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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배제, 폭력의 문화를 돌파한 ‘습지 소녀’의 송가,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2)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6. 21.

혐오, 배제, 폭력의 문화를 돌파한 ‘습지 소녀’의 송가,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2)

-끈질긴 혐오와 고질적인 차별-

카야가 드나들던 바클리코브 마을은 1751년부터 정착이 시작된 곳입니다. 그 마을 자체가 습지와 바다로 인해 세상과 격리되어 있습니다. 무려 2백 년이 지났지만,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금이 간 시멘트에 구멍이 뿡뿡 뚫린 일차선 도로뿐이었습니다.” 이런 마을 안에 특정 사람들에 대해 근거 없는 혐오와 맹렬한 차별과 배제가 존재합니다. 그것들의 내용과 원인들을 살펴보면 이 마을은 하나의 소세계(小世界, microcosm),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축도(縮圖) 역할을 하는 사회입니다. 예컨대 그 마을 안에는 백인 동네와 흑인 동네가 따로 있고, 백인 교회가 4곳, 흑인 교회가 3곳 존재합니다. 도그곤 비어홀에는 유색인이라면 정문 출입도 되지 않지만, 포장판매 창밖에서 음식을 살 수도 없습니다. 카야는 흑인이 아닌데도 어릴 때부터 마을 주민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어 온갖 모욕적인 별명을 들으며 철저하게 그 마을 공동체에서 배제됩니다. 그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람들은 어른들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더 못되게 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 드러난 맹렬한 혐오와 배제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특히 3가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1) 다르다. 점핑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 마을의 흑인들이 다른 백인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은 그들의 피부색 차이 때문입니다. 카야가 어릴 때부터 그토록 수모를 당하고 그 마을로부터 배제된 것은 그녀의 가족이 다른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습지라는 특이한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지라는 환경이 품고 있는 함의가 유별난 게 사실입니다. 그 지역의 습지는 “대서양의 공동묘지”(Graveyard of the Atlantic)라고 불릴 만큼 살인적이고도 척박한 해안선을 항해하는 동안 살아남은 이들이 정착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반란 선원, 조난자, 빚쟁이, 전쟁이나 세금이나 법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들이 뒤범벅으로”(a mishmash of mutinous sailors, castaways, debtors, and fugitives dodging wars, taxes, or laws) 생계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곳으로 악명 높았습니다(“infamous marsh”). 카야가 어른과 아이들에게 ‘늪지 쓰레기’(swamp trash), ‘습지 암탉’(marsh hen), ‘습지 계집애’(Marsh Girl)로 불린 것은 이런 배경과 연관된 것입니다. 카야의 변호사인 톰 밀턴이 재판 중에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카야를 혐오하고 거부한 것은 자기들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뭔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어 습지라는 외딴곳에서 정착해 사는 가족의 아이라고 여겼다는 말입니다.

 

카야를 혐오하던 이들 마을 사람들은 급기야 그녀를 그들 공동체에서 배제해버렸습니다. 혐오감이 밟는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온 가족이 버려두고 간 6세 아이가 혼자 습지에서 배고픔과 외로움과 싸우며 생존해 가고 있었지만, 그 마을 공동체는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카야가 엄마와 출석한 적이 있는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톰 밀턴이 언급한 대로,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 점핑 내외를 제외하면 어떤 집단도 그녀에게 음식이나 옷가지로 돕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질문을 한 가지 던집니다.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캐서린 클라크를 소외시켰던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소외시켰기 때문에 그녀와 우리가 달라진 건가요?”(did we exclude Miss Clark because she was different, or was she different because we excluded her?) 그녀를 수용하고 먹이고 사랑해 줄 뿐 아니라 교회와 집에 초대했다면, 그녀에 대한 편견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2) 없다. 그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피부색이나 거주 지역 차이라면 백인 마을 주민들이 카야를 대하는 행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카야를 가리키는 별명에 피부색과 연관된 것은 전혀 없고, 거주 지역을 드러내는 것들만 두세 개 정도 있기 때문입니다. “습지 계집애”(the Marsh Girl), 습지 암탉(marsh hen) 같은 것들이지요. 그렇지만 어른들은 그녀를 ‘작은 상거지 암탉’(little beggar-hen), ‘늪지 쓰레기’(swamp trash), ‘반인 반늑대’(part wolf) 및 ‘미친년’(Crazy ’nough for the loony bin)으로도 부릅니다. 아이들은 심지어 ‘유인원 계집애’(Miss Missin’ Link), ‘늑대 아이’(the Wolf Child) 및 ‘dog의 철자도 못 쓰는 소녀’(the girl who couldn’t spell dog)와 같이 비열한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지요. 이 모든 별명 속에는 주로 카야가 처한 경제적 빈곤 상황과 그녀의 지적 수준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습니다. 즉 돈이 없고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카야 가족의 빈곤이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나 가족들을 대하니 카야도 자기를 “가난한 백인 쓰레기”(po’ white trash)로 인식합니다. 테이트가 이런 자기에게 어여쁜 깃털을 가져다 주고 글을 가르쳐 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 마을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심지어는 보안관이나 목사 부인까지도 합세해서 빈곤에 찌들어 사는 그 늪지 가족과 버림받은 막내 카야를 혐오하고 조롱하는 데 동참했습니다. 그 결정판은 ‘유인원 계집애’(Miss Missin’ Link)라는 표현입니다. 카야가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잃어버린 사슬이라는 뜻이지요. 어릴 때부터 그 가족과 함께 관계를 트고 살던 테이트와 흑인인 점핑과 메이블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카야를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 대우해 주기는커녕 온갖 상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그녀의 영혼을 짓밟았습니다. 글을 익히고 지력을 갖추기 위해 학교에 간 첫날 다른 아이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접한 카야는 평생 학교 문턱을 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그들을 눈앞에 접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고립시킨 것이지요.

 

(3) 더럽다. 감리교 목사 부인인 테리사 화이트는 어린 카야를 보고, ‘더럽다’(dirty), ‘불결하다’(filthy), ‘순전히 고약하다’(plumb nasty)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내뱉기도 합니다. 4살 난 자기 딸 메릴 린이 먼저 카야(7살 혹은 8살)에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자, 카야가 자기 오른손을 내밀어 반응을 보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만 본 그녀는 달려와서 난리를 피웁니다. 자기 딸에게는 저런 더러운 여자애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카야가 메릴 린을 괴롭혔냐며 허겁지겁 다가온 한 여자에게는 저런 사람들은 마을 출입을 못 하게 하면 좋겠다며 한술 더 뜹니다. 작년에 저런 사람들이 홍역(measles)을 옮겼으니 올해는 장염(stomach flu)을 옮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 부인이 카야를 더럽고 불결하다고 본 것은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전기도 수도도 화장실도 없이 1920년대를 살고 있던 카야 가족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옷이나 신발이나 모자를 갖추고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카야가 학교에 간 첫날이자 마지막 날, 신발도 신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로 등교했다가 아이들에게 ‘늪 시궁쥐’(swamp rat)라는 별명을 들어야 했지요.

 

마을 주민들에게는 물질적 풍요와 외면적인 과시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뿐 아니라, 그 부를 외면적으로 과시하는 것을 통해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는 게 그들의 일상사였으니까요. 예컨대 카야를 보고 ‘늪지 쓰레기’라고 부르던 팬지 프라이스는 자기 집안 형편이 악화되어 자기네 땅을 다 판 상태였지만, 여전히 점잖은 지주인 양 행사하기 위해 실크 터번처럼 생긴 모자를 쓴 채 진한 화장을 하고 다닙니다. 방금 언급한 목사 사모는 금발에다 “파스텔톤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에 색깔을 맞춘 펌프스”를 신고 백을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점잔을 뺍니다. 그녀는 그 마을에서 옷을 늘 잘 차려입고 다니며 깨나 대접받던 목사, 선교사, 그 부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지요. 망나니짓하고 다니던 체이스 앤드루스를 보세요. “발정 난 수사슴의 잔뜩 힘준 목이나 거대한 뿔”에 해당하는 멋진 스키보트를 타고 다니며 온갖 여자들을 섭렵하고 다니지요, 그 어머니 패티 러브는 이 분야의 끝판왕입니다.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설 때에도 “최고급 검은색 실크”로 옷을 맞춰 입고 “반짝이는 핸드백”을 갖추고 “빈틈없이 머리칼을 뒤로 묶어 올리고 정확한 각도로 기울여 쓴 모자에 극적인 검은 망사를 늘어뜨려 눈을 가리면서” “오로지 자기 외모와 지위”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지요. 이들 모두 카야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무시하던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에게 카야는 각각 ‘늪지 쓰레기’, ‘더럽고 불결한’ 아이, ‘습지의 암캐’(marsh minx), 맨발의 습지 주민(barefoot marsh dweller)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혐오나 차별이 시사하는 엄중한 영적 현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카야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혐오와 배제의 주된 원인은 피부색이나 사는 지역 혹은 환경이 다르다는 것과, 돈이 없고 지력이 떨어진다는 것과, 불결하고 지저분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선 성, 연령, 피부색,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출신/거주 지역이나 출신 학교, 주택, 자가용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대방을 혐오하고,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소설 속에는 그저 피부색의 차이와 거주 지역의 차이가 빚어낸 혐오와 차별이 주로 드러나 있지요.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출신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따라 직장 내 진급에서 제외되거나 조기 은퇴의 쓴잔을 마셔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최고급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이 다른 단지에 사는 주민들을 폄하하고 차별하는 사례들은 수도권이나 지방이나 한결같이 넘쳐납니다. 심지어 최고급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들이 ‘승차감’이 아니라 ‘하차감’[차에서 내릴 때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고 존중해 준다는 감정] 때문에 그 차를 산다는 말을 말레이시아에서도 심심찮게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자주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름으로 인해 빚어진 혐오와 배제의 사례 중에도 상대적인 경제적 수준의 차이에 의한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절대적인 경제적 빈곤에 처한 이들이 당하는 혐오와 차별의 사례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지적한 대로입니다. “전 사회를 통틀어 가장 낙인으로 가득 찬 생활 조건 가운데 하나는 빈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나태하고 부도덕하며, 가치가 낮은 존재로 여겨지면서 일상적으로 기피당하는 존재가 되고 수치심을 겪는다.”(One of the most stigmatized life-conditions, in all societies, is poverty. The poor are routinely shunned and shamed, treated as idle, vicious, of low worth.)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2015] 어린 카야가 성장하면서 내내 들어야 했던 별명들과 거듭 겪어야 했던 수치스러운 상황들이 이런 극심한 빈곤의 측면과 직결됩니다. 그리고 더러움이나 지저분함은 빈곤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경제적으로 빈곤한 지역의 사회 환경이 불결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 분위기를 깨끗하고 깔끔하게 유지하고 지속할 만한 자원이나 여유가 부족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급급한 마당에 자기와 가족들의 단정한 외양이나, 자기 집의 개보수나 단장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이지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의 사회 환경이 불결하거나 지저분한 곳은 거의 없는 법이지요.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더러움에 대한 이런 혐오감이 “본질적으로 죽음과 부패, 혹은 죽음과 부패의 악취(the stench of death and decay)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인류 사회에 있어 혐오감(disgust)과 수치심(shame)이 품고 있는 함의를 깊이 천착한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혐오감이 배설물이나, 체액들(피, 콧물, 정액, 콧물, 귀지) 및 시체 등에 대한 즉각적인 거부감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거부감은 학습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지만 발현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감정으로서 “원초적 혐오(primary disgust)로 불립니다. 이 혐오감은 비인지적인 단순한 감각 반응이 아니라, 대상이 ‘오염’되었다는 생각, 혹은 오염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접촉에 대한 극도의 증오가 반드시 동반되는 감정입니다. 결국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더러움에 대한 이런 원초적인 혐오감이 오염으로 촉발된 부패와 죽음을 상기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혐오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직결됩니다. 한편으로 누스바움은 이러한 혐오감이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지닌 다수자들에 의해 가장 취약한 집단에 투사된다는 점에도 주목합니다. 이 “투사적 혐오(projective disgust)로 인해 지난 오랜 역사에 걸쳐 여성, 불가촉천민, 유대인, 하층 계급 사람들, 동성애자들이 육신의 오물로 더렵혀진 존재”(tainted by the dirt of the body)로 상상되면서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요[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The Monarchy of Fear: A Philosopher Looks at Our Political Crisis>, 2020].

 

‘투사적 혐오’에 ‘투사적’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는 ‘그들은 냄새가 나고 짐승 같다“(smelly and bestial)라는 혐오스러운 특성을 타인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혐오스러워하면서 배제하려는 대상이 우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가 취하는 행동이 지성적인 문제 해결(to solve the problem)이 아니라 그저 비이성적인 회피(to flee)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예컨대 과거 인도의 지배 계급은 대변과 시체를 처리하고 바닥 닦는 일을 도맡아 했던 불가촉천민 계급과의 신체적 접촉을 피함으로써, ’더러움‘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치우는 대변과 시체는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바로 자기들의 것이었지요. 현대 문화를 구가하는 도시인들은 주름진 몸과 절뚝거리는 신체와 거리를 둠으로써, 그런 혐오스러운 신체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나이 들거나 사고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노화하는 몸과 사고를 통해 손상당할 수 있는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지요. 여기에다 우리의 혐오감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인지도 주목해 보세요. 과거 미국 남부에서는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 1876-1965)에 의해 흑인이 식수대, 간이 식당, 수영장, 호텔 침대와 같은 것들을 백인과 공유할 수 없었습니다.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백인들이 흑인의 몸에서 강력한 오염 물질이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개가 음식을 먹은 접시는 씻어서 다시 사용하면서도, 흑인이 음식을 먹은 접시는 오염된다고 여겨 깨트려 버렸습니다. 하지만 백인들은 흑인이 자기 가정을 위해 요리해서 차려 놓은 음식은 맛있게 먹는 모순에 찬 행위를 연출했습니다. 1867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의 많은 주에서, 어글리 로”(Ugly Laws)를 실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예를 들자면, “어떤 식으로든 질병, 불구, 절단 또는 변형되어 보기 흉하거나(unsightly) 혐오스러운(disgusting) 대상이 되는 사람이 공공장소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불법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쯤에야 우리가 이 비이성적이고 모순적이며 비인간적인 혐오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름, 없음, 더러움이 혐오와 차별이나 배제를 낳는 사회적 상황이 어찌 지금부터 70년 전의 미국 남부 외딴 시골에만 국한되었겠습니까? 그곳 상황은 당시 다른 모든 미국 사회의 축소판에 불과했겠지요. 그 미국 사회를 흠모하며 지금까지 숨 가쁘게 좇아온 우리나라 사정이나, 전 세계 대부분 나라의 사정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이래, 아니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여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해 온 이래로, 물질과 외모를 좇는 ‘걸인의 철학’과 ‘외모지상주의’가 전 세계를 평정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걸인의 철학’이란 표현은 문학평론가 백낙청과 사회학자인 정수복과 오찬호가 활용한 것으로서, “현재의 물질적 행복을 인생 최고로 여기는 가치관, 즉 현세적 물질주의”, 혹은 황금만능주의를 가리킵니다(오찬호, “나는 태어나자마자 속기 시작했다”, 2018).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어찌 인간다운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보장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생계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믿는 이들이 우리나라엔 허다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먹고살 만하게 되면, “‘더’ 잘 먹고 잘살겠다는 욕망”을 극대화하는 것 외엔 다른 가치 있는 것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 욕망은 끝이 없으므로, 그 욕망을 좇는 이들은 그것의 종에 불과합니다. 모쪼록 경천애인의 가치와 공동선의 가치를 진작하고 그것들이 사회 각 방면, 세계 곳곳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돕는 구체적인 활동들을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도모함으로써, 혐오와 차별을 지속적으로 낳는 그 “‘더’ 잘 먹고 잘살겠다는 욕망”을 떨쳐 버립시다.

 

-혐오와 배제가 낳는 필연적인 폭력-

다름과 결핍과 누추함에서 비롯된 혐오와 배제는 그 대상들에 대한 폭력 사태로 이어집니다. 혐오와 차별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세력이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이 소설 속에는 이러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취약한 대상 4가지가 드러나 있습니다.

 

(1) 유색인. 흑인 점핑이 대표하는 유색인입니다. 고기 낚시를 하고 돌아오던 백인 소년 둘이 자기 집으로 돌아오던 점핑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참 나, 재수 째지네. 깜둥이가 깜둥이 마을로 가고 있잖아.”(Ain’t we lucky. Here comes a nigger walkin’ to Nigger Town.) 그 말을 듣고 나이 든 점핑이 취한 행동이 어떠했을까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소년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숲 쪽으로 비켜서 있다가 발걸음을 재촉해 황급히 지나쳤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두 놈이 더 지껄입니다. “깜뚱이 노인네가 마을로 가네. 조심해라, 깜둥아. 그러다가 넘어지지 말고.”(Jest an ol’ nigger walkin’ to town. Watch out, niggerꠓboy, don’t fall down.) 그후에는 돌멩이를 집어 들더니 점핑의 등에 돌을 던집니다. 어깨뼈 바로 밑을 명중당한 점핑은 약간 비틀거리더니 계속 걸어갔지요. 이런 상황을 지켜 보고 있던 카야가 급기야 동작을 취합니다. 돌멩이를 더 많이 주워들고 그의 뒤를 따라가던 그놈들을 카야 방식으로 처단한 것이지요. 잼이 든 천 가방을 싸서 비틀어 묶어 쥔 채 그 묵직한 가방을 휘둘러 가까운 녀석의 뒤통수를 가격했습니다. 그후에 다른 놈의 머리를 강타하려고 하니 그냥 뺑소니치고 말았지요. 오랫동안 같은 마을에서 일하고 있는 점핑이란 흑인 노인에게 어떻게 이렇게 어린 녀석들이 험한 욕설을 지껄여 대며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이렇게 빨리 전수되다니요. 우리 속에 내재한 폭력의 뿌리가 깊습니다.

 

(2) 카야. 카야가 상징하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약자입니다. 카야는 어느날 야생 칠면조가 동료들에게 비참하게 죽임당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상처 당한 동료 칠면조가 맹금의 미끼가 되어 자기들에게 위해를 줄까 두려워 미리 죽여버린 것이지요. 바로 그날 밤에 동네 사내 녀석들이 카야의 판잣집으로 쳐들어옵니다. 입으로는, “우리가 왔다, 습지 계집애(Marsh Girl)!”, “어이, 그 안에 있냐? 미개한 유인원 계집애(Miss Missin’ Link)!”라고 호기롭게 소리쳐댔지만, 그놈들은 계단을 내려가더니 나무 사이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습지 계집애, 늑대 아이한테 덤비고도 무탈했다는 안도감에 환호성을 지르며 달아났던 것이지요. 그 이후로도 동네 사내놈들은 어둠을 틈타 카야의 판잣집을 자주 찾습니다. 그 판잣집을 터치하고 돌아가는 게 그들끼리의 성인식(an initiation for boys becoming men)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놈들 중에는 카야의 순결을 누가 처음 훔치게 될지를 두고 내기를 거는 녀석들도 있었습니다. 체이스도 그런 비열하고 비겁한 사내놈들 중 한 명에 불과했지요. 결혼을 빙자하여 카야를 침대로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그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후에도 찾아와 폭력을 행사하면서 강간하려는 그의 면모를 보세요. 카야의 ‘왼쪽 눈은 퉁퉁 부어 감겨버리고 윗입술은 한쪽이 엽기적으로 뒤틀린 채, 얼굴, 팔, 다리가 찢어져 피 묻은 흙투성이’가 되도록 폭력을 가하며 강간하려던 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곳곳을 뒤지며 카야를 찾아다녔습니다, 카야 앞에서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던 그 입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카야를 “덫에 걸린 암여우”(she-fox in a snare), “습지의 암캐”라고 칭하며 모욕하던 그는 비인간입니다. 이런 체이스 같은 망나니, ‘음흉한 바람둥이 섹스 도둑들’(leapfrogging sneaky fuckers)에게 떨어질 형벌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3) 가족. 폭군 남성 가장의 피해자인 가족입니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혐오를 받는 가족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는커녕, 카야 아버지(제이크)는 그 소외된 가정 속에서 폭군 노릇을 자처했습니다. 그의 가족 학대는 소름 끼칩니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고함치고 난동을 피우면서 가족 모두에게 손찌검을 해댔으니까요. 언젠가 아버지한테 밀쳐져 부엌 벽에 심하게 부딪힌 엄마가 쓰러지자, 카야가 그의 소매를 붙잡고 울면서 빌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카야 어깨를 움켜쥐고 청바지와 팬티를 내리라고 하더니, 자기 벨트를 끌러 그 어린 카야를 매질했습니다. 이 아버지의 학대는 카야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엄마가 떠나기 직전 부활절 예배는 카야가 마지막으로 교회에 갔던 때였습니다. 그 부활절은 비명과 유혈, 누군가 쓰러지고 엄마와 함께 도망쳤던 기억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야는 아예 부활절을 머리에서 지워버렀습니다. 그후에 엄마와 함께 간 교회에서 배운 찬송 중 일부[“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주가 나와 동행을 하셨네”, “새찬송가” 422장]가 기억나 부르다가 잡초만 뒤덮인 텃밭을 보면서, 카야가 고백하지요. “됐어, 집어치워. 이런 정원에 주님이 찾아올 리 없잖아.”(Just forget it. No god’s gonna come to this garden.) 홀로 유기된 카야의 집에 교회에서 누군가 단 한 사람도 찾아온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 사모라는 여자가 카야를 대한 것을 보세요. 도대체 그들이 믿는다는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일까요?

 

카야 아빠의 지속적인 폭력 행위는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의 폭력에 견디다 못한 엄마가 집을 떠난 것뿐 아니라, 폭언과 폭력을 상습적으로 당한 자녀들도 카야를 제외하고 다 떠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카야와 함께 있다가 집을 떠난 조디의 경우는 최악입니다. 제이크가 불쏘시개로 엄마 가슴을 쳐서 부활절 축하용으로 입은 “꽃무늬 선드레스에 붉은 피가 풀카도트 무늬처럼 흩뿌려졌”을 때, 조디가 그에게 달려들다 그 불쏘시개로 얼굴을 맞아 턱이 흉측하게 일그러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그를 엄마가 일으켜 바느질하는 바늘로 그의 얼굴을 꿰맨 덕에 평생 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조디는 나중에 카야를 만나, “그 괴물하고 살게 널 두고 떠나는 게 아니었어.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어. 끔찍하게 괴로웠어. 내가 겁쟁이였어. 멍청한 겁쟁이였어. 이 빌어먹을 훈장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라고 후회하지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엄마가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던 중에 이모 도움을 받아 제이크에게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살게 해 달라고 편지를 보냈을 때, 제이크가 뭐라고 답변했을까요? 감히 돌아오거나 누구에게라도 연락하려고 하면, 아이들을 형체도 못 알아보게 팰 거라고 답장했습니다. 제이크가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안 엄마는 희망을 접었다고 하지요. 이런 야만적인 남성 가장들의 폭력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자기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불경하고 자기들이 섬기고 보살펴야 할 가족들을 타자화하고 도구화하는 뿌리 깊은 이기심입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본업인 사탄의 꾐도 그 이기심에 불을 지폈겠지요(요한복음 10:10). 이런 제이크 같은 ’괴물‘(monster)에게 떨어질 형벌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4) 생태계. 탐욕에 찬 인류가 착취하고 파괴해 온 자연 세계입니다. 카야를 놀리는 별명들을 다시 한번 주목해 보면 그것들 속에 자연 세계와 연관된 것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상거지 암탉’(little beggar-hen), ‘반인 반늑대’(part wolf), ‘습지 암탉’(marsh hen), ‘늪 시궁쥐’(swamp rat), ‘유인원 계집애’(Miss Missin’ Link) 및 ‘늑대 아이’(the Wolf Child)로 부르면서 더럽다고 하지요. 자연 그대로의 세계는 누추하거나 더럽고, 그 속에 사는 동물들은 미개하고 미발달되어 지능도 낮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이 바클리코브 주민들은 현대인들의 대표입니다. 자연으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을 공급받아 살아가면서도, 자연을 철저하게 도구화하여 개발하거나 착취하는 데 몰두해 있을 뿐 자연을 존중하면서 돌보아 줄 생각은 염두에 두지 않는 현대인들말입니다.

 

예컨대 테이트가 말한 대로, 사람들은 낚시할 때를 제외하고는 습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저 “매립해서 개발해야 할 황무지”(wasteland that should be drained and developed)로만 생각합니다. 바다 생물을 낚시해서 먹고 살면서도 그것들에게 습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지요. 개발 명목으로 습지의 물을 빼면 그 물길 따라 살아가는 동식물들이 죄다 죽어버립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에 주목할 리가 없는 현대인들이 그 개발 결과, 습지 너머 수십 킬로미터에 걸친 땅이 메마르게 되어 그 흙 속에 있는 씨앗들이 흙을 뚫고 나올 수 없다는 것에 관심을 둘까요? 비록 토양이 생명으로 응축되어 있어 가장 소중한 지구 자산 중 한 가지이긴 하지만, 물이 없이는 그저 생명력 잃은 메마른 땅일 뿐입니다.

 

사실상 이 소설의 악당인 체이스는 이 영역에서도 현대인의 대표입니다. 그도 다른 일반인들처럼 습지를 “착취할 대상”(a thing to be used)으로만 보았습니다. 그저 보트 타고 낚시하는 대상이거나, 매립해서 농사지을 대상으로만 여겼던 것이지요. 그런 인물이 카야를 이해할 리 없지요. 습지 생물이나 하천에 대해 그녀가 품고 있는 지식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사슴 곁을 지날 때 소리를 내지 않거나 새 둥지 근처에서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그녀의 배려에 대해서는 비웃지요. 조개껍데기나 깃털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습지에 대해 배우고 싶어서 카야가 일기장에 메모하거나 표본을 채집하는 것에 대해서도 코웃음을 칩니다. 이런 인물이 조개껍데기 속에 살아 있는 생물이 산다는 걸 알고 있거나, 그것에 관심을 가질까요? 주위의 자연 세계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세밀하게 주목하던 카야가 체이스의 이런 인물 됨됨이를 간과한 게 그렇게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로움을 해소하고 싶어 시작한 체이스와의 연애 감정이 그녀의 판단력을 흐린 것이겠지요.

 

카야가 체이스의 차를 타고 애슈빌로 가는 동안 관찰한 황량한 주위 환경은 그녀가 이내 직면할 황폐한 인간관계의 서곡에 불과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은 그녀에게 낯익은 풍광, 즉 억새와 물길들을 지나쳤지만, 갑자기 습지의 평원이 불쑥 끝나고 먼지 덮인 경작지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숲들을 싹 베어버린 벌판에 불구가 된 등걸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전선이 늘어진 전봇대들이 길가에 쭉 이어진 것을 보고 카야는 “사람들이 땅에다 무슨 짓을 한 걸까?”라며 경악합니다. 자연은 사라지고 온통 인공적인 것들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두 상자 모양 같은 집들, 잘 깎은 잔디밭, 분홍색 칠한 플라스틱 홍학 한 마리, 시멘트로 만들어진 사슴, 우체통에 그려진 날아다니는 오리들. 결국 체이스의 꾐에 빠진 그녀는 “야자나무 모양의 네온사인이 빛나는” 호그마운틴로드 외곽의 허름한 모텔에서 그의 성욕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지요.

 

나중에 카야는 자기 첫 번째 책의 선인세 중 일부를 떼어 급히 자기 가족이 살던 땅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는 데 씁니다. 어느 날 점핑에게 들은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거물 개발업자들이 컴컴한 늪의 물을 빼고 호텔을 지을 거창한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야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 해에 중장비들이 동원되어 참나무 숲 전체를 베어버리고 물길을 내어 습지를 마른 땅으로 바꾸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 단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개간을 마친 후에는 갈증에 허덕이는 땅과 그 아래 딱딱한 불투과성 점토층(hardpan)만 남겨두고 새로운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이 점토층은 배수도 잘되지 않고 식물의 뿌리 성장에도 불리한 기반이지요. 인간들에게 온갖 착취와 훼손을 당해도 아무 말 없이 자기의 풍요로운 산물들을 은혜롭게 나누기만 하는 자연계에 대해 거듭 파괴적인 폭력을 가해 온 인간들에게 어떠한 형벌이 적당할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