는 무관하게 그를 사랑하고 신뢰해 주고 도와주었습니다. 회교 성직자들 중 두 사람이 그 지역을 다니면서 그 현지인들에게 라우박이 그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가 결코 예수님을 좇는 자 외의 어떤 사람인 양 행동한 적이 없었지만, 그 회교 성직자들과 회교도들과 함께 성경과 꾸란을 공부하고 그들과 함께 예배 중에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한 회교 성직자가 “그는 회교도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회교도의 친구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복종을 강조하는 회교의 입장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지속적인 접촉 가운데 자신이 거하도록 하는 자신의 방식을 개발하도록 독려해 온 셈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앙 행위가 회교의 신앙 고백보다 더 수준 낮은 처지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내적인 변혁은 본질적으로 중대한 것이었고, 그것의 결과는 진정한 외적 효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를 이루신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이킨 순간 그것은 마치 내가 온 전신에 느낀 전류에 연결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참된 임재”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또한 중보 기도를 하나님과 협력하는 본질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그의 삶의 영향력은 민다나오 섬에 있는 4만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 사역을 통해서도 큰 결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외롭게 사역하는 그를 들어서 그리스도를 위한 대변인이요 세계를 누비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는 ‘라우박 리터러씨’(Laubach Literacy)를 창설하여 전 세계적으로 문맹 퇴치 사역을 주도해 갔을 뿐 아니라, 아무런 정치적인 타이틀은 없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대외 정책 결정에 있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습니다. 특히 리치 박사(Dr. Richie)와 함께 ‘평화봉사단’(The U.S. Peace Corps)을 창설하는 데 산파역을 맡기도 했습니다(평화봉사단의 역사를 보면 J. F. 케네디 의원이 1960년에 미시간 대학 학생들에게 개발도상국가에서 거주하고 일함으로써 평화를 지향하는 조국을 섬길 것을 도전함으로써 창설된 기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배후에서 그런 아이디어를 제공한 리치 박사와 라우박의 역할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음.). 그렇지만 그는 영원히 그리고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탁월한 아이디어와 믿기 어려운 에너지와 효과적인 면모는 죄다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의식적으로 접촉하는 실행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는 항상 깨닫고 있었습니다. “인생은 80부터 시작한다.”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한 그는 85세까지 활력 있게 주님을 섬기는 은혜를 누리다 주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내가 지금 전력을 다해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은 내가 깨어 있는 그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사랑에 몰입하여’ 주님의 뜻에 굴복하고, 순응하여 복종하고, 민감하여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두 가지 불타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고, 둘째는 마치 바이올린이 연주자의 손놀림에 따라 아름다운 선율을 내듯이, 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창문을 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얼마 후 그 영광이 당신의 주변 세계에 반영될 것이며, 당신의 머리 위에 있는 바로 그 구름 속에서 영광의 광채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제 여생에 있어 계속 기억될 그의 편지 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