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3)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3. 22.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3)

-오독은 문맥 읽기 실패의 결과-

 

<도덕적인 문제(The Moral Problem)>

이 항목에서 러셀은 그리스도에게 한 가지 가장 심각한 결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지옥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자비심이 심오한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everlasting punishment)을 믿을 수 없겠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한 형벌을 진정으로 믿었고 자기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거듭 보복적인 분노(a vindictive fury)를 가했다면서 이것은 최고의 탁월성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태도는 소크라테스와 비교된다면서,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훨씬 현인답게 온화하고 우아한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지요. 그리스도의 이런 면모를 드러내는 것으로 아래의 첫 두 구절을, 그의 심판 장면이 담긴 것으로 그다음 세 구절을 더 인용합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33)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32)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태복음 13:41-42)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41)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태복음 5:30)

 

이런 구절을 언급하면서, 러셀은 지옥불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교리는 잔인한 교리(a doctrine of cruelty)로서 이 세상 속에 잔인함을 초래했고 이 세상에 잔인한 고통을 겪는 세대를 안겨주었다면서, 그의 복음서 저자들이 그를 표현한 대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가 이런 상황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그 후에 덜 중요한 내용이라면서 두 가지 상황을 더 언급합니다. 2천 마리 돼지 몰살 사건(마태복음 8:28-34)과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 나무가 저주받은 사건(마가복음 11:12-21)입니다. 마귀들을 돼지 속으로 보내기로 선택한 것은 그 돼지들에게 불친절한 처사였고, 제철이 되지 않았다고 무화과를 저주한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논평합니다. 그러면서 러셀은 지혜나 미덕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역사상 다른 인물들만큼 높은 위치를 점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서, 자기는 붓다와 소크라테스를 예수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이미 살펴본 대로,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 영생을 누릴 사람들과 지옥에 처하게 될 사람들이 나뉩니다. 이 항목에서는 우선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부터 다루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정죄받은 죄인이 지옥에서 처하게 될 운명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는 형벌의 성격과 지속 기간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지옥에 관한 성경의 이미지를 문자 그대로, 혹은 비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저주받은 자들이 지옥에서 끝없이 고통을 받는가, 혹은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역사적으로 세 가지 입장이 두드러졌습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첫째, 문자적 해석(a literal interpretation)을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의식적으로 영원한 고통을 겪는 물질적 불의 장소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그들의 육체는 영원히 불타고, 깊은 어둠 속에서 영원히 벌레에게 먹히며, 고통, 공포 및 슬픔 속에서 통곡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어떤 성경 인물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셨다고 지적하면서[마태복음 5:22, 10:28, 13:42, 50, 18:9, 22:13, 25:41, 마가복음 9:47-48, 데살로니가후서 1:9, 유다서 1:7, 15 참조],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함과 공의에 비추어 정당한 심판으로 저주받은 자에게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가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은 기독교 전통에서 다수의 견해로,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과 같은 교부들과 18세기 개신교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명시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전통적 해석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성경의 해석 문제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중재자(the final arbiter)가 될 수는 없지요.

 

둘째, 은유적인 견해(a metaphorical view)를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지옥이 실재하는 장소라고 주장하지만, 지옥의 상징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도된 것이며 성경적 주장의 진정한 의미를 정당하게 파악한 것이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그 상징들은 형벌의 정확한 성격보다는 임박한 심판의 심각성과 그에 수반되는 지옥의 공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지요. 이 지지자들은 특히 ‘불붙는 못’의 이미지(요한계시록 19:20, 20:10–15, 21:8)와 완전한 어둠의 이미지(마태복음 8:12, 22:13, 25:30) 사이의 불일치에 주목합니다.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중요한 점은, 그 이미지들이 지옥이란 곳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영원히 버려진 채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고통을 당하는 현실로 그림으로써 사람들을 진지하고 사려 깊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16세기 개혁자 장 칼뱅, F. F. 브루스 및 빌리 그레이엄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셋째, ‘영혼절멸론’(annihilationism) 혹은 ‘조건부 불멸론’(conditional immortality)을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옥 교리가 악인들의 끝없는, 의식적인 고통을 포함한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지옥에 대한 상징들이 영원한 고통보다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파멸(dissolution) 혹은 소멸(extinction)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지요. 지옥은 요한계시록 2:11, 20:6, 14에 언급된 ‘둘째 사망’으로서, 불특정 기간의 보복적 고통이 끝나면 악인은 멸망하고 단순히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둘째 사망’(요한계시록 20:14; 21:8)과 ‘멸망’(데살로니가후서 1:8–9, 베드로후서 2:1–3, 3:6–7)과 같은 용어들이 끊임없는 의식적인 고통보다는 하나님의 분노 때문에 악인들이 미래에 소멸할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영원한 의식적인 고통이 부당하다는 반대 의견에 응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클레멘스, 오리겐, C. S. 루이스, 필립 E. 휴스 및 존 스토트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참고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연옥설’(doctrine of purgatory) 또한 영원한 고통이 많은 죄인들에게 불균형한 형벌이라는 생각에 부분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견해, 그 어느 것이라도 성경을 높이 존중하는 이들의 지지를 받는 게 당연합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각각의 해석을 지지하는 신뢰할 만한 신학자들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그 견해들 모두가 지옥이란 현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로 인해 존재하게 될 가능성으로 냉철하게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문제와 더불어 성경의 종말론 문제를 다룰 때는 독단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잠정적이고 겸손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역사가 진행 중인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고린도전서 13:12)한 상황일 뿐, 그 역사와 관련된 모든 신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계시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현재로선 지옥의 신비한 공포를 가르치는 비유만 부여되어 있어 그 구체적인 실상은 희미하고 불완전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그와 함께 교제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되는 지옥이란 현실은 진실한 실체라는 점입니다. (E. 무어, “New Dictionary of Christian Apologetics”)

 

이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거듭된 선언입니다. 러셀이 주로 참고하고 있는 마태복음만 보더라도, 앞에서 언급된 구절에서 지옥이란 현실을 거듭 언급하신 것 외에도, 예수님은 그 심판에 따르는 고통을 강조하기 위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무려 여섯 번이나 사용했습니다(8:12, 13:42, 50, 22:13, 24:51, 25:30). 예수님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이라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실상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지옥에 거하게 될까요?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략적인 단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형제에게 노하고 모욕하는 자(마태복음 5:22), 불법을 행하는 자(마태복음 13:41), 악인(마태복음 13:49), 위선자(마태복음 24:51),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마태복음 25:26, 30),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데살로니가후서 1:9), 음란한 자(유 1:7), 경건하지 않은 자(베드로후서 3:7, 유 1:15), 거짓 선지자(베드로후서 1:1-3), 마귀와 그 졸개들(마태복음 25:41, 요한계시록 20:10),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요한계시록 20:15)=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않은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요한계시록 21:8).

 

즉 지옥은 마귀와 그 졸개들 및 거짓 선지자들은 물론이지만,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이웃에게 온갖 악행과 불법을 가하는 자들이 직면하게 될 현실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제정해 두신 도덕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선택을 자행한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보다는 하나님 대신 자기가 선택한 대상을 섬기면서 오직 자기 유익만을 절대시하는 선택을 한 자들이지요. 과연 이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천국이 합당할까요? 아니, 과연 이들이 그런 상태를 원하기나 할까요? 자기 생명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던 선택을 했던 이들이 말입니다. 그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에라도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택을 하기만 하면 사후에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성경은 밝히 천명하고 있지요(누가복음 23:40-43). 그러므로 팀 켈러의 지적대로 지옥은 “자유롭게 선택된 우주의 영원한 슬럼가”(“the freely chosen eternal slum of the universe”)입니다. 지옥은 결코 예수님이 천국을 선택한 사람들을 강제해서 보내는 곳이 아닙니다.

 

러셀의 말대로 예수님은 지옥을 믿었습니다. 문자적으로 ‘영원한’ 형벌이 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자비심이 심오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틀렸습니다. 인격적인 어느 대상이 끝까지 기어코 자기 의지를 따라 선택하겠다는 것을 존중하는 게 자비심 없는 처사인가요? 더구나 예수님이 자기 가르침에 귀를 닫고 있는 이들에게 보복적으로 거듭 분노를 가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명예훼손이지요. 자기에게 악행을 가하는 이들에게 ‘보복 절대 금지’를 가르친 예수님은 평생 그렇게 사시다가, 급기야 십자가에서 그 지극한 악행을 당하고도 보복은커녕 그 악한들의 용서를 하나님께 빌기까지 했지요(누가복음 23:34). 러셀에게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33)라는 예수님의 언명이 그 내용과 어조 측면에서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역시 문맥에 대한 무지가 문제지요. 여기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러셀의 주장대로 그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불과할까요?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서 당시 온갖 사회적인 특혜와 존경을 누리면서도, 온갖 외식을 떨며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마태복음 23:13). 그 문맥(23:13-36)을 보면 예수님은 7가지 ‘화’(woe)의 형태로 그들을 비판합니다. 점증하는 이 ‘화’는 일곱 번째(29-31)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그들의 위선적인 반역이 절정에 달합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들끓던 심판이 마침내 그들 위에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선언하는 매서운 구절들(32-36)로 이어지지요. 러셀이 인용한 구절이 바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들을 향한 이 ‘화’는 예루살렘에 미칠 재앙(37-39)에 대한 예언의 배경을 이루기까지 합니다. 러셀은 이렇게 자기들뿐 아니라 자기 민족 전체를 파멸에 빠뜨린 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장 좋은 어조’(the best tone)로 뭐라고 말하기를 바랄까요?

 

-성령을 거역하는 죄의 의미-

성령을 거역하는 죄로 러셀이 언급한,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32)라는 구절의 당사자도 바로 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문맥(13:22-37)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22절)을 고쳐 주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며 놀라는 반응을 보입니다(23절).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4절)라고 강변하지요.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기적을 귀신의 왕의 힘이 일구어 낸 역사라고 모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반응이 얼마나 무지하고 악독한 거짓인지를 논박합니다(25-29). 첫째, 사단은 자기 세력을 공격하지 않는다(25-26). 둘째,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중에 바리새인들도 있는데, 그들도 사탄과 짝을 맺고 있는가?(27) 셋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영적인 악을 공격하는 것은 ‘강한 자’인 사탄이 패배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표시다(28-29).

 

러셀이 문제 삼은 12:32절은 이러한 문맥을 근거로 읽어야 합니다. 31절의 “성령을 모독하는 것”(blasphemy against the Spirit)과 동일한 차원인 “성령을 거역하는 것”(speaking against the Holy Spirit)은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에게 돌림으로써 성령을 모독하고 대적한 죄악입니다. 일시적인 과오로 인해 저지른 죄악이 아니라 하나님 혹은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고 대적하겠다는 확고하고 끈질긴 의지의 발현이지요. 이런 죄악을 지속적으로 범하는 자들은 자기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양심의 목소리와 성령의 자극과 암시를 지속적이고도 의도적으로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직면해야 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용서가 올 수 있는 바로 그 통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길이 없는 것이지요.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 바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는 것’(요한복음 16:8)인데, 그것을 사단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어떻게 회개해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N. T. 라이트가 비유한 대로, 남은 유일한 물병에 독이 들어 있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를 갈증으로 죽어가도록 정죄하는 것입니다. (“Once you declare that the only remaining bottle of water is poisoned, you condemn yourself to dying of thirst.”)

 

러셀이 지적한 대로 이 구절을 오독한 나머지 자기가 성령을 대적하는 죄를 지었기에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며 지나치게 고뇌한 사람들이 많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들은 이런 죄를 범한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고의로 사단의 사역으로 돌리고 성령이 일구어낸 기적을 끈질기게 마귀의 짓으로 대체하는 일은, 그토록 자신의 삶을 민감하게 돌아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할 죄악이 아니지요. 그들이 처한 고뇌는 말씀의 의미를 문맥을 좇아 잘 살피지 못한 불찰의 결과이거나, 그들에게 성경을 잘못 가르친 목회자들의 과오 탓입니다. 그런데 러셀은 이 구절 때문에 이런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런 두려움과 공포를 예수님이 심었다’면서 ‘자기 본성에 적절한 친절함을 품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변하지요. 자기가 예수님의 말씀을 오독한 것도 모자라,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을 구원한 후 그것을 사단의 짓이라고 강변하는 이들의 사악한 죄악을 밝히고 그들을 경고하는 예수님을 친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정한 인물로 매도하다니요! 성경에 대한 무지가 낳은 후안무치한 행태지요.

 

-돼지 2천 마리 몰살 사건의 의미-

러셀이 예수님의 불친절한 처사라며 지적한 게 두 가지 더 있습니다. 돼지 2천 마리가 한꺼번에 몰살당한 사건(마태복음 8:28-34)과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저주받은 사건(마가복음 11:12-21)입니다. 그러면서 러셀은 지혜나 미덕의 차원에서 예수님이 역사상 다른 인물들보다 못하다면서, 이런 측면에서 붓다와 소크라테스가 예수님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지요. 무화과나무 사건은 이 블로그 다른 곳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기 때문에(https://hubil-centre.tistory.com/172), 여기서는 돼지 몰살 사건만 살펴보겠습니다.

 

러셀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귀신들을 돼지들 속에 넣어 두고 그것들이 언덕을 치달아 바다로 몰려가도록 한 것은 분명 돼지들에게 아주 친절한 일은 아니었다. 그(예수님)는 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귀신들을 간단히 사라지도록 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귀신들을 돼지들 속으로 보내기를 선택한(chooses) 것이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귀신들을 돼지들 속으로 보낸 것은 예수님의 능동적인 선택(active choice)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귀신들이 호소한 것을 허용해 주었을(permit) 뿐이지요. 그 귀신들도 이미 알고 고백했듯이, 그 당시가 그들을 온전히 처단할 심판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29절). 예수님이 그 당시 귀신들을 즉각적으로 처단하지 않은 것을 러셀이 문제 삼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 계획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지요. 다음으로 분명히 지적해야 할 점은 돼지들이 바다에 몰살된 것은 귀신들의 책동이었지, 예수님께서 취하신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용한 것과 돼지들이 몰살된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이지요.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돼지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졸지에 몰살되기를 원했을까요? 그 많은 귀신들이 마침내 그 귀신 들린 자에게 취할 행동을 돼지에게 퍼부었을 뿐이지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steal and kill and destroy”, 요한복음 10:10)은 그들의 전매특허입니다. 예수님이 귀신들의 정신 나간 망동에 대해 책임질 이유가 없습니다.

 

러셀처럼 동물을 낭만적으로나 동물권(animal rights)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이 본문에서 돼지라는 동물에게 가해진 폭력에 관심을 두는 현대인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더구나 경제적인 측면에 민감한 이들은 돼지 2천 마리가 가진 경제적인 가치에 주목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약 시대 사람들도 그런 시각과 관심사를 품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동물을 기본적으로 음식용이나 제사용으로 길렀다는 점에 유념하면서, 이 사건의 문맥을 살펴봅시다. 이 사건이 발생한 ‘가다라’라는 곳은 데가볼리(Decapolis, 10개의 도시라는 의미)라는 도시들 중 한 곳이었습니다(마가복음 5:1, 20 참조), 그곳은 유대인에게 이방인 지역이었으므로 부정한 땅이었지요. 귀신 들린 자들은 “더러운 귀신”(10:1, unclean spirits)에 의해 통제당하던 피해자였고, 시체들의 처소인 부정한 장소(레위기 29:11 참조)에 살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8:28). 이런 요인에 덧붙여 돼지는 부정한 동물(레위기 11:7, 신명기 14:8)로서 유대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위해 키우는 것조차도 시도하지 않던 차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낀 더러운 귀신들이 부정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기를 예수님에게 청하자 예수님은 허락해 주었습니다. 귀신들은 그 돼지들을 바다 쪽으로 몰아가 물속에 함께 빠져 몰살되었지요. 그 결과 귀신들린 자들은 온전하게 구원받아 제정신이 들게 되었고, 그 부정한 땅은 그 더러운 귀신들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마가복음 5:15 참조).

 

귀신들의 파괴적인 힘과 그들이 인간들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효과와 더불어 이런 것들을 죄다 무력화하는 예수님의 신성한 능력을 열어 밝히는 것이 본문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그 땅 주민들은 이런 기적적인 구원의 역사를 전해 듣고도, 예수님이 떠나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렇게 간청한 이유를 성경 본문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손해 때문일 수는 있어도, 러셀이 이 사건의 문제로 시사한 동물권에 대한 관심 때문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결국 러셀이 이 사건을 두고 돼지에게 불친절한 예수님 운운하며 그의 지혜와 덕성을 폄훼한 것은, 마치 결혼식 피로연에 돼지고기 요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신랑이 돼지에게 불친절하다며 어리석고 덕스럽지 못하다고 따지는 것이나, 책을 만들면서 종이를 너무 많이 썼다고 그 저자가 나무에게 불친절하다며 둔하고 모질다고 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 연합하는 그 찬란한 결혼의 가치나 책 속에 담겨 있는 원숙한 지혜의 정수와 통쾌하고 신선한 안목의 유익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신성한 권위: ‘트릴레마’(Trilemma)-

이 사건에서 러셀이 놓친 중요한 표현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귀신 들린 두 사람이 예수님을 칭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러셀이 사용하기 좋아하는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분”이라고 하지 않았지요.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귀신들에게서 나온 표현이라 곧바로 수용하기는 힘들지만, 이 표현은 나중에 제자들이 사용했고(14:33), 베드로의 신앙 고백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며(16:16), 심지어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의 입술에서 터져나오기도 했습니다(27:54). 결국 귀신들이 악하고 파괴적인 존재들이지만, 영적 실재에 대한 내부 정보(inside information)를 갖고 있던 것으로 봐야겠지요. 예수님은 온 세상이 두려워하는 악한 영적 세력들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는 권세자입니다. 귀신들이 돼지 속으로 들어가 물속에 빠져 죽은 것은 예수님이 장차 부활을 이루고 승천한 이후에 심판을 집행하시는 주님으로서 그들에게 내릴 처단에 대한 상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장차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0:15, 마태복음 25:41). 이 시점에서 러셀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에게 권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모쪼록 그가 원했던 대로 붓다와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기 바랍니다. 그가 처음에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제시하면서 예수님에게 부여했다가, ‘도덕적인 문제’라는 이 항목을 논의하면서 결국 앗아간 그 표현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그 표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러셀이 줄곧 오독한 성경은 예수님을 그런 인물로 규정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습니다. 러셀이 이 글 속에서 인용한 성구 대부분의 원전인 마태복음에서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주님’이었습니다(8:6, 21, 9:28, 15:25, 17:15, 20:30, 26:22, 14:28, 17:4). 러셀이 조금만 문맥에 눈을 돌렸더라면, 이 사건 전에는 예수님이 큰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기적을 베풀었고(8:23-27), 그 이후에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쳤을 뿐 아니라 그의 죄까지도 용서하는 사역을 펼친 것에 주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9:1-8). 먼저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은 기적의 절정은,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it became perfectly calm.”-26절)는 점입니다. 바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칠게 몰아치던 폭풍우가 아무리 갑자기 잦아들고 잠잠해진다고 하더라도, 그후 몇 시간 동안은 파도가 계속 몰아치는 게 일반적이라고 알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명령 이후에 즉각적으로, ‘dead calm’, 즉 문자 그대로 쥐 죽은 듯한 고요함, 숨 막히는 고요함이 뒤를 따랐습니다. 이런 일은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만이 펼칠 수 있는 기적입니다.

 

팀 켈러가 지적한 대로, 고대 문화에서 바다라는 존재는 멈출 수 없는 파괴(unstoppable destruction)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11세기 덴마크 왕 카누테(King Canute)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신하들이 자기에게 계속 지나치게 아첨해대자, 그는 “내가 하나님이란 말인가?”라고 묻더니 해안으로 걸어가서 “그만 멈춰라”(Stop)라고 말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파도는 당연히 계속 밀려왔지요. 그때 그가 한마디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바다를 멈출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은 바다를 잠잠하게 할 때 더 높은 권위를 부르거나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요. 단순히 폭풍우에게 한마디만 읊조렸습니다. “쉿, 잠잠하거라.”(“Hush, be still.”-마가복음 4:39 참조)

 

다음으로 이 사건 이후에 진행된 중풍병자 치유 기적(마태복음 9:1-8)을 한번 살펴봅시다. 사람들이 침상에 누인 채로 날라온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은 그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합니다(2절). 그러자 그곳에 동석해 있던 율법학자들이 그 선언을 한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속으로 말하지요(3절).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영역이니까요. 그 생각을 알아차린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의 생각이 악하다고 하면서(4절), 자기가 인자로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겠다면서 그 병자에게 일어나 침상을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합니다(6절).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무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awestruck),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요. 그 중풍병자가 지은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기가 다니엘 7:13-14(이전에 논의한 구절들)에서 예언된 ‘인자’요, 메시아요,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심판할 권세자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메시야의 권세로 그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고’, 즉 문자적으로 그 죄를 영원히 잊혀지는 저 너머로 ‘보내 버리고’(send away), 그런 사죄의 현실을 치유 사건을 통해 확증한 것이지요.

 

마태가 연이어 기록한 이 ‘세 가지 사건’(trio)은 예수님의 신성을 열어 밝힙니다. 예수님은 제지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바다를 포함한 자연 세계를 통치하고(8:23-27),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귀신들을 비롯한 영계를 장악하며(8:28-34), 사람들의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신성한 존재였습니다(9:1-8). 이 ‘트리오’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트릴레마’(trilemma), 즉 ‘3자 택일의 궁지’를 제시합니다. 거짓말쟁이(Liar), 미치광이(Lunatic), 주님(Lord),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러셀이 언급한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항목은 차지할 자리가 없습니다. 러셀이 오독한 복음서, 특히 그가 자기 글의 논의 속에서 거의 대부분 의존한 마태복음은 이런 선택의 가능성을 거부하지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랍비’(나의 스승’이란 의미)로 칭하는 경우가 없다는 점을 러셀이 알아차렸을까요? 유일한 예외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입니다. 오직 그만 예수님을 ‘랍비’로 불렀지요(26:25, 49). 그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로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인식을 고백한 셈입니다. 그는 결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말씀을 듣기도 하고 기적들을 경험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이 ‘트릴레마’ 중에 거짓말쟁이나 미치광이로 결론지었겠지요. 예수님을 ‘은 30’(thirty pieces of silver)에 팔아 넘겼으니까요(마태복음 26:15). 그 금액은 4개월치 품삯이자, 죽은 노예 한 사람의 손실에 대한 보상액이었습니다(출애굽기 21:32). 마태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예수님이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이라고 외칩니다.

 

-만세(萬世)와 만대(萬代)의 신비: 예수 그리스도-

아직 러셀의 글 중에 4개 항목이나 더 남아 있지만, 그가 복음서를 인용하며 예수님과 그리스도교를 논의하는 것은 이번 항목으로 끝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글을 독해하면서, 생긴 궁금한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가 이 복음서 전체, 아니 마태복음만이라도 과연 몇 번이나 충실하게 트인 마음으로 읽었을까요? 이 질문이 자꾸 떠오른 이유는 그가 자기 논지를 밝히기 위해 성구를 여럿 인용했지만, 그것들이 속한 문맥에 대한 지식이나 그것을 이해하려는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일반 학술 저널에는 이미 출간된 책에 대해 서평 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여기에 자기 글을 게재하는 논평자는 예외 없이 먼저 그 책의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한 후에 그 책이 특정 주제에 대해 어떤 시각을 취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데 주력합니다. 그 후에 그 시각에 대한 자기 안목을 개진하지요. 만일 첫째 작업이 부진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서평이 그 저널에 게재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러셀이 쓴 글의 논평자였다면, 복음서를 인용하면서도 그 기본적인 문맥을 간과하거나 무시한 이 글에 대해 게재 불가 판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가 개진한 의견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서평의 기본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었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러셀을 보면서 떠오른 성구가 한 개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the mysteries of the kingdom of heaven)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태복음 13:11)

 

예수님이 바닷가에 모인 무리에게 ‘씨 뿌리는 자’ 비유를 소개한 후에, 제자들이 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묻자 예수님이 선언한 내용입니다. 이 구절 중 ‘비밀’이란 단어는 헬라어 ‘뮈스테리온’으로서 ‘신비’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문자적인 번역인 NASB에서 이 단어를 ‘mysteries’로 처리해 둔 이유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천국의 신비’를 아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신비’를 깨닫지는 못했습니다(카일 키퍼). 예수님으로부터 거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을 받았지만, 그들은 우둔하게도 그 의미를 놓치곤 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연속된 세 장에 걸쳐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과 그 후에 부활할 것을 언급했습니다(8:31, 9:31, 10:33). 이것을 “삼중 수난 예고”(triple passion prediction)라고 하지요. 그때마다 그들은 “예수님을 꾸짖거나”(rebuke Him, 8:32), “누가 가장 크냐고 쟁론하거나”(discussed with one another which of them was the greatest, 9;34), 예수님이 장차 영광을 누릴 때 자기들을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할 뿐이었습니다(10:37). 예수님의 거듭된 말씀에도 귀를 닫은 채, 자기들의 선입견과 욕심에만 사로잡혀 있던 것이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성인 5천 명(여자와 아이들 제외)을 먹이고, 8장에서는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풉니다. 첫 번째 상황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6:37)라고 제안했을 때,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6:37)라고 응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고 봅니다. 전대미문의 기적이 펼쳐졌으니까요.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8:2)라고 말씀하시면, “주님, 지난번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기적의 마중물이 될 만한 빵과 물고기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라고 응대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8:4)라는 타령만 해댑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이후에 바리새인들과 표적에 대한 논쟁을 한 예수님이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8;15, 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의미(마태복음 16:12 참조)]라고 권면하자, “제자들이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라며 수군거리지요.”(8:16) 이때 참다 못한 예수님이 한마디 합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없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Do you have a hardened heart?) (...)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17, 21, 새번역)

 

그 제자들이 왜 이다지도 마음이 무디어 있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무딘 마음을 품고서는 예수님과 3년씩이나 함께 한솥밥 먹고 살았어도 그가 누구신지, 그의 소명이 무엇인지, 자기들을 향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 무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셀의 글 속에서도 이러한 제자들의 것과 동일한 ‘무딘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허락된 '천국의 신비'가 복음서의 형태를 띠고 죄다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나,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 그리스도인에 대한 편견, 그리스도교에 대한 상투적 시각들로 물든 자기만의 안경으로 복음서를 독해한 것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부를 수 있던 영국에서 무려 1세기(1872-1970) 동안이나 살았으면서도,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골로새서 1:26-27)이었으나 복음서가 열어 밝힌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비’를 조금도 깨닫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그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