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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1)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3. 10.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1)

-오독은 문맥 읽기 실패의 결과-

 

-책 읽기의 기본원리-

하나님의 계시로 형성된 성경은 기본적으로 문학 작품입니다. 그 문학적 측면을 고려한다는 말은 우선 각 책이 어떤 종류의 ‘문학’(literature)인지 주목하는 것입니다. 역사서인지, 시가서인지, 예언서인지, 서간문인지 구분하고 그 장르에 맞게 이해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책의 저자가 자기의 글을 어떻게 읽어주기를 바라는지 식별하게 됩니다. 잠언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과 역사서를 읽고 이해하는 방식은 달라야 하지요. 예컨대 잠언 3:5을 보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권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2:1-5을 보면, 전심을 다해 명철을 찾으라는 명령이 제시됩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살다 보면 자기 명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고, 자기가 활용할 명철을 힘써 찾아야 할 때가 있지요. ‘첫인상’이라는 자기 명철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많지만, 다양한 정보를 견주어 가며 형성한 명철은 중요한 결정의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잠언에는 그 실용적인 성격상 모순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잠언이라는 장르의 특성입니다. 역사서는 그것과 다릅니다. 예컨대 마가복음 15:40-16:1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과 빈 무덤을 목격한 세 여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였지요. 남자 제자 증인은 한 명도 없고 당시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신임받지 못하던 여인 세 명만 증인으로 등장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전설이나 소설이 아니라 실제 발생한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한 것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성경 읽기에 있어 장르에 대한 인식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문맥에 대한 고려입니다. 미국 IVP(InterVarsity Press) 편집장을 지내고 20세기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아버지로 알려졌던 제임스 사이어가 사리 분별이 뚜렷한 책 읽기를 위해 필요한 원리 한 가지(“an important principle of responsible reading”)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글쓴이의 정신에 입각해서 글을 읽어야 하며, 그 구절과 적합한 문화적, 지적 준거 안에서 글쓴이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즉 훌륭한 독자는 항상 그 본문이 속해 있는 원래의 역사적, 문화적 문맥 가운데서 그것의 의미를 이해한다.”(We should always read in the spirit of the writer, pay attention to what the writer has actually said in the cultural and intellectual framework natural to the text. That is, a good reader always sees the text in terms of its original historical and literary context.) (“Scripture Twisting”)

 

일반적으로 독서할 때 문맥을 고려한다고 하면, 우선 근접 문맥(그 본문 앞과 뒤 혹은 그것이 속한 장)과 좀 더 넓은 문맥(그 본문이 속한 책 전체)을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사이어는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그 책 전체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준거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그 책 전체의 세계관(worldview)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문맥뿐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에 주목해야 합니다. 연면한 역사를 통해 히브리인들이 기록한 성경 속에 나타난 세계관은 우리나라나 세계 다른 문화가 드러내는 세계관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적 세계관에 대해 마음 문을 열고 주의 깊게 성경을 읽지 않으면, 온갖 방식으로 오독하게 됩니다.

 

사이어가 제시하는 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상황입니다(사도행전 14장), 그들은 그 청중 가운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10절)라고 외치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그때 청중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절)라고 외치면서,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까지 합세하여 소와 화환들을 갖고 와서 제사 지내려고 했지요. 그때 두 사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옷을 찢으며 외쳤지요.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절) 이 사건에는 두 가지의 세계관이 드러납니다. 자기들 목전에서 일어난 기적을 루스드라 사람들은 헬라 종교 세계관으로 해석했지만, 두 사도는 결연히 일어나 유대/그리스도교 세계관으로 도전했던 것이지요.

 

다음은 미국의 요가협회 회장이었던 스와미 사치타난다의 사례입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강당에서 운집한 청중들에게 연설하면서 산상수훈 중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 잠시 후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의식을 정화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Yes, blessed are those who purify their consciousness, for they shall see themselves as God.”) 어떻게 이런 오독이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스와미 사치타난다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궁극적인 차별이 없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준거(frame of reference) 안에서 각 사람은 본질적으로 “신성을 지닌”(divine)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의식을 정화하고, 경험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 영혼이 진실로 “우주의 영혼”(the soul of universe)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각자가 “하나님”(God)이라는 말이지요. 여기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변화된 것을 알아차리셨나요? 범신론(pantheism)적 세계관을 지닌 스와미 사치타난다의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우주 자체의 본질”(the impersonal essence of the universe itself)을 가리킵니다. 결코 성경적인 세계관 속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지요.

 

사이어는 이 세계관의 혼동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성경 오독의 주된 원인(the major cause)이거나 주된 결과(the major result)라고 주장합니다. 먼저 앞에서 든 두 예와 같이 성경이 제시하는 준거를 파악해서 그것으로 특정 성경 본문의 의도를 인지하지 않고, 자기 선입견(preconceived notion)이나 세계관으로 그 본문의 의미를 재단해서 오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혼동된 세계관이 오독의 원인이 된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오독이 성경에 대한 자기 선입견이나 세계관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아, 다른 성경 본문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더 요원한 일이 됩니다. 즉 혼동된 세계관이 오독의 결과가 되는 것이지요.

 

이상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책을 읽을 때 그 내용을 오해하는 원인은 그 책의 장르상의 특징에 주목하지 않거나 문학적인 문맥을 간과하거나 부적합한 세계관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명멸한 숱한 이단들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은 이러한 세 가지 영역 모두에서, 혹은 적어도 그것들 중 한 가지 영역에서 잘못된 접근법을 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해 노골적으로 공격한 시도들도 그친 적이 없었지만, 그것들도 이러한 세 가지 영역 중 한 가지 이상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이번엔 그 시도들 중 한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영국의 철학자요 수학자이자 노벨문학상(1950)을 받은 문필가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 그 주인공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오독-

<하나님의 존재(The Existence of God)>

그의 책 중에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1927)라는 종교 에세이 모음집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는 책 제목과 똑같은 제목의 강연 원고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과거와 현재가 각각 다르다고 언급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는 그 단어가 엄정하게 제시된 모든 신조를 온 힘 다해 믿는 자를 가리켰지만, 현대에는 그 순수한 의미(a full-blooded meaning)가 퇴색되어 버렸다고 주장하지요. 그리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과 불멸을 신뢰하고, 예수를 신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인간(the best and wisest of men)으로 믿는 자라는 정의를 내립니다. 이 정의부터 문제가 다분히 있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는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전개합니다. 특히 가톨릭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으로 제시하는 것 다섯 가지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서 논평하지요.

 

(1) 제1원인 논증(The First Cause Argument): 하나님을 이 세상의 제1원인, 즉 궁극적인 원인으로 여긴다는 논증입니다.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러셀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 속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답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질문이 즉각적으로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라는 더 진전된 질문을 암시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셨다.”(“My father taught me that the question, ‘Who made me?’ cannot be answered, since it immediately suggests the further question, ‘Who made God?’”) 그래서 제1원인에 대한 논증에는 오류가 있다고 반박하지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제1원인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이라는 존재는 왜 그 원인이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라는 것이지요.

----->제1원인 논증은 중세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했던 논증입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기에 그 모든 것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그 인과관계의 가장 첫 번째 원인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 러셀은 밀의 영향을 받아, '누가 하나님의 원인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은 만들어진 존재라는 전제 혹은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하나님이 누군가 혹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지요. 사전적 개념상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자이자 주관자”(the creator and ruler of the world)이기 때문입니다. 자존(自存)하는(uncaused) 존재이지요. 바로 그것이 ‘제일원인’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제일원인 논증’은 순환성(circularity)을 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이 제일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일원인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식의 순환논법은 논리의 오류로 인식되지만, 궁극적인 실재나 문제에 대해선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수학에서 공리가, 합리주의에서 이성이, 경험주의에서 실험과 관찰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궁극적 권위로 수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공리, 이성 및 실험과 관찰이 각각의 영역에서 기반이요 토대가 되기 때문이지요. 제일원인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교의 기반이요 토대입니다. 러셀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대로, 결국 문제는 하나님이 제1원인인가, 아니면 이 세상이 제1원인인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자를, 무신론자들은 후자를 믿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신론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라고 조롱하듯 질문하면서, 마치 그들에게 어퍼컷을 날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은 누워서 침 뱉기 한 셈이지요. 그들에게는 러셀의 마지막 문장의 앞뒤를 바꾼 게 약이 되겠지요. “이 세상이 제1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왜 하나님은 제1원인 없이 존재할 수 없지?”

 

(2) 자연법 논증(The Natural Law Argument): 자연계에 존재하는 중력이나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도덕법을 보면 그 법의 부여자로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논증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러셀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나 원자 활동에 대한 지식에 따르면, 자연계의 법칙이란 것은 “그저 우연에서 출현할 법한 부류에 속한 것의 통계적 평균치”(statistical averages of just the sort that would emerge from chance)에 불과하고, 도덕법이라는 것도 그저 인간적인 관습(human conventions)에 해당한다고 반박하지요.

----->자연 법칙에 대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평하기로 하고(https://hubil-centre.tistory.com/182), 도덕법을 인간적인 관습으로 여긴 점에 주목해 봅시다. 그의 견해는 C. S. 루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도덕법은 좌측통행 혹은 우측통행과 같은 관습이라기보다는 구구단과 같은 실제 진리에 해당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전자는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만, 도덕법은 후자와 같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달라지지 않지요. 이렇게 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도덕법은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도덕법과 거의 차이가 없고 그 도덕법을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선대하며, 진실을 선양하는 것은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초월해서 존중받는 도덕입니다. 둘째는, 어떤 개인이나 어떤 사회의 도덕이 다른 개인이나 다른 사회의 도덕보다 낫다고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도덕법이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제3의 도덕법이 바로 ‘참 도덕’이 되는 것이지요. 예컨대,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도덕이 이오시프 스탈린의 도덕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생각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참 도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도덕은 어떤 옷을 입느냐,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인사하느냐와 같은 관습적 문제들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합니다. 자연법 논증은 이러한 도덕법이 하나님의 존재에 기원을 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3) 설계 논증(The Argument from Design):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논증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러셀은 다윈 이후로 드러난 바와 같이, 환경이 생물들에게 적응하는 게 아니라,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해 왔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 세상에 그런 설계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하지요. 만일 그런 설계를 한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면, 어떻게 그 수백만 년 동안에 케이케이케이(the Ku-Klux-Klan)나 파시스트(the Fascists) 같은 이들이 준동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라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다윈은 무작위적인 유전자 변화(random genetic change)와 자연도태(natural selection)라는 두 과정을 믿었습니다. 이것들로 인해 낮은 형태의 생명체에서 더 높은 형태의 생명체가 출현해서 진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생물계 혹은 무기 물질의 세계(the inorganic world)는 진화의 대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명을 지탱하도록 완벽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천문학적 탐구를 통해 이 세상에서 생명이 가능하도록 미세하게 조정된 수많은 우주적인 상수들(cosmic constants)이 발견되었다는 점에 주목해 보세요. 예컨대, 천문학자인 휴 로스는 우주가 생명체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적소(適所)에 배치되어야 할 요소가 무려 100가지 이상(지난 20년간 꾸준히 증가해 온 숫자)이나 된다는 점을 제시한 바 있지요.

 

게다가 생물의 차원에 대해서 보더라도, 생명체는 다윈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oceans of information)를 포함하지요. 예컨대, 인간 세포 하나는 ‘정보 문제’(‘information problem’)라고 부를 만큼이나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몇 개의 백과사전의 분량에 해당하는 양이니까요. DNA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안에는 문자에 해당하는 ‘nucleotides’, 단어에 해당하는 ‘codons’ 혹은 ‘triplets’, 문장에 해당하는 ‘genes’(유전자), 문단에 해당하는 ‘operons’, 장(章)에 해당하는 ‘chromosomes’, 책에 해당하는 ‘living organisms’(생명체)로 구성된 문자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많은 이론가들이 이제는 우연(chance)이란 요소가 자연발생설[abiogenesis, 생물은 무생물에서 저절로 생겨 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로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많은 학자가 믿어 왔으나 파스퇴르의 실험으로 부정됨]을 설명한다는 입장을 내버린 채, 이렇게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하도록 지원해 준 외래 자연법칙을 찾고 있기까지 합니다. 예컨대,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함께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하는 공로를 세운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외계인들(extraterrestrials)이 지구에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고 주장했지요. “정향 범종설”(定向 汎種說, “directed panspermia theory”)로 불리는 이 이론은 생명체가 생명이 없는 것(non-life)에서 형성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의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 외계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현재로선 아무런 과학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원은 자연발생설로 설명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야말로 후라이팬 피하려다 불에 빠진 격(jumping from the pan into the fire)입니다. (D. Groothuis, “New Dictionary of Christian Apologetics” 참조)

 

다른 한편으로, 진화의 법칙은 얼마든지 전체 설계의 일부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설계 논증은 더 정교한 형태로 재규정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연속의 규칙성을 강조하는 시간 기반 모형(a time-based framework)에 따르면, 특정 행동과 연관된 적절한 기본 정보가 제시되기만 하면 그 행동을 완전하고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지요. 이러한 사실은 순전히 무작위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이론을 반증할 뿐 아니라. 관찰된 패턴을 지배하는 마음 혹은 디자이너가 존재한다는 사상을 뒷받침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입장이 진화론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시나브로 무신론으로 진화해 버린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연주의적 진화론이나,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생명의 기원을 운위하는 화학 진화론은 마땅히 부인해야겠지만, 엄정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된 진화론의 내용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이 설계 논증은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하나님이 마련해 둔 전체 설계의 일부로 보면서,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과 현대 과학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는 섬세한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의 문제에 관해서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논증이 제시된 바 있습니다. 첫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자유의지 논증”(“free will defence”)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로운 행위자(free agents)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 도덕적인 악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즉 도덕적인 악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예지와 능력(God’s foreknowledge and power)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전자와 후자 모두 엄연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두 가지의 관계는 “파동-입자 이원성”(Wave-particle duality) 문제와 같은 이율배반(antinomy)의 차원이라고 지적합니다. 둘째는 “대의” 논증(“greater good” argument)입니다.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 두 가지 다 결국에는 더 큰 신성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여한다는 것이지요.

 

(4) 도덕 논증(The Moral Arguments for Deity): 칸트가 주장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right) 그름(wrong)이 없을 것이라는 논증입니다. 러셀은 만일 옳고 그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선하다는 선언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지요. 옳고 그름이 존재한 것이 하나님을 통해서였을 뿐 아니라 그 옳고 그름은 본질상 논리적으로 하나님보다 먼저 존재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만든 하나님에게 명령을 내린 더 우월한 하나님이 존재했거나, 어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보지 않았을 때 악마가 세상을 만들었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반박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도덕 논쟁은 임마누엘 칸트가 신의 존재에 대한 다른 논증들에서 드러난 치명적인 결함들을 제시한 후 처음 제기했습니다. 칸트는 여전히 신을 믿었고, 비록 신의 존재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지만, 그것은 필수적인 가정(a necessary postulate)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라는 황금률과 그것에 준하는 명령들은 정언적 혹은 단언적인(categorical) 도덕법으로서, 어디로부터인가 비롯되었고 그 기반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 도덕법의 제정자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제정자가 바로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주하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도덕 체계는 무너져 허튼소리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칸트는 이 도덕적 논증이야말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도덕이 말이 되려면 하나님의 존재(the existence of God), 인간의 자유(human freedom) 및 사후의 삶(life after death) 혹은 불멸(immortality)을 가정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도덕법 제정자가 없는 상태에서는 도덕적 의무(moral duty)에 복종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지요. (E. D. Cook, “New Dictionary of Christian Apologetics” 참조)

 

이 칸트의 주장에 대해 러셀은 하나님이 도덕법을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논리상 그 도덕법이 하나님보다 선재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하나님보다 더 우월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그 명령을 내린 것이나 악마가 세상을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논리 전개가 과연 타당한 것일까요? 칸트의 요지는 ‘도덕적 권위의 기반’(the basis of moral authority)이 하나님이라는 것인데, 왜 러셀은 그 기반을 논의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하나님보다 더 우월한 하나님의 존재나 악마의 세상 창조라는 개념을 동반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일까요? 그저 간단하게 도덕법의 기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든지, 혹은 인본주의자답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도덕법의 척도라고 주장하면 될 일을 말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우월한 하나님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기반 아래 또 다른 기반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악마가 세상을 창조했다니, 도대체 어떻게 악의 화신인 그가 자기를 대적하는 도덕법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진선미가 넘실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러셀과 배짱이 맞은 당시 청중들은 상상력이 춤을 추는 이런 언설을 접하고 즐거워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논리가 자가당착에 빠져 버린 것도 도무지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5) 불의의 교정을 위한 논증(The Argument for the Remedying of Injustice): 이 세상 속에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존재가 요구된다는 논증입니다. 러셀은 과학적으로 보면 이 우주에서 우리가 아는 세상은 이 세상이라는 샘플뿐인데, 여기에 불의가 있다면 다른 곳에서도 불의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반박하지요. 더구나 이 세상에 불의가 만연한 것을 지금껏 경험했다면, 정의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고 가정하는 게 합리적일 테고, 이런 상황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이 된다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의가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도덕적 논증이 된다는 러셀의 주장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온 세상이 정의로 충일해야 할 텐데, 불의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하나님이 부재한 것이 분명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정의 혹은 도덕 원리의 기반이 하나님인 것은 맞지만, 정의가 부재한 세상의 현 상황이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C. S. 루이스가 언급한 대로, 세상을 창조하고 이끌어 가는 철저히 선한 존재(a wholly good Being)인 하나님과 세상의 불행(the world’s miseries)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불의에 의한 세상의 불행은 하나님 부재의 결과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인간이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정의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이 자유로운 인격을 지닌 인간을 창조하셨으나, 그 인간이 정의를 좇지 않고 불의를 행한 것이지요. 불의를 저지르는 주체가 인간이므로 인간이 정의와 도덕법을 무시한 데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합니다. 따라서 이 책임을 묻는 심판을 집행할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도덕법이 타당한 것이 되려면 자유, 사후의 삶 및 하나님의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고 칸트가 말한 대로입니다. 그리고 불의가 아무리 성행해도,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정의가 원형(original)이고 불의는 그것의 왜곡된 모습(a mere perversion)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정의가 나무(the tree)라면 불의는 나무에 붙어 기생하는 담쟁이덩굴(the ivy)에 불과하지요(C. S. 루이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들을 이런 식으로 다루면서 러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를 믿는 것은 지적 논증(intellectual arguments)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어릴 때부터 교육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안전에 대한 소망”(the wish for safety), 즉 우리를 돌보아 줄 큰 형(a big brother)이 존재한다는 느낌이라고 지적하기까지 합니다.

----->첫째 주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지적 논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사실일까요? 사실상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믿을 때, 아무리 간략하고 단순한 형태라도 추론이나 논증 과정(reasoning)을 거치지 않는 경우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하지 못할 뿐이지, 이런 논증 과정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참이 아니라(untrue)고 인식한 것을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상 어릴 때부터 존경하는 권위자로 인정한 부모님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교육받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도 나름대로 하나의 논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장성해서까지 부모나 교사와 같이 신뢰할 만한 권위자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듣고 배우면서, 그것들을 참이라고 인식하면서 성숙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주 지혜롭고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이 적어도 20년간을 가정과 학교에서 보내지요.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만을, 그것도 엄격한 자신의 지적 논증을 통한 것만을 믿겠다고 한다면, 그가 확보하는 지식의 양은 그야말로 보잘것없을 것이고 그 지식의 내용이란 것도 신뢰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엄정한 지적 논증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특정한 논증 방식만을 절대시해선 안 될 뿐 아니라 그 논증의 방식과 과정이 다양하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컨대, 어릴 때 권위자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교육을 받아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라도 장성하면서는 얼마든지 나름대로 다양한 지식과 경험에 근거한 지적 논증의 과정을 거쳐 그 믿음을 심화해 갈 수도 있습니다. 특히 과학과 이성이 주름 잡고 있는 근대식 교육 환경에서 러셀과 같은 교사를 만난다면, 초자연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믿고 초자연적인 계시인 성경을 신뢰하고 사는 그리스도교인 학생이 얼마나 다양한 지적 논증을 거치면서 자기 믿음을 점검해 가야 할까요?

 

둘째 주장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큰 형’으로 비유한 것은 러셀다운 인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지적, 영적 인식의 그릇 크기를 드러내는 비유이지요. 하나님을 창조주나 구세주나 심판주나 아버지(어머니)로 보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피난처, 산성, 요새, 반석, 방패, 목자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도 결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놀랍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그가 논의한 내용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시각이니까요. 그러니까 러셀은 그리스도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 봐야 그저 안전 보장용으로 믿을 뿐이고, 그 혜택이라고 해 봐야 단지 집안에서 ‘큰 형’이란 존재가 동생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다소간의 안전감일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이 서 있던 서구 문명의 기반으로서 무려 2천 년을 연면히 이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폄하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향해 이렇게 종작없는 논의들로 반박한 이 인물의 시각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선 C. S. 루이스의 말을 활용해서 말하자면, 여러 장소와 여러 시대와 여러 사람을 섭렵해 본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위대하다는 사람의 “글과 확성기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허튼소리”(the great cataract of nonsense that pours from the press and the microphone)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그리고 러셀과 같이 영국 출신 수학자인 존 레녹스의 말도 함께 기억해 둡시다. “난센스란 유명한 과학자가 언급한 경우라도, 그것들이 과학의 주장이라고 일반 대중이 추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난센스인 채로 남아 있다.”(Nonsense remains nonsense, even when spoken by famous scientists, even though the general public assumes they are statements of science.) 비록 러셀이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현대의 볼테르’로 불리더라도, 그가 말한 난센스는 난센스일 뿐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