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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우리나라 문화를 선도한 한 작곡가를 기리며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2. 22.

우리나라 문화를 선도한 한 작곡가를 기리며

-고 박재훈 목사의 음악 인생 선물-

 

1년 반 전에 한 기독교 작곡가가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향년 98세, 우리나라 나이로는 100세였습니다(1922-2021). 고 박재훈 목사님입니다. ‘한국교회 음악의 아버지’, ‘한국교회 제1호 지휘자’ 및 ‘한국 동요의 대부’로 불리는 박 목사님은 평생 찬송가, 성가곡 및 동요를 포함하여 총 1,500여 곡을 작곡했습니다. 찬송은 현재 기독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새찬송가(혹은 21세기찬송가)에 9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어서 돌아오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눈을 들어 하늘 보라”와 같은 것들이지요. 동요는 “봄”(‘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로 시작), “다람쥐”(‘산골짝에 다람쥐’로 시작), “눈”(‘펄~펄 눈이 옵니다’로 시작), “여름 냇가”(‘시냇물은 졸졸졸~졸’로 시작) 등이 있고, 오랫동안 애창된 “여름성경학교 교가”(‘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로 시작)와 “어머님 은혜”(‘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으로 시작)도 목사님 작품입니다. 이문승 교수가 언급한 대로, 박 목사님은 “한국말에 잘 맞는 리듬에 서정적 낭만적인 찬송가를 쓰셨던 분”이셨고, “찬송가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동요를 많이 쓸 정도로 애국정신도 강”한 분이셨습니다. 이 외에도 목사님은 “에스더”를 필두로, “유관순”, “손양원” 및 “함성 1919”와 같은 신앙적 역사관이 담긴 오페라를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음악인으로서 우리나라 교회와 백성을 섬긴 목사님은 최고 수준의 음악을 지향했습니다. 문성모 교수에 의하면, 특히 교회음악이 예술적 가치도 없고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했다고 하지요. 교회음악의 수준을 드높이는 한편, 철학이 있고, 역사성에 기초하고,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며, 메시지가 담긴 교회음악을 진작해 갈 것을 주창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님에게 음악은 우상이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 하나님, 교회, 가족 및 나라에 대한 사랑을 열어 밝히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아드님 박기성 목사). 목사님이 작곡하신 “눈을 들어 하늘 보라”(새찬송가 515장)에 담긴 이야기를 한번 주목해 보세요. 6.25 전쟁 중이던 1952년(30세) 부산에서 해군 정훈음악대 대원으로 활동하면서 광복교회에서 섬기던 박 목사님에게 엽서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신앙의 벗이었던 여류 시인 석진영 선생(26세, 서울대 사범대 출신 국어 교사)이 보낸 엽서였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진 채 공포에 떨고 지내며 피난살이에 지친 신 시인이 탄식 소리만 내뱉던 동포들의 수난과 무력하고 빈곤한 기독교회의 모습을 목도하고 기도드리던 중에 떠오른 시상으로 적은 시였습니다. 눈물 자국이 배여 있던 석 시인의 곡진한 글에 공감하던 중 영감을 받은 박 목사님은 단 10분 만에 멜로디를 써갔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사 각 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믿는 자여 어이할꼬’는 원래 ‘청년들아 어이할꼬’였다고 하지요. 26세 청년 시인이 신앙의 벗인 30세 청년 작곡가에게 전한 이 찬송시는 사실상 당시의 청년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애끊는 사랑의 절규였던 것입니다.

 

박 목사님이 더욱 그리운 것은 요즘 보기 드문 언행합일의 성숙한 신앙적 면모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존경할 만한 면모를 띠었다가도 나이가 들면서 변질된 지도자들이 부지기수인 우리나라 기독교회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기릴 수 있는 신앙 선배를 두게 된 것이 여간 감사하지 않습니다. 1971년에 첫 오페라 “에스더”를 창작하여 이듬해에 공연한 목사님은 197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 공연을 본 미국 선교사 사무엘 휴 마펫(한국명: 마삼락, 마포삼열 선교사님의 3남)의 도전적인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3.1운동을 주제로 한 오페라를 창작해 보라는 권면이었지요. 그것이 목사님에게 도전이 되었던 이유는, 있는 실력을 다해 오페라 한 곡을 겨우 창작했는데 그런 큰 주제로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그런 창작을 위해서는 더욱 작곡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목사님은 1959년 미국 유학에 이어 1973년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40년만인 2013년이 되어서야 그 오페라의 대사가 완성되어(목사님은 ”대사가 들어왔다“고 표현함), 2019년에 “함성 1919”를 발표하게 됩니다. 결국 대사가 안 들어와서 쓰지 못하고 있던 것을 2013년에 대사가 들어옴으로써 그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2013년이라면 목사님이 몇 살이었을까요? 무려 91세였습니다. 이때부터 무려 5년 이상을 공들여 이 대작 오페라를 완성한 것입니다.

 

한편 목사님은 1979년에 캐나다로 이주한 이후에 60세 되던 해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들 넷 모두 목사가 되게 해달라는 목사님 어머님의 기원이 응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필요한 곳으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하던 중에, 5가정에 10명이 출석하는 교회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급기야 1984년 7월에 토론토 “큰빛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성도 수가 많아지는 목회를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는 마음을 먹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9년 12월에 박 목사님은 임현수 목사님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었습니다. 지난 2015년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2년 7개월간 억류당한 그 임현수 목사님입니다. 함께 4년간 사역하면서 당시 전도사였던 임 목사님의 역량과 됨됨이를 지켜보면서 그 교회의 후임자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택한 것이지요. 박 목사님의 실제적인 은퇴는 교회 개척한 지 8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임기 10년을 채워야 원로목사로 추대되는 관례에 관심 두지 않고, 오직 교회를 섬기는 길만을 염두에 두신 결과였습니다. 은퇴 후에도 성가대 지휘를 맡을 후임자가 없어 7년 동안 그 역할을 지속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목사님과 후임자인 임 목사님 간에 어떤 갈등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임 목사님의 고백을 한번 들어 보세요.

 

“나는 박 목사님과 86년도부터 함께 사역을 하면서 큰빛교회를 35년간 섬겨오고 있는데, 이제는 저도 원로가 되었으니 세월이 참 빠르게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30년 이상을 모시고 지냈는데 단 한 번의 갈등도 없었고 변함없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뛰어난 신앙과 겸손 그리고 욕심이 전혀 없으신 검소한 삶 때문일 것입니다. 그 분은 인격자이십니다. 내가 36년을 지켜 본 박재훈 목사님은 소년 같이 마음이 맑으신 분이시고, 36년 동안 단 한 번도 후임자인 저와 단 한 번의 갈등도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품어 주셨고, 예수님처럼 관용하며 참아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성자 같으신 분이십니다.”

 

감사하게도 박 목사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지난 2007년 12월에 서울에 있는 영락교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저희(저, 아내, 둘째 아들)를 반겨준 노부부가 계셨습니다. 남편 되시는 분이 자기를 소개하실 때가 참 독특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작곡가 박재훈 목사입니다.” 당신이 몇 살로 보이느냐는 질문에 70세 정도라는 답을 드렸더니,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86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연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한 외모를 지니고 계셨지만, 목소리가 아주 작고 갈라진 채로 흘러나왔습니다. 다소 의아해하는 저희 눈치를 읽으시고는, 그 얼마 전 갑상선 암이 발견되어 그 종양을 절제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성대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한 번 시도했지만, 아직도 완쾌되지 않아 재수술 날짜를 잡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해가 헨델의 ”메시아“가 40회 기념 공연을 하는 해(1회 공연이 1964년에 있었으나 그 동안 세 차례 공연되지 못한 탓으로 그해가 40회 공연을 하게 되는 해가 되었다고 함)라 초대를 받아 캐나다에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한국 최초의 기독교 창작 오페라인 “에스더”를 작곡한 바 있었으나, 한국에 있다 보니 여러 가지 일로 너무 분주한 나머지 작곡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차에 미국으로(1973년), 또 캐나다로(1979년) 진출할 기회가 생겨 그곳으로 가 작곡 활동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당시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오페라를 준비 중이라는 말씀과 덧붙여 주셨지요. 특히 가슴에 와닿았던 말씀은 우리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핵심 주체 세력은 기독교 사회이며 그 방법은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인데, 기독교 음악이 그 중요한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방문 중에도 당신의 후배들과 함께 뜻을 모으고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문화 변혁의 시도를 계획하고 있음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노년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작곡의 은사를 활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작품들을 계속 생산해 내려고 하시는 열의뿐 아니라 당신의 은사를 통해 사회 변화를 도모하시려는 의지를 품고 있는 당신의 본이 저희 마음에도 곧바로 전달되어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황영숙 사모님은 무릎 관절 통증이 심하여 제대로 걷지를 못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얼굴만큼은 달덩이처럼 환하셔서 저희가 바라만 보아도 그렇게 마음이 넉넉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고국 방문 후에 곧 말레이시아 동부 지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 온 저희들이 더 다정스러워 보였나 봅니다. 그동안 영양 섭취를 잘 해서 얼굴이 훤할 뿐 아니라 덩치도 좋았던 저희 둘째를 볼 때마다 “너 참 잘 생겼다!”는 말씀을 연발하시더니, 저희와 헤어지던 날에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일부러 방으로 다시 들어가신 후 만원 지폐 두 장을 집어오셔서 저희 둘째 손에 꼭 쥐어 주셨습니다. 두 분이 더욱 건강하고 보람된 노년을 보내시기를 기원하고 헤어졌던 흔감한 추억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처음 만난 낯선 후배 일꾼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며 먼저 손을 내밀고 소탈하게 관심사를 나누며 친분을 맺어 가신 것은 당신이 평생 일관해 오신 대인관계의 특장이었을 것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지내던 저희 가족이 마치 오랫동안 친분을 쌓은 분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듯한 편안함과 친숙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박재훈 목사의 삶과 사역이 선사하는 교훈-

음악으로 한평생을 견결하게 걸어가신 박 목사님의 생애가 제게는 두고두고 빛을 발할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 4가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음악으로 애국 애족을 실행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신산한 삶을 목도한 목사님은 자신의 은사인 음악을 통해 그들을 위무하고 격려하는 자세로 평생을 일관했습니다. 특히 주옥 같은 목사님의 찬송가뿐 아니라 오페라 작품 4편이 그것을 드러냅니다. “에스더”를 시작으로 하여 “유관순”, “손양원”, 그리고 “함성 1919”에 이르는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우리 겨레와 민족의 고통과 애원과 소망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 작품들입니다. 개인적인 부귀영달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조국이라는 공동체의 독립과 발전과 번영을 꿈꾸는 오페라였습니다.

 

겨레의 독립을 염원한 3.1운동이라는 민족적 거사를 선도했던 기독교를 돌아볼 때마다, 오로지 개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불사할 태세가 되어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개혁보다는 부흥을, 정당한 목회자 선출보다는 부당한 교역자 세습을, 투명한 재정 집행보다는 불투명한 재정 활용을, 만인제사장직보다는 성직주의를, 전인적 성숙의 진작보다는 영육 이원론의 고착화를, 성도들의 실생활 속 은사 활용보다는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 강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교회의 현주소이니까요. 그래서였겠지요. 박 목사님은 4년 전에 “한국교회의 오랜 역사를 함께 보고 경험했던 목사의 한 명으로서 제안하고 싶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교회의 중심이 변하면 안 됩니다. 3.1운동 당시 모두가 힘을 합쳐 나라를 위해 기도했듯이 지금도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내 교회, 내 교인, 내 이익만 챙기는 것은 안 됩니다. 교회가 달라져야 하고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목사들이 먼저 회개하고 변해야 합니다.”(한국일보 인터뷰, 2019년 1월 16일)

 

둘째, 음악으로 대중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선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8.15해방 이후에 바로 시작된 아이들의 2학기 수업 시간에 함께 부를 노래가 없다는 사실을 내다본 목사님은 그들을 위한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년”과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약 백 권 정도 수집해서 그 속에 담긴 동시들을 뽑아 가사로 삼고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단 3일 만에 50곡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영감의 열매였습니다. 누가 시킨 일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심령 속에 두신 영적 부담과 부어 주신 영감의 결실이었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영성을 통해 시대의 문화적 필요를 내다 보고,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선취하는 선도적인 태도를 발휘했던 것이지요. 당신은 비록 해외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후배들이 그 배턴을 이어받아 우리나라의 문화 변혁을 일구어내기를 열망하신 것도 당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희 가족이 그분 내외를 잠시 뵈었을 때 피력하신 내용이기도 했으니까요.

 

우리나라 기독교가 우리나라 사회를 변화시킬 핵심 세력으로서 문화 변혁을 일구어 내야 한다는 목사님의 일념은 안타깝게도 현시점에선 난망한 소원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사회의 각 분야를 선도했던 기독교가 이제는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비롯된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와 반동적인(reactionary) 세력의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지성주의 경향은 특히 ‘창조과학’(creation science 혹은 scientific creationism)이라는 ‘유사과학’이 끼친 악영향 탓이 큽니다. 가치중립적으로 과학 지식을 온축해 온 지질학이 밝힌 지구의 나이 45억 년을 구약의 족장 족보에 근거한 6천 년으로 오롯이 규정한 언필칭 과학적 주장이지요. 이 종작없는 주장 앞에 ‘창조’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 그동안 ‘창조신앙’을 견지해 온 숱한 그리스도인들이 현혹되었습니다.

 

역사학자인 마크 놀과 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에 따르면, 기독교에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신학 및 종교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을 무가치한 것으로 오해하여 배척하는 폐쇄성을 강화하는 폐단이 생긴 것이 바로 이 창조과학 때문이었습니다. 즉, 성경을 근본주의적으로 편협하게 이해하려는 이런 시도 탓에 다양한 학문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통합하여 연면히 신학적 지평을 넓혀 온 기독교 전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전통적인 ‘창조신앙’의 자리를, 창세기를 과학 교과서로 읽고 자기 방식의 과학을 예배하라는 ‘창조과학’이 꿰찬 형국입니다. 기독교 이단인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SDA)에서 비롯된 이 유사과학적인 주장이 어떻게 이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정통 기독교 교리를 표방하는 한국교회에서 그 맹위를 떨치고 있는지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신앙의 관성이란 옳은 것이든 그릇된 것이든 이렇게 끈질기고 그 생명력이 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반지성적인 토양 위에서 외치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허공을 때릴 뿐이라는 점입니다. “창조과학 난민”으로 교회를 등진 이들은 물론이지만, 교회를 반지성적인 게토(ghetto)로 이해하는 일반인들 대다수가 그 메시지에 귀를 열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과거와 같이 좋은 것을 배워 오라고 자기 자녀들이 교회 가는 것을 권장하지도 않겠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할 공산이 더 큽니다. 정상 과학과 지성의 역할을 무시하고 유사과학에 포획된 공동체에서 무슨 의미 있고 건설적인 것을 배울 거라고 기대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최근 들어 동성애를 반대하는 일환으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회의 입장은 사회 발전과 진보를 가로막는 반동적인 행태로 비치기 십상입니다. 그렇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서적인 입장은 동성애 로비 단체들이 비난하는 “성서적인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와는 정반대로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시각입니다. 성서상의 동성애 금지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문제로 인한 차별과는 다른 범주(category)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히 열어 밝히면서, 그 표면적인 금지 규정 속에 감추어진 본질적인 실재들(essential positives)에 더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sexuality)과 결혼(marriage)에 관한 신성한 계시가 열어 밝히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God’s created order)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존 스토트).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그 절정이란 남성과 여성의 창조와 그 연합이며, 남성과 여성의 결혼(inter-gendered marriage)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 많은 문화 영역을 넘나들며 찬미해 마지않는 다양성 속에서의 연합이 나타내는 궁극적인 실재(the ultimate unity-in-diversity)가 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비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동성애 금지 조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팀 켈러). 문제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합당한 시각이, 그들은 반지성적이고 반동적이라는 문화적 안경을 쓰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현시점에서는 언감생심인 문화를 선도하는 과업보다 더 시급하고 중대한 문화와의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당신의 은혜에 의존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무엘 마펫 선교사에게서 3.1운동을 주제로 한 오페라를 제작할 것을 제안받고 미국으로 떠났으나, 40년이 지난 후에야 그 곡을 완성하게 된 것이 그 한 사례가 됩니다. 그 오페라의 근간이 되는 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임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2013년에 그 “대사가 들어와”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하여, 2019년, 즉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발표하게 되지요. 처음에는 10년쯤 걸리면 대사를 다 쓸 수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라고 목사님은 술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40년 전에 이미 장차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 것이고 한국이 어떻게 될 것을 다 알고 계셨기에 40년 후의 상황에 걸맞은 대사를 허락해 주셨다는 것이지요.

 

이 오페라뿐 아니라, 음악인으로 살던 당신이 목사직을 갖게 된 것도, 교회까지 개척해서 목회를 하게 된 것도 모두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라는 점을 목사님은 늘 강조했습니다. 개척한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담임목사의 기득권도 다 내려놓고 그 교회에 가장 적합한 유능한 일꾼을 적시에 발굴해서 후임자로 청빙하는 선도적 조치를 취하신 것도 주님 되신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인 결과였을 것입니다. 자기보다 유능하고 실력 있는 부교역자를 내치는 데 발 빠른 담임목사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박 목사님처럼 교회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그 부교역자를 담임목사로 세우기 위해 자기는 일찌감치 물러앉은 목회자 이야기를 접하신 적 있는지요? 이에 덧붙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므로 구원받은 대로 진실하고 가식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목사님의 소신이었습니다. 인터뷰 중에 진행자가 120세를 누린 모세처럼 장수하기를 비는 기원을 언급하자마자, 그것은 욕심이라면서 “오라면 가야죠!”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모습 또한 순천명하겠다는 당신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넷째, 은사를 최대한 개발하고 활용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쓰러지기 몇 시간 전까지 작곡 활동에 임하셨다는 아드님의 증언이 있습니다. 알제리 회교도를 섬기기 위해 40년을 드린 화가 선교사 릴리아스 트로터(1853-1928)가 소천하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것과 동일한 차원의 헌신이었습니다[본 블로그 중 “26. The Great Commission(대위임령)” 참조). 당신의 은사가 음악인 것을 깨달은 목사님은 그것을 개발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을 배우고, 교직을 수행하는 중에 음악 교수에게 작곡법을 배웠으며, 그 실력으로 끊임없이 동요를 작곡하여 출판했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집인 “일맥(一麥) 동요집”이 목사님의 노고에서 비롯되어 유치원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각지로 퍼져갔지요. 해군 정훈음악대, 기독교방송, 영락교회, 선명회합창단에서 그 은사를 지속적으로 활용한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목사님의 향학열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1959년에 미국에 유학하여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왔지만, 나중에 오페라를 작곡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1973년에 다시 미국으로 진출하여 향학열을 불태웠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음악적 역량을 인정하고 그것을 더 개발하기 위해 50세가 넘어서도 미국으로 향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목사님의 삶의 여정은 인생3막의 길에 들어선 제게도 소중한 전범이 됩니다. 그 3막의 여정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신 지식과 은사를 갈고 닦을 뿐 아니라 선도적으로 활용해가야 한다는 신선한 깨달음이 번연히 제 마음 속에 들어왔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영어교육, 인문학, 성경 및 선교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쌓고, 가르치는 은사와 글 쓰기 은사를 부여받은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모쪼록 목사님처럼 생애 다하는 날까지 맑고 강건한 심신을 누리며 제 지식과 경험과 재능을 널리 활용하는 데 형통하길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목사님의 생애를 기리고 삶의 이모저모를 묘사하는 글 중에서 임현수 목사님의 표현 한 가지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영적 한옥을 지으신 분.” 아마도 박 목사님이 가장 흡족해 하셨을 법한 비문(碑文, epitaph)이었습니다. 그립습니다, 목사님.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