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배제, 폭력의 문화를 돌파한 ‘습지 소녀’의 송가,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3)
-습지에서의 인간 승리-
가족의 버림과 지역 사회의 혐오와 배제를 극복하고 ‘습지 전문가’로 거듭난 카야는 비범한 인물입니다. 어릴 때 자기를 ‘꼬마 돼지’ (little piggy)나 심지어 ‘닭똥’(chicken shits)이나 ‘닭똥 덩어리’(a bunch of chicken shits)같다고 생각하고, 아버지는 ‘똥돼지 젖꼭지만큼도 쓸모없는 것’(useless as tits on a boar hog)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카야는 자기 길을 개척하여 자기 은사를 찬란하게 꽃피웠습니다. 지극히 열악한 환경을 돌파하고 자신의 세계를 확립한 카야의 삶 속에서 3가지를 주목하게 됩니다.
곁을 지켜 준 습지 생태계. 습지는 카야의 엄마이자 가족이었습니다. 격리가 자기 인생이었던 카야를 “자연이 기르고 가르치고 보호해주었습니다.”(Nature had nurtured, tutored, and protected her.) 학교 간 첫날 버스 안에서 친구들이 던진 모욕스런 말을 듣고 버스에서 내린 카야는 집까지(5킬로미터) 걸어갔다가 바다로 나가 자기 절친이던 갈매기들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먹지 않고 싸 가지고 온 파이 껍질과 롤빵을 던져주며 같이 놉니다. 그것들이 다 떨어지자 갈매기들마저 자기를 버리고 떠날까 봐 격심한 무서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그녀 주위에 쪼그리고 앉아 회색 날개를 쫙 펼치고 몸단장을 했습니다.” 갈매기는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카야에게 유일한 말동무가 되어주었습니다. 카야는 단 하루만 학교 문턱을 넘었고, 다시는 그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조가비를 모으고 왜가리를 관찰하는 생활만으로 배움이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카야가 아는 것은 거의 대부분 야생에서 배웠고, 그녀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습니다.”(whenever she stumbled, it was the land that caught her.) 카야에게만 습지와 같은 자연 생태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몸이라는 요소를 자연과 공유하는 인간에겐 자연 생태계와 벗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고 필수적입니다.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과 격리된 카야와는 정반대로 자연과 격리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카야의 격리는 주민들의 혐오와 배제에 의한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현대인들의 격리는 자연에 대한 무관심과 인공적인 것들에 대한 자발적인 탐닉이나 중독에 의한 것입니다. 이 탐닉과 중독의 삶을 돌파하고 자연과 벗하며 살아야 합니다.
접속된 인간관계. 자기를 실망시키고 떠난 이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카야에게 조디가 가르쳐 준 교훈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남자만 여자를 떠나는 게 아니라 그 역도 사실이기에 사랑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실패한 사랑을 통해 얻는 인간관계(the connections)는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정 폭군인 아버지도 결국엔 카야를 떠났지만, 그가 카야에게 연결해 주고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흑인 점핑입니다. 카야가 점핑이 죽은 후에 그 아내 메이블에게 고백한 대로, 카야의 진정한 아버지는 점핑이었습니다. 돈을 마련할 길이 없던 어린 카야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생활에 필요한 자원들을 지혜롭게 공급해 준 카야의 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카야가 체이스에게 폭행당한 것을 고백한 사람은 점핑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폭행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떠나버린 엄마와 오빠 조디가 일찌감치 카야에게 연결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카야의 남편이 된 테이트입니다. 자원해서 카야에게 글과 산수를 가르쳐주고 그녀가 독학할 수 있도록 단계별로 필요한 교과서와 참고서적들을 부지런히 공급해 준 친구이자 동료의 역할을 탁월하게 감당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습지 전문가, 작가 카야는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71세의 변호사 톰 밀턴이 자원해서 카야를 변호해 주겠다고 나선 것은 이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신비로운 연결 고리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그 변호사 한 사람이 그야말로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 속의 배심원 12명의 역할을 톡톡히 해냄으로써 카야는 살인자의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카야를 버렸어도, 결국 카야를 구원해 준 것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접속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를 버린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우리와 연결된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그 관계를 소중히 발전시켜가야 합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대한 갈망. 카야가 어학 교재로 처음 읽은 책인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의 “모래 군의 열두 달”(A Sand County Almanac)에서 그녀의 눈길을 끈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야생의 존재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There are some who can live without wild things, and some who cannot.”) 당연히 카야는 후자에 속하겠지요. 모두가 자기를 떠나버린 상황 속에서 자기 곁을 지켜준 습지와 동물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도무지 살아갈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겠지요. 테이트에게서 단어 읽는 법을 배울 때, 카야에게는 그 단어들이 살아 움직이는 기러기(geese)와 학들(cranes)을 노래하고 있다는 감흥을 느꼈습니다. “기러기의 노래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What if there be no more goose music?) 카야가 느낀 이런 감흥들이 나중에 어맨다 해밀턴의 시로 승화되었을 것입니다. 외로움이 엄습할 때마다, 그리고 삶의 위기를 접할 때마다 읊조리던 어맨다 해밀턴의 시라는 영적 독백이 없었다면, 카야의 영혼은 일찌감치 쇠락했을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나아갈 길을 분별하여 발걸음을 내딛는데 시적 언어로 조탁한 싱그러운 상상력이 카야에게 크낙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책 제목도 카야 엄마가 카야에게 항상 습지를 탐험해 보라고 독려할 때 들려준 시적 표현이었지요.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Go as far as you can—way out yonder where the crawdads sing.) 이 표현의 의미를 묻는 카야에게 테이트가 던진 답은, “그냥 저 숲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Just means far in the bush where critters are wild, still behaving like critters.)였습니다. 그렇지만 소설 마지막 문단은 그 이상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테이트가 체이스의 조가비 목걸이를 해변의 파도에 실려 보낸 후 판잣집 근처 호소에서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 자기를 손짓해 부르는 것을 목격하지요. 습지의 후미진 머나먼 곳,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으로 오라고. 카야가 그곳에 이미 당도해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요. 그곳은 이 세상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노래하며 즐기는 우리 모두의 참된 본향,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참혹한 현실을 돌파하려면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쉼 쉬는 이 영원한 본향에 대한 갈망을 붙들고 지속해 가야 합니다.
혐오와 배제가 판치는 열악한 현실을 돌파하면서 찬란한 삶을 꽃피우는 카야를 보면서 떠오른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아주 흐린 날의 기억”입니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단 두 줄로 형성된 이 시는 카야의 현실이자, 우리의 현실을 열어 밝히면서 우리의 반응을 촉구합니다. 이 땅은 죽음이 예견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죽음은 피할 길이 없지요. 땅만 바라보는 이의 운명입니다. 이 죽음의 현실을 망각하거나 거부하려고 특정 대상을 속죄양 삼아 그토록 혐오하고 배제하다가 폭력까지 행사하며 살아갑니다. 죽음 가까이 있는 자들을 피해 아무리 멀리 가서 살아도 그곳 역시 땅입니다. 이 땅의 숙명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높이 쌓아 올라가도 그곳 역시 땅입니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는 시도들이 이 땅을 더욱 무덤으로 만듭니다. 한두 명이 하는 짓이 아닙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를 많이 가진 진회색(‘아주 흐린’) 인간 무리의 전매특허이지요. 하나같이 하는 일이라곤 이 땅을 무덤으로 덮는 일뿐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나도 무덤행입니다. 내 위에 혐오와 배제와 폭력으로 짠 관 뚜껑을 덮더라도, 그 뚜껑을 거부하고 밀어내야 합니다. 이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카야도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힘을 기반으로 주위의 안전지대를 찾고 구하는 대신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를 추구해야 합니다. 진회색 인간들의 건물 꼭대기를 선망하는 대신 그 너머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해야 합니다.
-카야의 살인에 대한 이해-
카야는 모살(謀殺, first-degree murder), 즉 미리 계획된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받았습니다. 유죄가 확정되면 사형 아니면 종신형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유죄 평결이 날 가능성이 농후해서 카야의 변호인이 카야에게 양형 거래(plea bargain) 가능성을 타진해 보지요. 10년 정도 선고를 받고 난 후에, 7년 정도 후에 석방되는 거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카야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그런 것을 시도할 의향이 없으며, 오로지 자기는 무죄라고 주장한다고 밝힌 것입니다. 조마조마한 논의 과정을 거쳐 배심원단은 카야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증거 불충분으로 카야의 살인 행위 혐의에 합리적인 의심이 발생하여 배심원의 무죄 평결을 받은 셈이지요. 과연 카야는 무죄일까요?
모살 대 정당방위(Self-defense). 독자인 우리는 카야가 체이스를 살인했다는 것을 압니다. 카야의 분신인 어맨다 해밀턴의 시가 체이스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고,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조가비 목걸이를 카야가 숨겨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살 행위가 발생했지만, 배심원의 평결로 무죄로 된 경우일까요?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카야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성립하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계획했을 뿐 아니라, 살인 현장을 용의주도하게 처리하여 증거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실정법상으로 모살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정황입니다. 그렇지만 성욕을 채우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면서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체이스라는 치한에 대한 정당방위였다고 볼 여지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영미법상으로 정당방위가 적용되려면, 자신의 “생명의 위협(또는 심각한 신체적 상해의 위협)이 닥쳤을 때”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정당방위 권리는 “불가피한 경우에만 시작되고 불가피한 지점까지만 연장됩니다.”(The right begins only when the necessity is present, and extends only as far as the necessity.) 즉 그러한 심각한 위협이 불법적(unlawful)이고 바로 당면한(immediate) 것일 뿐 아니라, 피고가 자신이 절박한 위험(imminent peril)에 처해 있기에 자기 반응이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구하기 위해 불가피한(necessary) 것이었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불가피성 때문에 예방적 방위(preventive defence)를 목적으로 가해자를 공격할 권리(a right for attacking)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다만 “법의 도움을 기다리다가는 분명하고 즉각적인 고통(certain and immmediate suffering)을 겪을 수 있는 예기치 못한 폭력적인 사건(sudden and violent cases)”은 예외로 합니다.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카야와 체이스의 관계를 복기하면서, 카야가 정당방위의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에 주목해 보세요. 원래 바람둥이로 자자했던 체이스는 혼인을 빙자하여 카야를 설복시켜 침대로 끌어들인 치한이었습니다. 온갖 달콤한 거짓말과 허망한 약속으로 카야를 현혹하여 자기 성적 욕망을 다 채우면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서슴없이 카야에 대해 인격적으로 모독이 되는 발언들을 내뱉던 불한당이었지요. 결혼한 후 카야를 다시 만난 체이스는 강간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그녀 얼굴과 신체 여러 부위에 심각한 폭행을 자행했습니다.
“그러자 체이스가 오른손 주먹으로 카야의 얼굴을 강타했다. 메스껍게 뭔가 펑, 터지는 소리가 카야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목이 뒤로 꺾어고 몸이 그대로 뒤로 나자빠져 쓰러졌다. 엄마를 때리던 아버지와 똑같아. (...) 쿵쿵 울리는 카야의 얼굴을 흙바닥에 처박고 카야의 배 밑으로 손을 넣어 골반을 치켜들면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번에는 절대 안 놔줘. 좋든 싫든 넌 내 거야.”
이때 당한 폭행의 결과로 카야는 이전에 엄마가 아버지에게 당했던 때과 같이 “괴물과 같은 몰골”(monstrous)이 됩니다. 더구나 카야를 대변해 주고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체이스는 그 이후에도 그녀를 찾아 “최후의 한 방을 날려”(to have the last punch)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기”(be taught a lesson) 위해 “흉측하게 인상을 쓴 채”(face in an ugly scowl) 습지를 뒤집고 다닙니다. “체이스가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Chase would not let this go)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카야는 어디를 가나 ‘당장이라도’(at any second) 체이스가 덮쳐올 수 있을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미칠 것 같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주먹이 날아올까 걱정하며 사는 삶”(a life wondering when and where the next fist will fall)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 외톨이로 사는 것과 두려움에 떨며 사는 건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Being isolated was one thing; living in fear, quite another.) 그러면서 카야는 휘몰아치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 파도 아래 깊이 가라앉는 자살을 상상합니다. 그때 어맨다 해밀턴의 시구 하나를 떠올리지요. “죽을 때를 누가 결정한단 말인가?”
체이스가 카야에게 가한 심각한 신체적 상해는 불법적이고 바로 당면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공격이 단회성으로 그친 것도 아닙니다. 그 이후에도 어느 시점에라도 보호자 없는 무력한 카야를 덮쳐 최후의 한 방을 날릴 기세로 온 습지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으니까요. 어떤 형태로든 카야가 반응을 취하지 않으면 어떤 변을 당할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카야가 법의 도움을 청해서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보안관에게 신고한들 “그가 체이스 말 대신 습지 계집애의 말을 믿어줄 리가 없었습니다”(the law would never believe the Marsh Girl over Chase Andrews.). 그는 카야 외할아버지에게서 자기 손자/손녀들이 무사한지 알아봐달라는 요쳥을 받자, 습지 사람들은 추적할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퇴짜를 놓기도 한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는 습지 사람들을 죄다 쓰레기(trash)로 취급했습니다. 이런 정황은 ‘예방적 방위(preventive defence)를 목적으로 가해자를 공격할 권리(a right for attacking)’가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에 해당하지요. 불법적이고 절박한 위험에 대한 법의 도움을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자기가 당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한 두 낚시꾼도 그녀 편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카야가 체이스에게 수년간 치근댔을 테고 “창녀처럼 몸을 함부로 굴리다”(Actin’ the ho) 자초한 일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니까요. 이런 진실들이 카야의 정당방위 권리를 지지해주는 단서들입니다. 만일 이런 모든 상황들이 법정에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증거로 채택되어 타당한 것들로 인정되었다면, 카야의 살인은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음흉한 폭군들에 대한 경고. 현실은 모살 혐의에 대한 재판에서 카야가 무죄 방면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 재판 현장에서는 체이스의 진면목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카야를 비열하게 저버리고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가 선물해 준 조가비 목걸이를 걸고 다니면서 그녀를 자기 거라고 부르며 폭력을 가해서라도 자기 소유권을 행사하려고 덤벼드는 이 ‘음흉한 바람둥이 섹스 도둑’의 면모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소설의 기능 혹은 역할을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진실을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문제의 법정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혐오하는 습지 소녀가 마을의 유명인 청년을 모살했다는 혐의가 사실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평결이 내려집니다. 진실은 카야가 망나니 같은 불한당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지속적인 위협에 몰리다 살인을 감행했고, 그것은 법적으로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당방위였다는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통해서 사실 배후에 있는 진실이 밝혀진 것이지요.
그 살인의 정당성을 자연 생태계 속에서 발견되는 동물들의 생존본능이나 윤리와는 무관한 동물적인 수학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설 서두에서 작가는 습지 사람들에게는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법이라는 게 그들의 유전자에 새겨졌다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목숨이 걸린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무조건 생존본능(instincts)에 의존한다. 생존본능은 빠르고 공정하다. 온유한 유전자보다 훨씬 강력하게 후세대로 물려 내려가는 생존본능은 언제나 필승의 패다. 윤리(morality)가 아니라 단순한 수학(simple math)이다. 비둘기들도 자기네들끼리 싸울 때는 매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암컷 반딧불이 그 수컷을 먹어 버리는 사례가 소개된 다음 이런 논평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는 옳고 그름을 다른 불빛 속에서 같은 것으로 비치는 색채로 본다.(Biology sees right and wrong as the same color in different light.)” 이런 언급들로 인해 마치 카야가 체이스를 처단한 것이 습지 사람으로서 생존본능에 의존하여 모살을 결행한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큽니다. 혹시라도 작가의 의도가 이런 범주에 속한 것이었다면, 결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체이스 처단은 반딧불이나 사마귀 암컷이 각각의 수컷을 처치해서 자기 먹이로 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동물 세계에서는 생존본능과 수학이 작동되겠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윤리와 법률이 적용됩니다. 카야는 합법적인 정당방위를 수행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 세계에 대해 작가가 이렇게 언급한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대 인간의 상황에서는 적용되지 않겠지만, 다음 항목에서 논의하는 대로 자연 대 인간의 관계 속에서는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야의 정당방위는 그녀와 같은 피해자의 처지에 놓인 여성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위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운명에 대한 교육”을 선사한 셈이기도 합니다.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언급한 대로, “남자는 여자들이 비웃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죽일까 봐 두려워합니다.” 전 세계 여성들이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21세기 대명천지에서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은 소름 끼칠 정도로 흔합니다. 너무나 납득하기 힘들지만, 여성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공격당하는 경우보다 그들을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들의 주먹에 의해 고통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2021년에 세계보건기구(WHO)가 150여 개국에서 실시한 조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여성 4명 중 1명 이상이 일생 동안 자기 파트너로부터 구타 또는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으로 예상되었으니까요(“The Economist”). 카야와 그녀의 엄마를 보세요. 카야는 체이스라는 바람둥이의 꾐에 빠져 농락당하다가 폭행과 강간의 표적이 되어 전전긍긍하는 시기를 보내야 했고, 그녀의 엄마는 결혼 생활 내내 제이크라는 폭군의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다 가출했으나 백혈병이 걸린 채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수치심과 자녀들에게 미칠지 모를 불이익으로 인해 무력하게 된 피해 여성들이 실증법에 호소하지 않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악용하여 더욱 과감하게 폭행을 지속하는 비인간들이 세계 방방곡곡에 수두룩합니다. 카야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런 지속적인 폭행은 정당방위가 행사되어 죽어 마땅한 범죄입니다. 보다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내어 그 음흉한 폭군들을 고발해서 법의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정당방위가 행사된 경우를 다루는 관련 법을 보다 정치하게 다듬어 가면서도, 현재 살인이나 상해 혐의를 받고 있는 피해 여성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공정한 판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의 응징에 대한 예언-
이 소설은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납니다. 인간도 자연도 이용하고 착취할 대상으로만 여기다 비참하게 단명한 체이스의 죽음과, 사람들의 혐오와 배제를 당하면서도 땅과 그 속에 사는 생명체들과 끈끈한 유대와 결속을 다지던 카야의 품위 있는 죽음입니다. 소설 속에서 카야는 “이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대지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Rooted solid in this earth. Born of this mother.)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습지 소녀”로 태어나 자연에게서 모든 것들을 배우고 익히면서, 검고 긴 머리가 모래처럼 하얗게 세도록 열정적으로 자연을 탐구하던 카야는 64세 되던 해 채집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집니다. 체이스를 처단한 지 40년을 더 살면서, “흰머리수리가 돌아오는 것”도 목격한(to see the bald eagles make a comeback) 후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만 자연을 누리고 즐긴 게 아니라, 책을 통해 “습지가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지”(how the marsh links the land to the sea, both needing the other)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마침내 카야의 몸은 바다가 보이는 참나무 아래에 묻혔습니다.
한편으로 카야를 폭행하고 강간하려는 체이스의 모습에서 카야가 대표하는 습지 자연 생태계에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여 파괴하고 훼손한 지난 우리 인류의 폭압적이고 황폐한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체이스는 카야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고귀한 존재, 존중받아 마땅한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카야를 ‘덫에 걸린 암여우’, ‘습지의 암캐’라고 부르며 조롱했을 뿐 아니라, 카야 앞에서도 그녀를 ‘내 살쾡이’(my lynx)로 칭하면서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망동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조롱과 망동은 카야에 대한 모독이자 자연 생태계에 대한 모독입니다. 덫에 걸려 있거나, 습지에 살고 있거나, 자기가 먼저 찜했다고 생각되는 동물은 죄다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고 착취해도 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이런 그가 습지를 그저 보트 타고 낚시하는 대상이거나, 매립해서 농사지을 ‘착취할 대상’으로만 본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돌이켜 보면 현대 인류 사회가 환경 보호하겠다, 난개발 자제하겠다, 중립 탄소 시대를 열겠다, 약속은 찬란했지만, 그것은 ‘체이스의 허망한 약속’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는 자연 생태계가 그 숱한 약속 번복을 응징할 차례입니다. 너그럽게 자기 환경과 과실들을 베풀어 주기만 하던 자연 생태계를 탐욕의 대상으로 삼고 착취만을 일삼은 현대 인류에게 어떠한 응징이 적합할까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인류가 그토록 혐오해서 벗어나기 원하던 ‘죽음’이라는 응징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반격을 가할 때 윤리적인 고려가 작동될 거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가 지적한 대로, 빠르고 공정한 ‘생존본능이라는 필승의 패’로 응징할 뿐, 인명의 고귀함이나 사회적 상황이나 그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참가자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니까요. 순식간에 그 작업을 해치우고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조천호 교수가 경고한 대로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지구가 인류 문명에 예측할 수 없는 파괴적인 행위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지구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구해야 한다.”
당장 이 세상이 끝나고 심판의 때가 닥쳐도 우리 모두는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이미 악이 가득 차서 흘러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에서 언급한 대로입니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8:11, Because the sentence against an evil deed is not executed quickly, therefore the hearts of the sons of men among them are given fully to do evil.) 함께 조화롭게 공존하여 살아가야 할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하는 것뿐 아니라, 동일한 운명을 지닌 인간까지도 혐오하고 차별하는 선을 넘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폭력을 가하고 살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 인류 역사의 주류가 아니었던가요? 지금도 정글의 법칙, 적자생존의 법칙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지 않습니까? 때가 더 늦기 전에 이 인류 파멸의 길에서 돌이킵시다! ‘습지 소녀’ 카야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아름답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를 기리는 송가의 독해를 마감하면서 끝으로 환경 전문가인 홍석환 교수의 글 한 자락을 소개합니다.
“인류가 산업사회로 나아가면서 얻은 가장 큰 이익은 경제성장이다. 반대급부로 가장 크게 잃은 것은 환경문제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인류가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축은 공존해야 하지만, 선진국 중 유독 우리나라에서만큼은 한 축으로만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환경이 조금 더 나빠져도 죽지는 않는다’는 성장주의 주장을 ‘돈을 조금 더 벌어도 내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말로 대체해보면 어떨까? (...)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균형을 맞출 때이다. 경제성장만이 우리를 잘살게 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반대로 환경 가치의 향상이 우리를 잘살게 할 것이라는 변화된 생각을 실천할 때이다.”(홍석환, “환경에 대한 갑질을 멈출 시간”, 202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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