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다오’[the Tao]를 양식으로 삼은 편력 기사,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3)
-“돈키호테”의 애정관-
<전반적인 연인 관계에 관하여>
이 작품 속에는 단편 스토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돈키호테의 편력 기사 모험 여정에 대한 이야기인지 그런 스토리 모음집인지 혼동이 될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중간중간에 끼어듭니다. 그 이야기들은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이 주가 되어 다양한 상황에 처한 연인들의 고뇌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짝사랑, 의처증, 삼각관계, 재물에 근거한 결혼, 부모의 뜻보다 자기 뜻대로 하는 결혼과 연관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상황에 처한 남녀 관계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획기적인 시각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연인 관계에 대한 그의 창의적인 안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청년들의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자 목동 마르셀라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천명하지요. 그녀를 사모하다 한 청년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소스토모는 1218년에 세워진 살라망카 대학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미남이고 인정도 많은 데다 책도 많이 읽어 현명하기로 유명한 그는 천문학이나 점성학에 대한 지식이 많아 자기 아버지와 친구들이 큰 부자가 되도록 도와주었고,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사망하여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상태에 있던 그가 어느 날 목동이 되겠다며 나섰습니다. 그가 사랑하던, 같은 마을에 사는 마르셀라라는 처녀가 부자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은 후에 목동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이 목동의 복장을 하고 그 아가씨 뒤를 쫓아다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셀라는 그 청년 누구도 자기에 대해 조그마한 희망조차 품을 수 없도록 처신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를 쫓아다니다가 환멸을 맛본 청년들이 그렇게 무정하고 냉정한 그녀에 대해 한탄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 그리소스토모도 진정으로 그녀를 연모하고 존경했지만, 그것에 상응하는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상심하여 목숨을 잃게 된 것이지요. 그가 유언으로 남긴 말은 그가 그녀를 처음 보고 사랑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비참한 자기의 삶에 종지부를 찍은 곳에 자기를 묻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례를 진행하던 그의 친구 암브로시오는 온갖 표현을 동원하여 그녀를 원망하고 있다가 돌연 마르셀라가 그곳에 나타나자, “이 산중의 지독한 독사”께서 왜 그 자리에 나타나셨는지 따집니다. 마르셀라는 “저는 저 때문에 온 겁니다.”라고 운을 뗀 후, 그리소스토모의 고뇌와 그의 죽음이 모두 자기 탓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납득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설득하기 위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주장에 주목해 보세요.
(1) 사랑은 자율적 의사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하늘이 나를 아름답게 만드셔서 내가 부탁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나를 사랑하는 상대를 나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은 억측에 불과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사랑은 마음이 움직여야 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내 의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가? 만일 내가 못 생긴 여자로 태어났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해도 되는가?
(2) 거절하는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마치 독사가 독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듯이, 나 역시 아름답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홀로 떨어져 있는 불이나 예리한 칼”과 같다. 가까이 가지 않는 한 해를 입히지 않는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을 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리소스토모도 분명히 거절했지만 단념하지 않고, 내가 미워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절망하였으므로 그의 집념이 그를 죽인 것이다. 아직 누군가를 골라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내게는 없다. 앞으로도 나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더라도 질투나 불운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3) 사랑은 홀로 설 줄 아는 사람의 것이다: 나를 치명적인 뱀이나 야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해되는 나쁜 여자로 치부해 달라. 나를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내게 잘해 주지 말라. 나는 재산이 있으므로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 나는 남에게 속박 받는 것이 싫다. 나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롭게 살고자 산의 고독을 택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증오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산 주위에 있으므로, 오직 “하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즉 태초의 거주지로 향하는 영혼의 발걸음뿐이다.”
즉, 그녀는 모든 연인 관계에서 사랑을 맺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하고, 상대방을 거절하거나 상대방에게 거절당할 수 있다는 현실을 기꺼이 수용해야 하며, 각자가 사랑의 대상 없이도 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들판에서 지내는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 남에게 오해를 사거나 근거 없는 희망을 줄 수 있는 행동을 삼가면서, 대담한 자유를 구가하는 목동 마르셀라는 이 작품 속에서 고결한 연인의 전범으로서 하나의 신화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처럼 사랑의 짝을 만나거나 불운한 관계를 맺는 후속편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이 연설을 마친 후, 하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시원의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이 여운을 남기고 있을 뿐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억압하여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시도나, 거절하는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증오하거나 보복하는 행태나, 사랑하는 연인에게 지나치게 몰입하는 관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온 암흑한 인류 역사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로 남을 싱그럽고 아름다운 메시지만을 선사한 채 그녀는 홀연히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한 사람과의 관계에 관하여>
다음으로는 사랑하는 한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돈키호테의 시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안목은 돈키호테의 영원한 애인인 둘시네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생기는 의문 중 한 가지가 돈키호테의 공주인 둘시네아입니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이며, 돈키호테는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돈키호테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그녀를 사랑한지 12년이나 되지만, 그녀를 바라본 것은 네 번밖에 안 됩니다. 더구나 그녀가 그의 눈길을 의식한 것은 단지 한 번밖에 없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그들 간의 사랑이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게다가 그녀가 글을 쓰거나 읽을 줄도 몰라 돈키호테의 편지를 본 적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전 우주의 여왕으로 마땅한 분”으로 칭송합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을 듣고 있던 산초가 그녀의 아버지 이름[로렌소 코르추엘로]을 듣더니,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녀가 어디의 공주님이거나 지체 높은 귀부인이라고만 추측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초가 아는 둘시네아의 면모는 그런 여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강한 젊은이만큼 몽둥이를 잘 던지고, 씩씩하고 끝내주는 목소리를 가지고 입담도 좋으면서, 장난도 칠 줄 아는 건강미 넘치는 처자였습니다. 그래서 산초가 돈키호테에게 질문합니다. 지금까지 돈키호테가 벌인 전투에서 이룬 승리로 얻은 패자들과 전리품들을 그녀에게 다 보냈는데, 그게 지금 탈곡장에서 탈곡에 열중하고 있을 둘시네아 님에게 무슨 소용이 된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돈키호테가 들려준 이야기 한 자락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시원시원한 부자 과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이런 그녀가 살찌고 작달만한 젊은 평수도사를 사랑하자, 그것을 눈치챈 수도원장이 그 착한 과부에게 나무라듯이 이렇게 말했지요. 그녀같이 미모와 사회적 지위와 재산까지 가진 부인이라면 마치 “배를 고르듯이” 고를 수 있는 교사, 신학생 및 신학자들이 주위에 널려 있는데, 그렇게 키도 작고 천박하고 멍청한 평수도사를 사랑하는 게 놀랍다고. 그러자 그 부인은 활달한 데다 애교스럽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철학을 아세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많이요.”
돈키호테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둘시네아를 사랑하는 것은 “지상의 가장 고귀한 공주로서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시인들이 찬양하는 여성들이 실제적인 인물이 아니라 시의 소재로 쓰기 위해 만들어 낸 인물이듯이, 자기도 그 알돈사 로렌소라는 그 순박한 여자가 둘시네아라는 아름답고 정숙한 귀부인이라고 생각하고 믿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가문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고,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공주라고 간주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자기에게는 그녀가 그럴 만한 자질, 즉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요소인 뛰어난 미모와 좋은 평판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돈키호테는 더도 덜도 말고 자기가 말하는 것들이 모두 실제로 그러하다고 상상하기에, 둘시네아를 미모나 고귀함에 있어서나 자기가 원하는 모습 그대로 상상합니다. “사람들이야 저 좋을 대로 말하라고 하게.”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을 향해 그가 던지는 일갈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돈키호테의 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길을 계시해 주는 고백이었습니다. 돈키호테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평생의 배우자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상황과 직결되는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이라면, 그(녀)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자기가 원하는 바로 그 아름다움과 고귀함임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하다고 지속적으로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어느 날 자기 마음속에 들어온 그(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녀)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고귀함이야말로 이 세상 다른 모든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아름다움이요 고귀함인 것이지요. 그렇게 간주하고 상상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자기기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돈키호테가 언급한 그 무명의 부자 과부가 던지는 도전 한 마디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분이 제가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마음이 착한 것을 아세요? 룻보다 더 많이요.”, “그분이 제가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기쁨이 충만한 것을 아세요? 다윗보다 더 많이요.”, “그분이 제가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세요? 사도 바울보다 더 많이요.”, “그분이 제가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지혜로운 것을 아세요? 솔로몬보다 더 많이요.”
아름다움과 고귀함의 본질은 내적인 것이자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사람에게나 그저 쉽사리 눈에 띄는 것이 아닙니다. 앞 단락에서 제가 상상이라고 지적한 능력, 즉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이고도 인격적인 면모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돈키호테의 영원한 연인 둘시네아는 예쁜 척하기는커녕 몽둥이를 잘 다룰 만큼 힘이 세고, 아무하고나 장난치고, 입담도 좋고, 목소리도 크고, 가슴에 털이 난 여인이었으나, 예의가 아주 바르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모든 곤경에서 구해 줄 있을 만큼 헌신적인 면모를 지난 여성이었습니다. 돈키호테는 그런 그녀에게서 이 세상에서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전 우주의 여왕으로 마땅한 분’으로서의 면모를 포착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밤의 빛, 내 고통의 영광, 내 길의 지표, 내 운명의 별”이라고 칭송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외모나 외적인 면모에만 눈길을 둔 채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무지하고 비열한 자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나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
-자녀에 대한 교훈-
‘녹색 외투 신사’인 돈 디에고가 돈키호테를 만나 대화하던 중 자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에게 18세쯤 된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자기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하지요. 그 아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것만큼 좋은 아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6년 동안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운 후에 자기가 법학이나 신학과 같은 학문을 배우라고 했을 때 그는 이미 시학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호메로스가 제대로 썼는지를 살피거나, 베르길리우스의 시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것들을 헤아리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탄합니다. 그가 하는 대화는 오로지 이런 시인들과 호라티우스나 유베날리스와 같은 작가의 책들과 나누는 것뿐이며, 현대의 로망스어로 글 쓰는 작가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돈키호테가 한 마디 합니다. 우선 자식이란 “부모 내장의 토막들”이라서 그 아이가 착하든 나쁘든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어릴 때부터 덕과 교양과 바람직한 기독교적 습관을 쌓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그들에게 어느 특정 학문을 하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언급합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를 타고 난 아이라면, 그 아이 “마음이 가장 기우는 그런 학문”을 하도록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지요. 비록 그의 아들 돈 로렌소가 심취해 있는 시학이 실용성이 없고 감성으로 즐기는 학문이긴 하지만, 결코 불명예스러운 학문은 아니라고 하면서 시의 독특성과 시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해 덧붙입니다. 즉 시라는 것은 다른 학문들의 도움을 받지만 그 학문들의 권위를 세워 주는 독특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면서, 시는 그 속에 감춰진 보물을 깨닫지도, 존중할 줄도 모르는 무지한 속인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지요. 그 대신 훌륭한 자질을 갖춘 자가 시를 다루게 되면 그의 이름은 모든 선진국에서 존경받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자질은 천부적인 것이어서 기교의 도움까지 더해진다면 천성에 기교가 섞인 완전한 시인이 탄생할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더구나 돈 로렌소는 훌륭한 학생인데다가 “어학이라는 학문의 첫 계단을 행복하게 올라섰으니 그 어학으로써 스스로 인문학의 정상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펜은 영혼의 혀”이므로, 그가 만일 청결한 삶을 영위하고 정결한 생각을 품어 간다면 그의 시도 그러한 품격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장차 국왕의 눈에 띄게 되어 월계관을 쓰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합니다.
자기 자녀가 자기가 바라는 것만큼 좋은 아이가 아니라서 차라리 그 아이가 없었으면 좋았겠다고 여기는 부모들에게 뼈아픈 일침이 될 것입니다. 자녀를 자기 영혼처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어릴 때부터 올바른 인성을 갖추도록 덕과 교양과 신앙 습관을 충실히 훈련하는 일을 등한히 한 부모는 적지 않겠지요. 결코 의도적이지는 않았겠지만, 분주한 일상생활 속에서 자녀 훈육이란 영역이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일’로 여겨졌기에 그 훈육의 시기를 놓친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계의 문제만 아니라면 자녀가 마음이 기우는 대로 학문과 직업을 선택하도록 허락하라는 조언도 고언(苦言)이 되리라 믿습니다. 부모의 욕심과 불안이 자녀의 장래를 좌지우지하거나 가로막는 경우를 하도 많이 접해 본 터라, 자녀 교육 문제에 있어 이것보다 더 적실한 조언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자기가 성취하지 못한 야망을 자녀에게 부담지우는 경우나 오직 경제적인 유불리만 따져 자녀의 장래를 쥐락펴락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으니까요. 법학이 인기 있는 것이나 시인이라는 직업이 인기가 없는 것을 한번 보세요. 요즘이나 세르반테스 시대나 조금도 다를 게 없지요.
정규직 숫자가 점점 적어지는 한편 불안정하긴 하지만 유연하기도 한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는 현 시점에서 일류 대학, 인기 학과에만 연연하는 것은 부모나 자녀들에게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의 인성 교육은 등한시하고 그 적성 개발도 무시한 채, 부모의 욕심과 불안에만 기대어 부모가 결정하여 밀어붙인 자녀의 장래마저 그 성취가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좋은 정규직 자리를 얻는 게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할 뿐 아니라, 급료 많이 주는 대신 ‘저녁 있는 삶’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흔하지요. 그렇다면 인생의 황금기인 학창 시절을 다 바쳐 그런 정규직을 얻은 혜택이라고는 일정 기간 동안 보장되는 경제적인 수입 밖에는 없는 셈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수입마저도 누릴 시간적 여유조차 없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키호테가 제안하는 길은 어떨까요? 우선은 생계 문제입니다. 돈 로렌소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생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예외적이긴 하겠지만, 생계를 마련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입니다. 이 문제도 해결하기 힘든 경우가 존재하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생계만 해결하면 되냐?”라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그다음 문제인 각자의 가치관이 작용하는 영역들입니다. 예컨대 어떤 주거 환경에서,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옷을 입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영역 말입니다. 이런 영역들은 미니멀리즘에 입각해서 처리하고, 삶의 초점을 자기 ‘마음이 가장 기우는 일’, 즉 자기의 소명을 실행하는 일에 두고 살아가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가치관의 문제라는 의미입니다. 어릴 때부터 올바른 덕성을 훈육 받고 바람직한 가치관 교육을 받은 자녀라면, 자기의 은사와 재능을 가장 가치 있게 꽃 피울 소명의 길을 모색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 혹은 ‘세상의 눈으로 본 가치나 중요성’이라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살면 사회적으로 천시 받거나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데도 천시하는 눈길을 과연 조금이라도 의식할 가치가 있을까요? 게다가 돈키호테는 시인의 길을 걷겠다는 돈 로렌소에게 국왕이 수여하는 월계관을 쓰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과연 시인만 월계관을 누리게 되겠습니까? 순수한 마음으로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을 건 이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명예를 누릴 날이 올 것입니다. 성경 잠언에는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He who loves purity of heart And whose speech is gracious, the king is his friend. <잠언 22:11>)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최고 권력자가 자기를 벗으로 반기고 가까이 두는 것보다 더 큰 명예가 있을까요?
-신학자이자 시성(詩聖)인 시종 산초-
산초 판사가 없는 돈키호테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는 도무지 대체할 수 없는 조연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 캐릭터입니다. 다아시가 없는 “오만과 편견”, 짐이 없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놀린이 없는 “노인과 바다”, 조 가저리가 없는 “위대한 유산”을 상상하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돈키호테의 두 번째 편력 여정부터 동참하기 시작하여 그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함께 한 충성스러운 시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늘 함께하는 기분 좋은 동반자”였습니다. 돈키호테가 “내게 도시 하나를 얹어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친구를 다른 종자와 바꾸지 않겠다”는 고백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처음으로 산초가 소개되는 장면에서 그는 착하지만 머리가 다소 모자라는 농부로 묘사됩니다. 돈키호테가 모험을 하는 중에 적어도 섬 하나쯤은 얻게 될 텐데, 산초가 그 섬을 다스리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주효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갈수록 드러나는 산초의 지식과 기지와 익살에 돈키호테는 혀를 내두를 정도가 되지요. 더구나 다른 여느 기사의 종자와는 달리 그는 돈키호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토를 답니다. 돈키호테는 자기가 죽기 전에 산초가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기를 간구한다고 했다가 자기가 산초보다 먼저 죽을 테니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산초는 거침없이 자기가 들은 정보를 나눕니다. 죽음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다. 죽음이란 아줌마는 애교보다 힘이 더 막강해서, 뭘 먹어도 속이 불편하지 않고,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로 자기 자루를 가득 채운다. 풀을 베는 사람인 죽음은 낮잠도 자지 않은 채, 마른 풀이나 싱싱한 풀이나 모두 베어 버리고,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은 모두 통째로 삼켜 버린다. 걸신쟁이인 죽음은 배가 없는데도 산 것들의 목숨만을 마시는 데 갈급해서 이미 속이 다 차 있는데도 계속 목말라한다. 이 언설을 들은 돈키호테는 산초가 설교대 하나만 있으면 그런 소리를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하느님보다 도마뱀을 더 두려워하는 자네가 어째서 그렇게도 아는 게 많은가 하는 것”이라면서 한탄합니다. 그러자 산초가 결정타를 날리지요. “모두가 이웃의 자식이듯이 저는 하느님의 자식으로 하느님을 참으로 경외하니까” 돈키호테는 남 판단하는 일에는 참견하지 말고 기사도에 대한 일이나 판단하시라고.
산초는 곳곳에서 자기의 속담 지식을 뽐내고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편력 기사 여행 전부터 그런 실력을 날렸나 봅니다. 그의 부인인 테레사가 딸에게 산초를 가리키면서 "네 아버지이자 속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 훌륭한 아버지“라고 표현할 정도이니까요. 그것들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느릅나무에서 배를 따다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요.” / “너를 무척 사랑하는 자 너를 울게 한다” / “착한 사람들에게 간청하기보다 덤불 뛰어넘는 게 낫다” / “죽은 사람은 무덤으로, 산 사람은 빵으로” / “누구에게 태어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풀을 먹느냐가 중요하다” / “네게 송아지를 주거든 고삐를 잡고 달려라.” / “복이 오면 네 집에 들여 놓아라.” / “개미에게 날개가 난 것은 그의 불행.” [=날개가 나서 공중으로 나는 바람에 새들에게 잡아먹힌다는 뜻] 문제는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고 마구 속담을 읊어대는 통에 돈키호테의 핀잔을 수도 없이 듣지요.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만 잘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주제가 나오더라도 자기의 뜻을 한 마디 보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잠에 대한 산초의 찬사를 보면 꼭 시인 같은 면모를 보여 줍니다. “잠을 발명한 자 복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잠은 인간의 모든 근심을 덮어 주는 외투이며, 배고픔을 없애 주는 맛있는 음식이고, 갈증을 쫓아내는 물이며, 추위를 데워 주는 불이자, 더위를 식혀 주는 차가움으로,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엇이든 살 수 있도록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돈이자, 목동을 왕과 똑같이 만들어 주고 바보를 똑똑한 자와 똑같게 만드는 저울이며 추랍니다. 잠이 가지고 있는 단 한 가지 흠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건대 죽음과 닮았다는 겁니다요. 잠든 자와 죽은 자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거든요.”
키테리아와 바실리오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산초는 영락없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입니다. “하느님은 상처를 주시기도 하지만 약도 주시니까요. / 어느 누구도 앞으로 올 일은 모르는 법입니다요. / 나는 비가 오면서 동시에 해가 비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요. / 운명의 수레바퀴에 못을 박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있을까요? 분명 없습죠. / 여자의 ‘예’와 ‘아니오’ 사이에는 바늘도 못 들어갈 겁니다요. 너무 좁아 들어갈 자리가 없다니까요. /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랑은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것이라서 구리를 금으로, 가난을 부로, 눈곱을 진주로 보이게 한답니다요.” 산초가 공작이 파견한 ‘바라타리아’ 섬에서 성공적인 통치자로 데뷔한 것을 보면서,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이상 국가란 “철학자가 통치하거나 혹은 통치자가 철학을 배워 통치하는 국가”라고 주장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주민들이 갖고 온 논쟁 거리들을 말끔하게 처리하자,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며 자기네 통치자를 새로운 솔로몬이라고 생각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사례들은 일회성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 섬에서 머문 짧은 기간 동안 그가 제정한 법률들이 그 이후 내내 “위대한 통치자 산초 판사의 법령”이라고 불리며 준수된 것을 주목해 보세요.
산초는 인생관도 분명합니다. 인간은 모두 제 운수 혹은 하느님 뜻으로 죽고 산다고 믿는 그는, 맨몸으로 태어났고 여전히 맨몸이므로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다고 술회합니다. 비록 자기 이야기가 출간되어 온 세상에 알려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대겠지만, 자기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 것임을 확고하게 밝힙니다. 자기는 “산초로 태어났으니 산초로 죽을 생각”이고, 그 어떤 명예도 갈구하지 않으며 오직 “편력 기사를 섬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충실한 종자라는 명예를 얻는 것”으로 만족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그토록 그리던 섬의 통치자가 되는 기회를 누려보았지만, 자기 그릇에 맞지 않은 과업임을 체험한 터라 이 고백에는 힘이 실려 있습니다.
편력 기사 여정을 진행해 가는 동안 산초는 주인인 돈키호테와 자기를 만나게 한 운명을 저주하면서 수염을 쥐어뜯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주인을 섬긴 데 대한 임금이나 약속한 섬의 통치자가 될 기회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죽도록 맞기도 했고 어떤 때는 담요로 헹가래 쳐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왜 그가 매번 마음을 고쳐 먹고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돈키호테와 동행했을까요?
우선은 시일이 흘러갈수록 모험을 찾아 나서는 편력 기사의 시종이 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즐거운 일이 없다는 것을 그가 스스로 절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거리도 많았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돕고 섬기는 보람과 스릴을 만끽할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여정 초기에는 돈키호테의 편력 기사 사역이 죄다 망상이며 어리석고 정신 나간 일로만 생각한 적도 많았지만, 함께 더불어 동행하는 경험이 지속될수록 돈키호테의 언행이 산초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자주 읊조린 속담이 구현되는 순간이었지요. “누구에게 태어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풀을 먹느냐가 중요하다.” 돈키호테가 보여준 신중한 지행합일의 자세가 얼마간 산초에게 옮겨 붙기 시작하여, 그와의 대화가 산초의 “바짝 메마른 불모의 기지라는 땅에 뿌린 거름”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축복받을 만한 결실을 기대하게 되었지요. 돈키호테가 삶을 통해 실행한 훌륭한 가르침이 자기의 풍성한 분별력을 낳게 되었다는 것을 산초가 결국엔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학사 삼손 카라스코가 오랫동안 관찰하며 내린 결론처럼, 산초야말로 “우리 세기 최고로 숭고한 바보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돈키호테와 산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주인과 하인으로서 만난 그런 두 미치광이”로 장구한 문학 역사 속에 하나의 신화로 남게 되었습니다.
-천우신조로 탄생한 “돈키호테”-
다른 소설도 그런 경우가 잦지만 특히 “돈키호테” 속에는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 역사와 함께 호흡했던 작가 세르반테스가 직접 경험한 고난과 역경의 기록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은 유럽인들이 “그 행복하기 그지없는 싸움”이라고 일컬은 레판토 해전(1571)에서 그는 공교롭게도 왼팔에 결정적인 총탄을 맞습니다. 함께 복무했던 동생 로드리고와 함께 1575년에 귀국하던 중 스페인 해안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회교도 해적의 습격을 받아 알제로 끌려가 5년 동안이나 갤리선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역정이 렐라 소라이다와 함께 객줏집으로 찾아온 루이 페레스라는 포로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1권 제39-42장).
엄청난 몸값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가족들의 도움으로 동생만 먼저 본국으로 보내고 자기는 포로로 남아 있던 중, 세르반테스는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죄다 실패하여 태형 2천 대를 맞을 뻔한 상황에서 가까스로 구조됩니다. 작품 중에서 소라이다로 소개된 아히 무라트의 딸 자아라의 두 번째 남편인 하산 바하(Hassan Baha) 왕의 사면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580년에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도착한 수사 후안 힐(Juan Gil)과 안토니오 데 라 베야(Antonio de la Vella)가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로 귀국하는 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세르반테스 가족들이 준비한 3백 두카도보다 터키인들이 2백 두카도를 더 요구하는 바람에, 후안 수사가 그곳의 기독교 상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간신히 그 몸값을 마련하여 그의 갤리선이 출발하기 직전에 그의 신병을 인도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를 구조하지 못했다면 그는 하산 바하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배에서 계속해서 노 젓는 노예로 살아야 했을 것이고, “인류의 성서”라고 불리는 “돈키호테”의 탄생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르반테스가 해적선의 노예로서 겪은 역경은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도현신 작가에 의하면, 유럽인들이 ‘바르바리’(Barbary) 해적이라 불렀던 북아프리카의 회교도 해적들은 1512년부터 활동을 개시하던 중, 1518년에 해적 두목이 된 히지르(Hizir)가 오스만 튀르크제국과 연합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으로 떠오릅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제9대 술탄인 셀림 1세가 그 해적단을 자기 제국의 정규 해군에 편입시키면서, 오스만의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병사 2천 명도 거느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끊임없는 노략질과 주민 납치를 보다 못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즉 카를로스 1세]가 교황청, 제노바, 베네치아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해서 대항했지만, 1538년 9월 28일에 그리스 서북부의 프레베자 해전에서 참패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때부터 1571년 레판토 해전이 벌어지기까지 30여 년간을 그 해적단이 지중해를 휘젓고 다니게 되었지요. 포르투갈과 스페인부터 시작하여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덴마크와 스웨덴과 노르웨이까지 진출하여 살육과 약탈과 납치를 일삼았습니다. 그야말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대리인으로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숨통을 압박했던 것이지요. 이 바르바리 해적단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530년부터 1780년까지 이들에게 납치된 유럽인만 무려 125만 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찬란한 문예 부흥의 시대로 선전되는 르네상스와 절대왕정 시대를 통과하던 유럽인들이 사실상 회교도 해적단의 습격으로 인해 공포에 떠는 상태에서 일상을 영위했던 것이지요.
그 해적단에 끌려간 유럽인들의 형편은 어떠했을까요?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먼저 북아프리카로 가는 동안 수많은 포로들이 물과 음식의 부족으로 굶어죽었고, 누추한 환경에 내내 노출되어 전염병에도 취약했습니다. 겨우 살아 남아 북아프리카에 도착했어도, 그들은 감옥에 수감되어야 했기 때문에 사정이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해적 활동의 절정기인 16-17세기에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의 감옥에는 무려 3만 5천 명이나 되는 유럽인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포로들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그 해적단은 더 많은 노예들을 납치하는 일에 열성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포로들의 희망이라고는 가족들이나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귀국하거나 탈출하는 것밖에는 없었으니,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을까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더 묵상해야 할 내용은, 이 해적단이 형성되도록 부추긴 장본인이 바로 서구 유럽인이었다는 점입니다. 1469년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이사벨라 1세[카스티야]와 페르난도 2세[아라곤]의 결혼으로 통일 국가가 형성됩니다. 반도 남부에 있던 회교국인 그라나다 에미르국(Emirate of Granada)은 카스티야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며 버텨왔지만, 1492년에 통일국인 에스파냐 왕국에 의해 합병되고 맙니다. 그라나다의 멸망은 명실상부한 ‘레콩키스타’(Reconquista=재정복)의 종료를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레콩키스타란 그리스도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회교 세력을 몰아내고 반도를 다시 하느님의 땅으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711년에 후기 우마이야 칼리프조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이후에, 718년에 서고트 왕족이 반도 북부에 아스투리아스라는 소왕국{카스티야 왕국이 됨]을 세운 것이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회교 세력을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벌이던 중에, 바스크인들이 세운 팜플로나 왕국[나바라 왕국이 됨], 친 프랑스 성향의 카탈루냐 공국 및 아라곤 왕국이 터를 잡게 되어 서로 이 일에 힘을 합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후기 우마이야조가 멸망(1031)한 후 새로 발흥한 무와히둔 칼리프조(1130-1269)의 군대를 궤멸했습니다(1212). 이 무와히둔조가 북아프리카로 철수한 것이 레콩키스타의 종료를 의미하는 사건이었지요. 그렇지만 명실상부한 레콩키스타의 마감은 1492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많은 회교도들이 북아프리카로 도주했지만,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원한 회교도들은 겉으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속으로는 회교 신앙을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무어인들[=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던 사람들]이 “돈키호테” 속에도 소개된 ‘모리스코’(morisco)라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산초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추방당했던 리코테가 바로 모리스코 중 한 명이었고, 나중에 갤리선을 타고 온 자기 딸 안나 펠릭스와 재회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에스파냐 왕실은 자국 내에 거주하던 회교도들이 국가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들로 보고, 그들을 추방하는 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자신들을 추방한 에스파냐와 기독교도들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던 회교도 난민들은, 오스만 튀르크 출신의 오르크(Oruc)와 히지르라는 해적 형제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에 정착합니다. 이들의 지도하에 회교도 난민들이 배와 항구를 만들고 항해술을 익히기 시작하여, 급기야 유럽 기독교도들에게 복수를 가하고 삶에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해 해적질에 나서게 된 것이지요.
“돈키호테 2권”의 서문에서 세르반테스는 신상 발언을 한 가지 합니다. 위작인 “돈키호테 제2편”을 집필해서 출간하고는 뻔뻔스럽게도 원작자인 세르반테스를 늙은이에다가 한쪽 팔이 불구라고 비난한 사기꾼 작가에게 밝힌 내용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르반테스는 자랑스러운 레판토 해전에서 총상을 입은 통에 평생 왼손을 쓰지 못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만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여 지금이라도 다시 선택하라고 제게 제안한다면, 저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지금 상처 없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제 방식에 따라 그 경이로운 전투에 참가하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군인이 얼굴이나 가슴에 받은 상처는 다른 사람들을 명예의 하늘로 인도하고 마땅한 칭찬을 바라는 자를 안내하는 별입니다. 그리고 알아 둬야 할 일은, 글은 백발로 쓰는 게 아니고 분별력으로 쓰는 것이며, 분별력은 나이가 들수록 더 나아지곤 한다는 것입니다.” 상처 없는 맥 빠진 삶보다 상처 투성이의 명예로운 삶을 치열하게 지향했기에, 그는 고통 가운데 처한 인간 존재의 모든 층위를 아우르면서도 하나님의 선물인 삶을 긍정하고 포용하는 성화된 분별력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에게서 희대의 고귀한 편력 기사 돈키호테가 탄생한 것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every good tree bears good fruit<마태복음 7:17>)과 같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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