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알기: 지적인 믿음이나 신비한 경험만으로 충분하다?
올해도 벌써 6개월이 다 지나갑니다. 지난 1월 20일에 코로나바이러스 최초 감염자가 확인된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른 세상이 되었는지요. 사회적 거리 두기 덕에 홀로 생각하는 시간도 많았지만, 얼마 전 만 60세를 넘긴 제게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때가 많았습니다. 일찍 교회에 출석하여 주님을 배웠지만, 영적인 성숙의 영역에서 더 진전을 보지 못한 점이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늦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하지요. 영적인 성숙을 도모해 가는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원리가 아닐까 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기. 어떻게 영적 성숙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를 다시 고민하면서 말씀을 상고하던 중, 사도 베드로로부터 두 가지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베드로전서에서 다른 한 가지는 베드로후서에서였습니다.
영적 성숙이 결국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는”(에베소서 4:15) 것이라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면서 당신의 모든 면에서 닮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심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성경적 지식이 뛰어난 이를 만나면 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예수님을 사변적으로 인식하는 데만 신경을 쓴 제 과거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경이로운 영적 체험을 누린 이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러한 신비 체험이 도래하길 기대했던 제 과거도 기억이 났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어떠한 것이며, 당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어떠한 것인지 이참에 한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지적인 믿음 대(對) 하나님 알기-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영생의 의미를 성경은 이렇게 소개해 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요한복음 17:3) 물론 여기서 안다는 말은 지적인 측면만을 가리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안다”는 동사가 “동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마태복음 1:25)만 보아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 동사의 목적어가 인격적인 대상인 이상 지적인 측면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그 앎의 대상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여기서 안다는 것은 계속 성장하는 인격적 경험이라는 의미를 내포할 것입니다. 브루스 밀른이 지적한 대로,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삶입니다(life ‘knowing God’). D. A. 칼슨이 언급한 대로, “‘영생’이란 영구히 사는 삶이라기보다는 영원한 분을 아는 것입니다.”(Eternal life is not so much everlasting life as knowledge of the Everlasting One.)
이 영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위에서 묵상한 구절의 앞 구절(17:2)이 그 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아들이]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even as You gave Him authority over all flesh, that to all whom You have given Him, He may give eternal life.) 물론 이 선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허락하신 것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all whom You have given Him)과 “만민”(all flesh)이 구별됩니다. 만민에 대한 주권을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시지만, 당신께 대한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그 모든 사람이 영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겠지요. 이러한 사실은 이미 요한복음 서두에서 계시되어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There was the true Light which, coming into the world, enlightens every man. He [Jesus Christ} was in the world, and the world was made through Him, and the world did not know Him. He came to His own, and those who were His own did not receive Him. But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even to those who believe in His name,)(요한복음 1:9-12)
예수님께서 바로 이 세상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자기 세상에 와서 보니 자기를 영접하지 않은 자기 백성이 있었던 반면, 자기를 영접하는 자기 백성이 있었습니다. 후자가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이요, 전자가 바로 요한복음 17장에서 언급된 “만민” 중 그 나머지일 것입니다. 전자는 예수님을 무시하거나 배척했지만, 후자는 예수님께서 바로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오,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께 순종했던 것이지요. 결국 영생이란 예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당신을 신뢰하며 당신의 통치에 순종하는 이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성 삼위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며 당신을 인격적으로 누려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성 삼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갈 수 있을까요? 먼저 베드로전서 1:23-2:3을 잠시 묵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23-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for you have been born again not of seed which is perishable but imperishable, that is, 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 For, “ALL FLESH IS LIKE GRASS, AND ALL ITS GLORY LIKE THE FLOWER OF GRASS. THE GRASS WITHERS, AND THE FLOWER FALLS OFF, BUT THE WORD OF THE LORD ENDURES FOREVER.” And this is the word which was preached to you. Therefore, putting aside all malice and all deceit and hypocrisy and envy and all slander, like newborn babies, long for the pure milk of the word, so that by it you may grow in respect to salvation, if you have tasted the kindness of the Lord.)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합니다(1:23, 25절). 이 복음은 살아 있고 세세토록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본문 중 24-25절 상반절(“그러므로 <...> 하였으니”)이 이사야 40:6-8을 인용한 부분이라는 점에 주목해보면, 24절의 “모든 육체”는 풀이나 꽃처럼 순식간에 소멸될 백성들을 의미하고, 그들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40:1-8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유수 생활에서 해방되어 귀국할 것을 예언하는 내용으로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주님이시요, 왕으로서 이 땅에 임하셔서 당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다스리실 것을 동시에 설명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즉 “아름다운 소식”의 핵심임을 이어지는 9-11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 40:9-11)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살아 있고 영원한 복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2:1-2에 의하면, 그 동일한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성숙시켜 간다는 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야말로 “순전한 젖”(the pure milk)으로서 우리를 자라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2의 “신령한”이란 단어의 원어는 'logikon'으로서, 로마서 12:1에 나오는 “영적 예배”라는 표현 중 ‘영적’에 해당하는 원어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새번역에서 사용한 것처럼, “합당한”(reasonable)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말씀('logos')과 관련된 것”이라는 의미도 띱니다. 그래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표현은 NASB처럼 “순전한 말씀의 젖”으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젖’은 고린도전서 3:2이나 히브리서 5:12의 ‘젖’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고린도전서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I gave you milk to drink, not solid food; for you were not yet able to receive it. Indeed, even now you are not yet able,)
(히브리서 5:12)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For though by this time you ought to be teachers, you have need again for someone to teach you the elementary principles of the oracles of God, and you have come to need milk and not solid food.)
베드로전서의 ‘젖’은 ‘밥’이나 ‘단단한 음식’과 대조되는 유아용 음료, 즉 영적인 어린아이에게나 적합한 기본적인 말씀의 원리가 아닙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것이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1:23)으로서, 성도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도록 이끈 “진리”요(1: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매개체입니다(2:2). 그러므로 영적인 성숙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교제하며 당신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3에서 언급된 대로, 말씀을 통해 주님께 나아가 당신과 교제하게 되면, 다시 말씀을 더 사모하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그 교제 중에 “주님의 인자하심”을 맞보게 되어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시편 34:8). 그 말씀이 이제는 “꿀보다 더 단” 대상이 되지요(시편 119:103).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O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How blessed is the man who takes refuge in Him!)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How sweet are Your words to my taste! Yes, sweeter than honey to my mouth!)
이런 경험이 경이로운 점 중 한 가지는, 우리 눈으로 주님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어도 당신의 인자하심을 맛보며 사랑해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인 형제, 자매들이 보여준 본처럼, 지금 당장 당신을 뵙지 못하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새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and though you have not seen Him, you love Him, and though you do not see Him now, but believe in Him, you greatly rejoice with joy inexpressible and full of glory,)
문제는 주님이시오 왕 되신 주님을 신뢰하고 성 삼위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며 당신을 인격적으로 누려가는 과정 대신, 지적인 믿음의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성경을 읽고 피상적인 성경 지식은 쌓아가지만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거나 말씀에 반응하지도 않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기계적으로 자주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는 않는 일방적인 신앙생활이 자리를 잡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가 사해지고 영생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믿는 사변적인 믿음은 있으나, 당신을 인격적으로 믿고 당신의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뒤따르지 않는 신앙생활에만 머무르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말씀을 중심으로 주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어떤 형태를 갖출지는 각자의 처지와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말씀을 읽는 것에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에 반응하면서 주님과 대화하는 기도 과정이 통합되는 형태가 주를 이루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윤종하 선생이 예를 든 대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저는 참 행복합니다. 눈물이 납니다.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나, “하나님, 참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제가 고집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고치겠습니다.” 등의 고백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격식 없이 그때그때마다 우리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기본적인 기도가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겠지요. 아마도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궁금하거나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 질문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테고, 하나님의 분명한 지시에 대해서는 어떻게 실행하겠다든지, 좀 기다려 주시기를 청한다든지, 특별한 도움을 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교제의 과정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 음성 대(對) 성서 기록-
불신자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신다면 믿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하는 말이겠지만, 요는 성경에는 어딘지 모르게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주신 말씀이라고 하고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을 접해도, 그 증거가 미흡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 신자들 가운데도 기록된 성경보다는 직접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봅니다. 성경 속에도 그러한 사례가 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사례를 보면 그 상황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아래의 다니엘, 사도 요한의 경우 참조), 객기를 부리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됩니다.
(다니엘 10:7-8)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요한계시록 1:17) 내[사도 요한]가 볼 때에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그렇지만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신 경우는 희귀할 뿐 아니라, 환상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구약 시대의 모세의 경우에는 특별하게도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애굽기 33:11)라고 되어 있지만, 그의 사후에는 여호수아라도 기록된 말씀을 읽고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2-9)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여호수아처럼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실 때 기록된 성경 말씀을 묵상하시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시면서 순종해 가셨던 것이지요. 성경이 필요 없으실 것 같은 분이셨지만, 철저하게 말씀 중심으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세례 받으신 후 광야에서 40일간 시험받으셨을 때도,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신명기 8:3, 6:16, 6:13). 당시에 신명기 말씀을 활용하셨다는 것은 시험받는 기간 내내 당신의 시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과 연관된 것임을 깨닫고 관계된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공생애 시작도 말씀으로 여시고(누가복음 4:18-19=이사야 61:1-2) 끝도 말씀으로 맺으셨을 만큼(마태복음 27:46=시 22:1),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신8:3)라는 대원리를 평생 실천하며 사신 것이지요.
(누가복음 4:16-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27: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신비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으면 좋겠다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요? 신비로운 이상이나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의 기록보다 더 확실하다고 여기는 성도 말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한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제안을 해보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경험할 수 있는 신비로운 경험의 최고봉은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이런 경험을 제안합니다. 기도를 하는 중에 갑자기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신비한 일들을 계시해주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상황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지요.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을 때,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난데없이 영광에 쌓인 두 사람, 즉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상황이 벌어지지요. 그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별세”였습니다(누가복음 9:31). 이 “별세”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exodos’로서 영어로 출애굽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the Exodus)의 원어입니다. ‘떠남’(departure)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신약의 용례가 두 번만 더 있는데, 히브리서 11:22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을 가리키고 베드로후서 1:15에서는 베드로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여기까지만 보았어도 충분했겠지만 그들은 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 할 때 베드로가 부지불식간에 횡설수설하지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구름이 일어 제자들을 뒤덮습니다. 자기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자 그들은 겁에 질려 버립니다. 바로 그때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9:35)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 세 제자들이 경험한 것보다 더 놀라운 경험을 한 이가 있을까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을 뵙고(나중에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을 뵙고도 죽은 자처럼 되지요-요한계시록 1:17), 모세만 나타나도 엄청날 텐데 엘리야까지 출현한 것을 보고, 이 두 사람이 예수님과 역사적인 구속 사건을 논의하는 장면을 목도할 뿐 아니라 자기도 그분들에게 한 마디 거들기도 하고, 겁에 질릴 만큼 신비로운 구름이 자기를 덮는 경험 말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음성까지도 들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신비로운 경험이나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라면, 그 최고봉을 경험한 인물인 베드로가 자기 서신에 이 경험을 간증한 것에 귀 기울이는 게 지혜이겠지요. 앞에서 언급한 ‘exodos’의 용례 중 한 가지가 포함된 구절 이후에 나눈 내용입니다.
(베드로후서 1:15-21)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exodos’]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we were eyewitnesses of His majesty.)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we have the prophetic word made more sure)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So we have the prophetic word made more sure, to which you do well to pay attention as to a lamp shining in a dark place, until the day dawns and the morning star arises in your hearts.)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먼저 그는 예수님의 권능과 재림에 대해서 자기가 나눈 내용은 교묘하게 꾸며 만든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언급합니다(16절). 그 증거로 댄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확증하는 말씀을 들었다는 점이었습니다(17-18절). 즉 거룩한 산에서 자기와 다른 두 제자들이 체험한 것이었지요. 그다음에 19절을 언급합니다. 아래의 공동번역과 개역개정 본문은 이 구절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각각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공동번역)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개역개정)
먼저 공동번역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의 능력과 재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산에서 사도들이 직접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목격하고, 당신의 존귀와 영광을 확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19절 하반절-새번역)라고 권고하고 있지요. 즉 사도 베드로는 비록 자기가 신비 체험의 최고봉을 누렸으나, 성도들이 그 체험에 주목하기를 바라지 않고 도리어 그 체험으로 인해 더욱 확실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말씀은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다고 언급하면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그 말씀에 주목하는 게 옳다고 언급합니다. “등불”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유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요(시편 119:105-“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날”이나 “샛별”은 어떨까요?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을 의미할 것이고(베드로후서 3:10-“하나님의 날”), “샛별”은 예수님을 상징하겠지요(민수기 24:17-“한 별”, 요한계시록22:16-“광명한 새벽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까지, 갖가지 사설과 혼란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둡기만 한 우리 심령을 비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게 지혜라는 것입니다. 3:1-2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거듭 이런 자세를 강조하면서, 자기가 이 두 번째 편지를 쓰는 이유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들의 예언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명령하신 것을 성도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한편 19절의 개역개정 본문에 따르면, 신비로운 장면을 목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경험보다 ‘더 확실한 것’이 바로 예언, 즉 기록된 성경 말씀이라고 베드로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기록된 성경이 신비로운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일까요? 그 저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선지자들과 사도들(eyewitnesses=현장 목격 증인들)일 뿐 아니라(16절), 성경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21절). 사실상 신비로운 경험이나 하나님의 음성은 자명한 게 아닙니다. 그 신비로운 역사와 음성을 경험한 선지자와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그 뜻을 계시해주기 전까지는 불확실할 뿐이지요.
성 프란체스코(1182-1226)의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중부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직물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는 세속적이고도 천하태평으로 살면서 당대의 플레이보이요 파티광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기사가 되어서 군사적인 영예를 누릴 꿈을 갖고 있던 그는, 1202년에 아시시의 이웃 도시인 페루지아와의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어 1년 동안 수감되는 수모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시기에 병을 얻은 그는 풀려나서 약 1년간 회복기를 거치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여러 가지 꿈과 환상도 보게 되면서 서서히 변화하게 됩니다. 어느 날 그가 아시시 외곽에 있는 산 다미아노에 위치한, 퇴락해 가는 성당에서 기도하는 중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세 번씩이나 하신 말씀을 듣게 되지요. “프란체스코야, 가서 내 집을 수리하여라. 네가 보다시피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Francis, go repair my house, which, as you can see, is falling completely to ruin.) 당시에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자기가 기도하고 있던 그 성당을 보수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가게의 옷감을 가져다 팔아 그 성당을 보수했습니다. 그 성당이 바로 지금도 기도와 피정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산 다미아노 성당입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에서 프란체스코가 들은 예수님 말씀의 진의입니다. “가서 내 집을 수리하여라.” 이 ‘내 집’이 과연 무엇일까요? 과연 프란체스코가 처음에 이해한 대로 산 다미아노 성당이었을까요? 나중에 프란체스코가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고, 그의 제자들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나중에 그나 그 제자들이 새롭게 깨달은 바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내 집’이란 바로 당시의 부패하고 왜곡된 가톨릭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프란체스코의 사례가 주는 교훈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도 그 말씀의 의미는 자명한 게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영감과 조명이 필요한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목격자 된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한 성경 말씀이 그들의 갖가지 신비로운 경험보다 더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더 확실한 예언”에 주목하는 게 지혜로운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인생3막의 일과-
인생3막을 보내며 삶을 마무리하겠다고 돌아온 고국입니다. 2년이 막 지난 시점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졌습니다. 그 이전 이후가 바뀔 것이라는 이 사태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지금까지 전쟁 한번 겪지 않고 편안히 살아온 처지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들 감내하지 못하겠습니까? 에벤에셀(Ebenezer), 즉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Thus far the LORD has helped us.-사무엘상 7:12)라고 고백하며, 여생을 보내겠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샛별 되신 주님께서 임하시기까지 제가 주목해야 할 곳은, 사도 베드로의 권면처럼 당신의 말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겠지요. 최근 들어 제 마음을 적시는 시 한 자락이 있습니다. 신석정 시인의 “들길에 서서”입니다.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듯 /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 젊은 산맥으로 삼고 / 부절히 움직인다는 /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이 / 얼마나 기쁜 일이냐 //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중 1939년에 “문장”에 발표된 이 시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당시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정신세계를 함께 담은”, 시인의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그의 고백이 제 고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는, 거룩한 나의 일과만 수행해 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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