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2)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3. 15.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2)

-오독은 문맥 읽기 실패의 결과-

 

<‘그리스도의 성품’(The Character of Christ)>

러셀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야기한다면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태복음 5:39)라는 성구를 인용합니다. 그러더니 이것은 새로운 원리가 아니라 노자나 붓다가 이미 말한 내용이라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상 수용하지 않는 원리라고 주장하지요. 그 후에 아래와 같은 마태복음 세 구절을 더 언급하면서, 이것들은 탁월한 원리요 가르침이지만 자기도 따르지 못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 7:1)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 5:42)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

----->먼저 마태복음 5:39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구절이 38-42절의 문맥, 혹은 38-48절의 문맥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은 38절에서 먼저 구약에서 실행된 응보의 원리(the principle of retribution)를 언급합니다. ‘렉스 탈리오니스’(the lex talionis)로 알려진 이 원리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로 요약되는데, 정의를 규정하고 복수를 억제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1:22-25, 레위기 24:19-20, 신명기 19:21). 악인에게 그 저지른 행위에 걸맞은 형벌을 가할 뿐 아니라, 희생자에게도 그 당한 희생만큼의 보상을 받되 그 이상의 복수를 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법적 원리였던 것이지요. 이 원리에서 더욱 중요한 차원은 이런 법의 집행이 제사장이나 재판장 앞에서만 가능했다는 점입니다(신명기 19:17-18). 피해자가 자기 판단대로 이 법을 집행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합당하고 공정한 원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39-42절을 통해 일상생활 중에 경험하는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적용 가능한 원리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do not resist an evil person.)는 ‘보복 금지’(non-retaliation)의 원리입니다. 악의 화신인 사단은 마땅히 대적해야 하지만(에베소서 6:13, 베드로전서 5:9, 야고보서 4:7),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악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 맞서서 보복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4가지 구체적인 악행 사례와 그 대응 방식을 소개합니다.

 

(1) ‘우리 뺨을 치는 것’--->폭행이라기보다는 모욕을 가한 자(욥기 16:10, 예레미아애가 3:30)에게 더 모욕하도록 허용하기.

(2) ‘우리를 법정에 고소하는 것’--->소소한 이득을 바라고 법의 힘을 빌리는 자에게 그가 감히 요구하지 못한 겉옷까지 내어주기.

(3) ‘우리를 강제적인 일에 복무하도록 하는 것’--->자기 짐을 5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는 일을 강제하는 로마 군인에게 10리까지 옮겨 주겠다고 자원하기.

(4) ‘우리에게 돈을 빌리는 것’--->거절하지 말고 주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반응 방식에는 과장법(hyperbole)이 활용된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모욕을 받고 나서 더 진전된 모욕을 자청하는 것이나, 겉옷을 빼앗는 것이 구약 시대에 인도적인 견지에서 금한 항목(출애굽기 22:25-27)인데도 그런 비인도적인 피해를 자청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이 가르침을 준 예수님도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8:22-23에 보면 대제사장에게 심문받던 예수님을 한 경비병이 때리자 더 쳐보라고 머리나 몸을 더 내밀지 않고 바로 그 부당함에 항의하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doormat’, 즉 '학대받아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강제하면서 우리 시간과 노력을 좀먹는 악인에게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자원해서 내주는 것이나, 우리에게 무언가 의수히 빌리려는 악인에게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내어주라는 말은 삶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이것들은 분명 같은 장에서 이미 언급된 ‘오른 눈 빼어 내기’나 ‘오른손 찍어 내기’(5:29-30절)와 같은 차원의 권면일 것입니다. 그 권면의 의도가 조만간 우리 모두가 불구자 되기를 전망하는 것이 아니듯이, 위의 4가지 사례들도 융통성 없이 사무적이고도 문자적으로(with wooden, unimaginative literalism) 수용하라는 뜻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시도할 법한 법적 엄정함으로 말하기보다는 지혜로운 교사가 사용할 법한 과장법을 공생애 내내 수도 없이 구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과장법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느냐, 실행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독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그 표현들 속에 내포된 예수님의 의도를 읽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그 4가지 표현들 모두 ‘개인적인 보복 절대 불가’를 극적으로 천명합니다. 즉 우리의 오른 눈이나 오른손을 손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른 눈과 오른손으로 절대 범죄 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듯이, 왼 뺨을 돌려대고 겉옷까지 내어주고 10리까지 가 주며 무조건 퍼 주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에게 절대 보복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인 것입니다.

 

38-42절의 ‘보복 불가’가 예수님의 소극적인 제안이었다면, 이어지는 5:43-48절에서 예수님은 적극적인 권면을 펼칩니다. 한 마디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love your enemies, 44절)입니다.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권면이 노자와 붓다가 지적한 가르침이라며 평가절하하던 러셀에게 묻고 싶습니다. 자기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어디에선가 접한 적이 있느냐고. 이것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르침입니다. 이 엄청난 선언이 눈앞에 계시되어 있었지만, 러셀은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아마도 말도 안 되는 교훈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서 이 ‘중대 선언’을 주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거나, 잠깐 주목했어도 그건 과장법이라고 치부해 버렸겠지요. 심지어 그리스도인 중에도 이런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앞에서 등장한 4사례들은 말도 안 되는 사례라고 단정하면서 그것들 속에 담긴 교훈[보복 절대 불가]을 간과하는 한편, 이 ‘중대 선언’은 과장법이라고 치부하여 그 의미[적극적인 사랑]를 축소하는 실수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라는 말씀에 담겨 있다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네 이웃’ 중에는 반드시 ‘원수’라는 대상도 포함됨을 잊어선 안 됩니다. 5:43-44절 말씀이 이 진실을 열어 밝힙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결국 러셀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셈입니다. 존 스토트가 지적한 대로 5:38-42절에서 “수동적인 보복 절대 불가”(Passive non-retaliation)를 권면한 데 이어 43-48절에서 “적극적인 사랑”(Active love)을 천명하고 있는 예수님 교훈의 숲은 간과한 채, 39절과 42절 두 사례를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불이행하는 원리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유머러스한 상황을 창작해 내기도 합니다. 즉 자기는 39절에 근거해서 당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영국 수상(아마도 스탠리 볼드윈이었을 것)에게 가서 그의 한쪽 뺨을 치라는 조언은 하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를 그가 그 말씀을 비유적인 의미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앞으로 갈수록 더 드러나겠지만, 러셀은 이 글 속에서 특정 성구를 언급하면서 그 문맥이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따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면서 그가 제시한 이유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허공을 치기 일쑤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 7:1)를 탁월한 가르침으로 인용하면서도, 그 이유를 밝히는 대신에 그것이 기독교 국가의 법정에서 인기가 없다는 점과 자기가 아는 많은 판사들 중 아무도 그 가르침에 역행한다고 느끼지 않는다고만 지적합니다. 그 구절이 재판하는 법정의 판사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는 점은 그 문맥이 밝히 드러내고 있지요. 가혹하고 지나치게 비판적인 검열관처럼 굴거나(1-2절), 자기는 너그럽게 봐주면서도 남을 책망하는 데 발 빠른 위선자처럼 굴지도 말며(3-4절), 먼저 자신을 교정한 후에 남의 허물을 바로 잡아 주는 형제(5절)가 되라는 문맥이지요(존 스토트).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라는 가르침을 인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많은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린 ‘특정한’(‘모든’이 아니라) 부자 청년에게 제시한 예수님의 ‘특수한’(‘보편적’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문맥이 고려되거나 언급되지 않은 채, 그저 탁월한 가르침이지만 많이 실행되지 않는 것이라고만 언급하지요. 그에게서 한 수 배워보겠다고 시작한 이 작업이 여간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존재하는 결점들(Defects in Christ’s Teaching)>

러셀은 이 항목에서 예수가 역사상 존재했는지가 아주 의심스럽다면서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하지요. 그래서 역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복음서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언급들 중 최고의 지혜로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선 예수가 그 당시에 살아 있던 사람들이 죽기 전에 자기의 재림이 영광 중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고 단정했습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많은 구절이 있다면서, 그가 인용한 구절 두 가지가 있지요.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10:23)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태복음 16:28)

 

예수의 초기 제자들도 그렇게 믿었다면서, 바로 이 사실이 예수의 많은 도덕적인 가르침(moral teaching)의 근간을 이룬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구절 더 예로 들지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라는 말씀입니다. 러셀은 예수가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에 모든 일상적인 일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언급했다고 판단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재림이 임박했다는 점을 듣고 수용했기 때문에, 예컨대 정원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일도 삼갔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면서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만큼 지혜롭기는커녕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없다고 결론짓지요.

----->이 대목에서 러셀의 근본적인 문제가 등장합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우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러셀이 단언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서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에 진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고 언급하지요. 그런데 러셀이 예수님의 역사성을 반박하면서 내놓은 증거는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로 존재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거의 모든 현대 서구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무모한 주장을 입에 담고 글로 기록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고고학자이자 듀크 대학교의 유대교학 명예 교수인 에릭 마이어스는 한 마디로, “나는 예수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주류 학자를 알지 못한다.라고 지적합니다. 세부 사항은 수세기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진지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이지요. 독일의 무신론자 신약 학자인 게르트 뤼데만조차도 십자가형으로 예수가 죽은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와 같은 비판적인 역사가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고대 역사의 사실은 아주 희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역사성은 확고하기만 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러셀의 입장에 동조할 서구 학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굳이 찾아보자면, 역사적인 예수는 존재하지 않지만 바울이 예수 신화(a Jesus myth)를 개발하기 위해 허구적인 지상 ‘역사’를 창조해 내는 게 필요했다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G. A. 웰스의 목소리만 외롭게 울릴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 중 한 곳(https://hubil-centre.tistory.com/121)에서 일정 부분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역사성에 대해 그리스도교 외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료 몇 가지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역사가 게리 해버마스가 “역사적인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한 장에서 이 주제에 대해 나눈 것 중에서 고른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교 외부 자료-

타키투스(Tacitus, 56-117). 고대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역사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로마의 타키투스는 자기가 네로 황제의 소행이라고 비난한 로마의 대화재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결과적으로 네로는 그 보고서를 없애기 위해, 죄를 덮어씌워 대중이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고 부르는 가증한 혐오스러운 계급에게 가장 절묘한 고문을 가했다. 그 이름의 유래가 된 크리스투스(Christus)는 티베리우스 통치 기간 동안 총독 중 한 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의 손에 극심한 형벌을 받았으며, 이렇게 잠시 동안 억제된 가장 독버섯 같은 미신이 악의 근원인 유대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비롯된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모든 것들이 활동을 펼칠 중심이 되어 인기를 끄는 로마에서도 다시 발발했다.”[“연대기”(“Annals”), 15:44]

 

여기에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극형’을 받은 크리스투스(그리스도를 뜻하는 라틴어)와 그의 이름을 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대에서 시작되어 로마로 전파된 그 ‘미신’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요세푸스(Josephus, 37/38-97).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인 혁명가였지만 유대인 반란 때 로마에 충성하기로 하고 목숨을 구한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가가 되어 네로의 뒤를 이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후원을 받아 일했습니다. 90년대 초에 쓰인 그의 책 “유대 고대사”(“Antiquities”)에는 흥미로운 두 구절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의 형제”(20:9)인 야고보를 언급한 것이고, 두 번째는 훨씬 더 명백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입니다:

 

“이 무렵에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업적을 이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그는 그리스도였다. (...) 그는 신성한 선지자들이 이것들과 그에 관해 만 가지나 되는 놀라운 일들을 예언한 대로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유대 고대사”, 18:3)

 

그리스도교적인 맥락 밖에서 살았던 요세푸스가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말을 했을지 의심스러워 한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 본문 대부분을 진본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여러 가지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언급한 것에 대해 만족할 만한 원문상의 증거가 있고, 이 본문이 요세푸스의 문체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문법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문맥에 맞고, 그 중 몇 단어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이 책 20장에서 예수님에 대해 언급한 것이 위의 언급 내용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부 관리.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출처로는, 직업상 일반인이 알 수 없는 공식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던 고대 정부 관리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1) 소(小)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 61-113). 로마의 작가이자 행정가였던 소(小) 플리니우스는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제(Emperor Trajan)에게 보낸 편지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예배 관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어느 일정한 날에 날이 밝기 전에 모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은 신에게 하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을 번갈아 가며 불렀습니다. 그들은 맹세함으로써 자기들을 결집시켰습니다. 이는 어떤 범죄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기나 절도나 간통을 하지 않기를, 약속을 지키고, 위탁받은 물건을 내놓도록 요구받을 때 거절하지 않기를 서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음식을 먹되 평범하고 무해한 종류의 음식을 먹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습니다.”[“서간집”(“Letters”), 10:96]

 

이 본문은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을 확증해 줍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숭배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또한 예수님의 강력한 윤리를 드러냅니다. 애찬과 성찬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같은 편지의 후반부에서 플리니우스는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과도한 미신”(excessive superstition)과 “전염성 있는 미신”(contagious supersti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예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2) 트라야누스 황제(Emperor Trajan, 53-117). 이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인 처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립니다:

 

“이 사람들을 찾아서는 안 되며, 그들이 비난을 받고 유죄가 밝혀지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그렇지만 당사자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제시하면(즉, 우리의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이전에 의심을 받았을지라도 회개했다는 근거로 용서해야 한다.”[“서간집”(“Letters”), 10:97]

 

이것은 초기 로마 정부가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약간의 빛을 비춰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신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아야 했지만, 박해에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만 L. 가이슬러는 이런 증거들을 비롯하여 복음서 기록을 보완하고 확인하는 다양한 비그리스도교 자료들을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합니다[이것들은 주로 1세기의 그리스, 로마, 유대, 사마리아 자료에서 나온 것임.]. (1)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다. (2) 지혜롭고 고결한 삶을 살았다. (3) 유월절에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유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4) 제자들은 그가 3일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믿었다. (5) 그의 정적들은 그가 ‘마술’(sorcery)이라고 부르는 특이한 업적을 수행했다고 인정했다. (6) 그의 작은 제자 무리가 빠르게 번성하여 로마까지 퍼졌다. (7) 그의 제자들은 다신교를 부정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리스도를 신으로 숭배했다. 이런 비그리스도교 자료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중대한 정보들을 확증해 줍니다.

 

러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정의에 문제가 다분히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불멸을 신뢰하고, 예수를 신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인간(the best and wisest of men)으로 믿는 자”라는 정의 말입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예수님의 역사성에 비추어 볼 때, 러셀의 이 정의가 과연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합당한 것일까요?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반역사적인 왜곡된 정의에 불과하지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가혹한 고난을 감내해야 했던 이유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온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주님으로 믿은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선생으로 인정한 때문이었을까요? 그의 정의에는 예수님을 신성은커녕 역사성을 결여한 허구적인 존재로 설정해 두고 그 존재의 선함과 지혜로움의 가치마저도 이리저리 폄훼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결국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러셀이 다루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허수아비들입니다. 그것들을 향해 그가 열심히 섀도복싱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6:34의 의미-

다음으로 러셀이 제기한 세 구절에 대해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것들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 밝힌 대로, 예수님은 자기가 당시 제자들의 생애 중에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고 제자들도 그렇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원에 나무 심기와 같은 일도 삼가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러셀이 주장하는 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라는 구절이 예수님이 자신의 임박한 재림 때문에  일상적인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취지로 권고한 말일까요? 그 구절의 문맥은 도리어 그 반대를 지적하고 있지요. 6:25-34의 문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삶이나 몸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25, 33절)라고 권고합니다. 25절을 여는 그러므로는 이런 권고의 근거가 그 이전 구절들에 있다는 점을 일러줍니다. 즉 19-24절에서 이미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 빛과 어둠, 하나님과 재물(mammon) 중에 각각 어느 것이 상대적으로 유용한 가를 파악했으니, 그 분별한 내용을 바탕으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제자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이기에(33절 하반절),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34절)는 것입니다. 여기 어디에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가 있나요? 더구나 그것 때문에 일상적인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나요? 한 마디로 사실무근 혹은 견강부회지요. 

 

신약 속에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구절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마태복음 23:33, 야고보서 5:8-9), 그 재림에 대한 기대나 믿음으로 인해 당시 제자들이 일상생활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입니다. 일부 미성숙한 이들이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을 만들기도 했지만(데살로니가후서 3:11), 그런 자들에게도 조용히 일함으로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벌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3:12).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10)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사역 기조였기 때문입니다. 그 정신을 본보이기 위해 그는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수고하면서 밤낮으로 일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3:8).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을 정리해 본다면, 그 핵심은 비록 재림이 임박했지만, 그 정확한 시점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알 수 없고(마태복음 24:36) 마치 도적처럼 임하기 때문에(마태복음 24:43-44) 늘 깨어 신실하게 삶을 영위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24:42, 25:13, 데살로니가전서 4:11-12).

 

-마태복음 10:23의 의미-

다음으로 마태복음 10:23(“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이 과연 러셀이 주장한 대로인지 한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10:5-23의 문맥 속에 존재합니다. 이 문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10:5-15과 16-23입니다. 앞부분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맥락 내에서 벌어지는 즉각적인 상황 전개를 다루고 있고, 뒷부분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보다 광범위한 선교 사역에 드려질 때 전개될 나중 상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7-18절을 참고해 보세요.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밑줄 친 단어들만 주목해 보아도, 5-6절에서 ‘이방인의 길’이나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는 명령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다른 상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제 사도(‘보냄받은 자’란 의미)라고 일컬음 받은 제자들에게 국내 선교를 명하시면서, 이에 덧붙여 예수님은 장차 연속될 전 세계적인 선교 과정에서 제자들이 당할 미증유의 고난을 예견하고 경고할 뿐 아니라 위로해 줍니다. 즉 성령께서 내주해 주심으로 도와주실 것과, 결국 온전한 구원이 임할 것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단락 속에 두 가지의 시간대가 연속되거나 중첩된 가르침이 존재한다는 관찰이 타당한 것일까요? 우선은 이 본문의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6:7-13과 누가복음 9:1-6을 보세요. 마태복음 본문의 전반부 내용은 있지만, 그 후반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서로 비슷한 주제를 가진 내용을 함께 모아 기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F. F. 브루스에 의하면 이런 것이 마태복음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아래와 같이 각각 비슷한 말로 끝나는(7:28, 11:1, 13:53, 19:1, 26:1을 참고) 5개의 대단락 안에 대부분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열해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산상수훈(5-7장)의 끝-7: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 제자들의 선교에 대한 가르침(10)의 끝-11:1(“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3) 비유들로 이루어진 장(13장)의 끝-13:53(“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4) 친교하는 제자들의 삶에 대한 가르침(18장)의 끝-19: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5)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23-25장)의 끝-26:1(“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 5개의 대단락에서 진행되는 가르침들은 시간의 진행에 따른 내용이라기보다는 주제에 따라 저자인 마태가 배열한 모음집(collections)이라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R. H. 스타인). 지금 다루고 있는 본문의 경우(밑줄 친 부분)도 이런 패턴에 속하지요. ‘제자들의 선교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주제에 맞게 국내 선교와 확장된 세계적 선교 상황에 대한 예수의 권면이 서로 연속되거나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10:23에서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동네들을 완결하다’(’complete the towns of Israel’)라고 번역할 수 있는 표현과 ‘인자가 오다’(‘the Son of Man comes’)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동네들’이란 말은 지리적인 표현이므로, ‘이스라엘 동네들을 완결하다’라는 말은 이스라엘 각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인자가 오다’라는 말은 다니엘 7: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과 직결됩니다. 인자가 땅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권세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인자’라는 특별한 용어(신성과 메시아 직무와 직결된 용어)를 썼고, 자신이 미래에 누릴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인자가 오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래의 마태복음 26:64은 다니엘 7:14을 반영하는 구절로서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아래의 마태복음 25:31은 19:28과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게 될 것을 지적하지요.

 

■마태복음 26:64[“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다니엘 7: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25: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19:28[“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렇다면 결국 23절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어느 특정 시점에 재림하는가가 아닙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을 포함한 세계 방방곡곡에서 선교는 계속 진행된다는 점과 예수님이 예언된 인자로서 온 세상의 권세를 받게 되는 것이 선교에 중대한 추진력을 공급해 준다는 점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R. T. 프랜스, N. T. 라이트). 먼저 선교의 본질은 영토적인 ‘오고 감’(from-to)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지역과 민족 집단 속과 그것들 너머로 확산해가는 것입니다(앤드류 월스). 그야말로 동시다발적으로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even to the remotest part of the earth, 사도행전 1:8)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23절의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스라엘 각 동네에도 복음 전하는 이가 존재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 ‘인자의 오심’이 얼마나 중대한 추진력으로 작동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마태복음 28:19-20에 기록된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이 그 사실을 열어 밝히고 있지요. 그 명령 완수의 관건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은 예수님(28:18), 즉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인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교가 마감될 즈음에 인자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재림할 것입니다(마태복음 24:14). 할렐루야!

 

-마태복음 16:28의 의미-

다음으로 마태복음 16:28(“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이 과연 러셀이 말한 대로인지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16:21-28의 문맥 중에 있습니다. 21절의 “이 때로부터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사명이 결정적 새 국면을 맞게 됨을 일러줍니다. 그 사명의 지리적인 초점은 예루살렘이 되고 그 성격은 십자가와 부활로 규정되므로, 이제부터 예수님은 죽음을 향한 행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좇는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을 기대하시고 명령합니다(24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23절)이기에, 공개 처형(public execution)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에게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프쉬케’, ‘생명’(life) 혹은 ‘영혼’(soul)이란 의미]을 잃는 길뿐입니다(25절). 그러면 그 목숨을 다시 찾아 누리게 됩니다. 이 목숨은 온 천하(the whole world)보다 더 소중합니다(26절). 이러한 진실이 드러날 때가 도래합니다. 바로 인자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을 거느리고 왕과 심판자로 다시 임하여 제자들의 헌신을 갚아줄 때입니다(27절). 그다음에 러셀이 언급한 28절이 등장하지요.

 

문자적인 번역을 지향하는 영어 성경인 NASB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인자가 자기 왕국에 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죽을 사람도 있다.”(Truly I say to you, there are some of those who ar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unti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 앞에서 마태복음 10:23에 대해 논의할 때 다룬 내용과 유사한 상황이 소개되고 있지요. ‘인자가 자기 왕국에 온다’는 것은 그가 부활 이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왕권을 부여받는 상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라고 밝히 드러낸 대로입니다. 결국 예비적인 의미에서는 제자들이 그다음 주에 일어날 예수님의 변모 사건(transfiguration, 17:1 이후 참조)을 통해 ‘인자가 자기 왕국에 온다’는 것을 맛보겠지만, 더욱 완전한 의미에서 그 전모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및 천국 통치에서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상에서 러셀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존재하는 결점들’이라는 항목에서 논의한 내용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신구약을 꿰뚫는 안목과 신학적 지식이 없이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성구들을 경솔하게 다루고 피상적으로 해석하는 그의 견강부회가 놀랍습니다. 더구나 절대 다수의 서구 학자들도 인정하는 예수님의 역사성을 어벌쩡하게 부인한 채, 4복음서와 같은 역사적 저술이 버젓이 존재하는 데도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강변하는 그의 무모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할 뿐입니다. 아마도 후자의 무모함이 전자의 견강부회의 원인이었을 듯합니다. 예수님을 허구적인 인물로 이해했으니 그를 소개하는 복음서도 소설처럼 읽었을 테지요. 사실상 소설도 그렇게 독해하면 안 되지요. 그 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용어나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고, 다층적인 문맥을 통해 인물과 사건의 의미를 짚어 가고 헤아려 가야 하지요. 그렇게 다변적인 문맥의 존재 덕에 소설이 개연성 있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러셀의 명성에 거품이 잔뜩 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