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공부: 성경 통독만으로 충분하다?
-지적인 성장 vs. 인격적인 성장-
2주 전에 한 모임에서 성경 공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전문인 선교사(‘tentmaker’)가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고 교리적인 토대를 쌓을 수 있는가라는 점을 강의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참석자 대부분이 이미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모든 교리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할 것을 조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교리를 잘 설명해 주는 양서들을 확보해두고 관심 있는 주제나 필요한 교리들을 틈틈이 살펴보는 게 지혜롭다고 제안합니다. 예컨대 존 스토트의 “성경연구입문”(Understanding the Bible),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 및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Evangelical Truth)나 J. I. 패커의 “성경과 신학을 아는 지식”(Concise Theology: A Guide to Historic Christian Faith) 정도를 활용하면 이런 필요를 상당 부분 채울 수 있습니다. 좀 더 상세한 교리의 이해와 해석은 웨인 그루뎀의 “조직 신학”(Systematic Theology)이나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 전반의 내용이나 교리에 대한 이해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투자해야 할 영역은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주기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일입니다. 전자의 영역이 지적인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후자의 영역은 인격적이고도 경험적인 신앙 성장에 기여합니다. 두 영역 다 중요하지만, 후자가 더 우리의 실생활과 연관이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영어를 공부하고 활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어 문법을 익히는 것이 영어 공부의 기본이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기본을 익혔으면, 실제 의사소통의 경험으로 바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컨대 수준에 맞는 영어책을 읽고, 유튜브 영어 영상을 시청하고, 말과 글로 영어 사용자들과 메시지도 나누는 경험을 쌓아가야 합니다. 만일 기본 문법 다음에 중급 문법, 그다음에는 고급 문법으로 들어가려고만 하고, 실제적인 소통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까지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 낳은 영어 불통 현장이 그 실례가 되겠지요. 영어를 10년 이상이나 배우고서도 외국인과 간단한 영어 대화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기현상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신앙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지 10년이나 지났어도, 말씀을 일상생활의 양식으로 섭취하지 못합니다. 기도도 지속적이고도 인격적인 주님과의 대화로 성숙해 가는 게 아니라 단속적(斷續的)이고도 일방적인 독백으로만 내내 진행됩니다. 자신과 세상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시각이 더 섬세해지고 심화되지도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 즉 주님을 닮아가는 면(Christlikeness)에서도 지지부진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을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내용이 준비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격적이고도 경험적인 신앙 성장은 어떻게 진행해갈 수 있을까요? 우선 주로 이른 아침에 말씀을 통독하거나 짧은 성경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일이 일상생활의 기본이 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 말씀에 기도로 응답하는 것은 주님의 백성 혹은 주님의 자녀된 자의 본분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주님의 인격과 관심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할 능력과 지혜를 공급받습니다. 이런 필요를 위해서 “맥체인(McCheyne) 성경읽기표”나 “매일성경”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전자를 통해 일년에 신약과 시편 2회, 시편을 제외한 구약 1회를 통독할 수 있고, 후자를 통해서는 6년에 한 번 성경 전체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주중에 한두 번씩 성경을 공부하거나 양서를 읽으면서 성경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단계를 더할 수 있다면,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디모데후서 3:17) 될 것입니다.
-성경 통독 vs. 성경 연구-
성경을 통독하면 되지, 공부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과거에 그런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번 강의 전에 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장로교 보수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자랐는데, 보통 학생 수련회를 가면 아침부터 성경을 통독하는 게 주된 일정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읽고 순종하는 것이지, 어떻게 감히 그 말씀을 공부할 수 있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가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교단이 운영하는 학생선교단체에 들어가 보니 PBS (Personal Bible Study)나 GBS (Group Bible Study)가 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통독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통독만 하면 깨닫지 못하는 것들도 수두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감추어진 일”(secret things)을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신명기 29:29). 우리가 그것들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도리어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것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나타난 일”(the things revealed)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말입니다.
지난달에 부산에 사는 제자 선생님 한 분이 대구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함께 회포를 푸는 과정에서 선생님이 최근에 깨닫게 된 성경 본문 한 가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가복음 11:12-14에 등장하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사건이었습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어 오던 중, 최근에 본 유튜브 설교를 통해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신앙생활을 등진 채 지난 30년을 보낸 게 아니었습니다. 꾸준히 교회를 출석하며 설교를 접하고 성경과 양서들을 지속적으로 읽는 일에 관심을 두며 살아왔지만, 그 사건의 의미는 오리무중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무화과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지난 위상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기능을 한다는 점(예레미아 8:13, 호세아 9:10, 16, 요엘 1:7)과, 그 사건과 그것에 잇달아 벌어지는 ‘성전 청결’ 사건과의 연관성에 주목한 설교를 접했을 때 그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종교의식에 대한 관심으로만 분주할 뿐 참으로 기도하는 자가 없던 당시 성전을 예수님께서 청결하게 하신 사건과 오버랩 됩니다. 더구나 성전에서 동물을 파는 자들과 환전상들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이방인들이 와서 고요한 묵상과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마련된 ‘이방인의 뜰’(the court of the Gentiles)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A HOUSE OF PRAYER FOR ALL THE NATIONS)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절). 이 구절의 ‘만민’은 헬라어로 ’ethne’로서 ‘이방인들’이나 ‘모든 족속’을 의미하지요. 즉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적 관습과 율법주의에 매몰된 채 자기들만 참된 마음의 변화라는 열매를 맺지 않은 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당신을 찾고 구한 이방인들의 구도 과정도 막아선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임박한 심판의 전조로 예수님께서는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활용하셨던 것이지요. 누가복음 13:5-9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에 대해 발하신 저주가 ‘말로 한 비유’(a spoken parable)였다면, 이 사건은 “극적인 행동으로 보인 비유”(a dramatic acted parable) (N. T. 라이트, F. F. 브루스)였습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계시하는 “비유적 행동”(a parabolic act)이었던 것입니다(R. H. 스타인).
-성경연구의 도구: 문맥 살피기와 질문하기-
이상에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에 대해 논의한 내용은 성경을 연구할 때 필수적인 기본 요소를 지적해 줍니다. 즉 공부하는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피고 그것과 연관된 성서상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두고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영국의 철학자요 수학자이자 노벨문학상(1950)을 받은 문필가인 버트런드 러셀도 있습니다. 당시 그 무화과나무는 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않은 것인데(마가복음 11:13절 참조), 예수님께서 배가 고픈 나머지 분노가 치밀어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무분별한 행동이 아니었냐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 본문을 조금 더 연구해본 후에 다시 평가해 보시지요.
(마가복음 11:12-14)“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On the next day, when they had left Bethany, He became hungry. Seeing at a distance a fig tree in leaf, He went to see if perhaps He would find anything on it; and when He came to it, He found nothing but leaves, for it was not the season for figs. He said to it, “May no one ever eat fruit from you again!” And His disciples were listening.)
성경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질문 던지기(예: 육하원칙)가 아주 유용합니다. 그냥 읽고 넘어가던 본문도, 다각도로 질문을 하면서 접근해보면 이전에 주목하지 않았던 많은 정보를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경 공부가 질문하기를 그 중심에 두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언제 이 사건이 발생했는가? --->이튿날 =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신 그 다음날. 어디에서 이 사건이 벌어졌는가? --->베다니에서. 누가 이 사건에 등장하는가? --->예수님과 제자들. 왜 예수님께서는 그 무화과나무에 접근하셨는가? --->시장해서 그 나무에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찾으신 그 무엇인가는 무엇이었는가? --->열매였을 것. 어떻게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셨는가? --->그 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해서. 여기에서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무성하면 열매가 맺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그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해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지 않았다면, 이런 예수님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질문을 한 덕에 다른 참고 자료들을 들추어볼 필요가 생깁니다. 그 결과, 무화과나무에 대해 아래와 같은 중요한 정보가 드러나지요.
[무화과(無花果)는 이름 그대로 꽃이 없는 나무다. 사실상 꽃이 없이 없는 게 아니라, 열매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은화과(隱花果)에 속한다. 주목할 점은 무화과는 열매가 잎보다 먼저 나거나 거의 동시에 난다는 것이다. 잎이 나고 꽃이 핀 후에 열매가 맺히는 일반 나무들과는 다른 점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개나리도 꽃이 핀 후에 잎이 난다는 점을 고려해 보라. 무화과는 열매 속에 꽃이 피어 있으니 개나리와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잎이 무성한 무화과라면 반드시 열매가 나 있어야 한다. 중동 지역의 무화과는 한 해에 두 번 열매가 맺힌다. 이스라엘에서 건기가 시작되는 유월절 경에 맺히는 첫 열매를 히브리어로 ‘파게’(팔레스타인 아랍어로는 ‘탁쉬’)라고 부른다. 아직 제대로 익지 않은 파란색을 띤 조그만 무화과이다. 이 ‘파게’는 우기 동안 과일을 먹지 못하던 유대인들이 건기를 맞아 처음 접하는 열매로서, 우리나라 춘궁기처럼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참 소중한 먹거리였다. 미가 7:1에 나오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바로 이 파게일 게다.
(미가 7: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a first-ripe fig)가 없도다”
이 첫 열매는 일정 기간 자라다가 저절로 떨어지므로, 그 나무의 주인들도 행인들이 그것 먹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 열매는 이때로부터 약 6주 후에 본격적으로 열리는 무화과인 ‘테에나’의 전조인 셈이다. 만일 이 ‘파게’가 없고 잎만 무성한 나무라면 결국엔 ‘테에나’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무화과나무의 상태가 바로 그러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와 장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먼저 시기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12절의 ‘이튿날’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전 입성하신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왕)로 그 전날 예루살렘에 임하신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그러므로 이 시점 이후에 예수님께서 취하신 언행은 왕의 권위를 띤 것으로 봐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도 그 맥락에서 살피는 게 바른 독법이겠지요. 장소에 대해서도 살펴 보겠습니다. 12절에는 베다니(Bethany)라고 되어 있지만, 1절에는 예수님께서 당도하신 곳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Bethphage)와 베다니(Bethany) 가까이”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2km(요한복음 11:18)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고, 벳바게는 그 옆 동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들르신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살던 곳이었지요. 그런데 이 두 동네는 무화과나무가 많은 동네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베다니라는 지명이 무화과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테에나’라는 단어와 집(혹은 마을로 풀이될 수 있음-김동문 작가)을 가리키는 ‘베이트’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무화과 마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벳바게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화과의 첫 열매인 ‘파게’라는 단어와 ‘베이트’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첫 무화과 마을’이라는 뜻이지요.
이상의 연구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비록 당시에는 ‘테에나’를 맺을 제철이 아니었으나 잎이 무성한 것으로 보아 ‘파게’를 맺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 첫 열매가 없으니 나중의 온전한 열매는 난망했습니다. 그야말로 “땅만 버리는” (use up the ground, 누가복음 13:7) 나무에 불과해서 찍어 내 버리는 게 마땅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쓸모없는 나무를 열매 맺지 못한 채 자족하고 있던 당대의 이스라엘 민족을 경성(警醒)하는 도구로 활용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성립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이 무화과나무가 역사상 수많은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의 비참한 실상을 일깨워주고 회개로 이끌어 주는 최고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게 말이 되느냐?’라는 도전은 관련 성경 본문에 대한 정치한 독해와 그 문맥 살피기에 실패한 설익은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런 도전을 한 이들도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인기의 잎사귀만 무성한 상태냐, 혹은 그런 잎사귀와는 무관하게 성숙한 성품과 아름다운 선행의 열매가 풍성한 상태냐를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판단 받기 위해 서기 전에 이런 자기 성찰에 임하는 게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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