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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배우고 글 쓰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8. 1.

배우고 글 쓰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블로그 네 살 생일을 맞이하며-

 

오늘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 블로그가 네 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첫 글을 집필할 때 블로그가 이렇게 다양한 내용을 담은 장으로 전개될 줄은 몰랐습니다. 무엇보다 인문학과 성경이 서로 길항(拮抗)하는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니라, 상보(相補)하는 관계 속에 있다는 점을 다각도로 모색한 것이 보람 있었습니다. 그 구체적 실례로 서양 고전 소설 작가 23명의 작품들을 성서인문학적 시각으로 독해한 것은 앞의 보람이 더욱 영그는 과정이었습니다. 38편의 영문 설교가 담기게 될 줄도 꿈꾸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겨냥하여 맹공을 퍼부은 버트런드 러셀의 유명한 연설문에 대해 5편의 평론을 제시한 것도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습니다. 잠언 16:9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The mind of man plans his way, But the LORD directs his steps.)

 

-소명 누리기-

저는 21년간 말레이시아인들을 섬기는 소명을 누렸습니다. 말레이시아의 한 국립 대학에서 가르친 기간은 13년이었지만, 그 나머지 시간도 대학의 장 속에서 공부하며 젊은이들을 만나 교제했습니다. 말레이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지만, 중국계와 인도계 젊은이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할 때 든 생각이 있습니다. 인문학과 성서를 통합하는 공부와 글쓰기에 시간을 드려야겠다는 소망이었습니다. 이 소망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의 장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제게는 이것이 인생3막의 소명입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보면 감동적인 소크라테스의 고백 한 가지가 나옵니다. 그의 인생관의 요체가 드러나 있는 설득력 있는 언명입니다. 요는 누구든지 자기가 생각해서든 지휘관이 명령해서든 어느 한곳에 자리를 잡게 되면 어떤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 자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그 자리를 떠나는 것처럼 치욕스러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고수한 두 자리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자기의 지휘관들이 포테이다이아와 암피폴리스와 델리온에서 자기에게 자리를 정해준 경우입니다. 당시에 그는 죽음을 불사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둘째는 신께서 “나 자신과 남들을 탐구하며 철학자의 삶을 살라.”라는 자리를 정해주신 경우입니다. 당시에 그는 그 자리를 지키다가 아테네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신께서 자기에게 그 자리를 주신 것을 확신하기에 그는 “죽음이나 그 밖의 다른 것이 두려워서 내 자리를 뜬다면, 나는 심한 자기모순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그 자리와 자기 목숨과 바꾸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천명한 것이지요. 여기에서 사생관두에 선 그의 사생관이 드러납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이 최대의 축복이 될지 모르는데도, 죽음이 최대의 불행이라는 점을 다 아는 양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이지요.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자리를 받은 것이 제가 “하늘과 땅을 잇는 성서인문학자”의 자리를 받은 것과 비교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인해 목숨의 위협을 받을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자리를 누리다가 주님께 돌아가게 된다면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드는 주된 이유는 제가 공부하기와 글쓰기와 가르치기를 즐기고 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빚으셨다고 믿습니다. 미국 소설가인 플래너리 오코너가 학교에서 가르칠 때 한번은 어느 학생이 “오코너 선생님, 왜 글을 쓰시나요?”(Miss O’Connor, why do you write?)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녀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제가 잘하는 일이니까요.”(Because I’m good at it.)였습니다. 그녀가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잘 하는지를 깨닫기 위해 늘 기도한 결과였습니다. 그녀의 기도가 제 여생의 기도가 되길 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하나님, 부디 제게 자리를 하나 주소서. 아무리 작더라도 상관없사오니 제가 그 자리를 알아보게 하시고 그곳을 지키게 하소서. 제가 두 번째 계단을 매일 닦아야 한다면, 제가 그 사실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닦게 하시고 그 일을 하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But dear God please give me some place, no matter how small, but let me know it and keep it. If I am the one to wash the second step everyday, let me know it and let me wash it and let my heart overflow with love washing it.)

 

-심금 울리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의 기조는 ‘이성과 감성이 통합된 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진작하기 위해서 근거가 희박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주장 대신 논증과 예증으로 심금을 울리는 글쓰기가 그 방향입니다. 인문학은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한마당이고,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대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열어 밝혀 주신 계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세계가 진리로 이루어져 있다면 서로 상충될 리가 없습니다. 성경이 인문학을 조명해 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은 성경의 진리를 상보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제가 소개한 서양 고전 소설 중에는 무신론자나 그리스도교에 대해 배타적인 이들의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작품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논증하고 예증하는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인간의 죄성의 깊이와 인간의 좌절의 정도 및 인간의 갈망의 절절함을 그 소설들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제시된 현실적인 인물들의 삶은 작가들의 의도와는 달리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를 설득력 있게 밝혀 주었습니다. 예컨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로마서 3:23)라는 보편적이고도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확연하게 드러내 준 것이지요. 한편으로 소설 속에는 심각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인간의 죄성과 인간의 절망에 대한 증언과 사례는 넘치지만, 장래의 소망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채워 줄 근거는 항상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였겠지요. 아름답고 도전적인 인생의 기록도 넘친 만큼, 참혹한 인생 여정의 절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품이 많았습니다. 땅만 바라보고 탐색했을 뿐, 하늘에서 비롯된 계시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 지적한 대로입니다. “절망은 극도의 교만이 진전된 상태여서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창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적 확신감을 선택한다.”(Despair is a development of pride so great that it chooses one’s certitude rather than admit God is more creative than we are.) 땅을 무시하고 하늘만 바라보자는 말이 아닙니다. 파도 파도 절망뿐인 땅 대신 영원히 창의적인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새 땅과 새 하늘'을 탐색하고 소망하는 게 지혜라는 말입니다. 인문학과 성서는 각각 서로를 비추어 주고 빛내 주는 거울이 됩니다.

 

인문학의 관점과 성서의 시각을 통합한다고 해서 자연 과학과 담을 쌓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현대인들 중에는 과학(science) 혹은 자연 과학은 이성(reason)의 산물이지만, 그리스도교(Christianity)는 비이성적인 신앙(belief)의 산물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과학과 그리스도교가 서로 다른 차원 혹은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과학은 관찰(observation)과 실험(experimental investigation)을 통해 자연 현상을 묘사하고 이론화하는 영역인 데 반해,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혹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해 인간의 본질과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계시한 영역입니다. 이 두 영역이 같은 차원이나 범주에 속한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자연 현상인 중력이나 자력이 역사, 문화, 지역을 꿰뚫는 보편적인 원리(道, Tao)나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인간의 갈망과 동일한 차원이나 범주에 있다고 간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학과 그리스도교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 자연 현상을 궁구하기 위해선 자연 과학적 방식을 활용해야겠지만, 인간의 본질과 인생의 목적을 천착하려면 하나님과 당신의 계시를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길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후자의 영역도 과학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입장이 바로 과학주의(scientism)입니다. 자연 과학적 방식만이 유일하고 올바른 진리 탐구 방식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이 과연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을까요? 어림도 없지요. 이쯤 되면 과학주의도 신앙의 영역에 진입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과학주의 둘 다 이성과 감성으로 분별하여 선택해야 할 신앙의 영역인 것이지요. 이렇게 확연한 사실을 오도하는 과학주의(scientism) 신봉자들의 꾐에 놀아나는 현대인이 전 세계에 수두룩합니다. 과학은 합리적인 이성의 결과이지만, 그리스도교는 비이성적인 신앙의 결과라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 현대 사회의 최대 비극 중 한 가지입니다. 이런 이들을 향해 독일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로서 195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보른(Max Born)이 일갈합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것들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거나 인식론과 같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내가 반복해서 말했듯이, 그것들은 참으로 ‘물리학을 넘어선’ 문제들이며 믿음의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솔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에는 불쾌감을 주는 신자들 두 부류가 있다. 터무니없는 것을 믿는 사람들과, 저 ‘믿음’을 버리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Yet there are metaphysical problems, ‘which cannot be disposed of by declaring them meaningless, or by calling them with other names, like epistemology. For, as I have repeatedly said, they are ’beyond physics‘ indeed and demand an act of faith. We have to accept this fact to be honest. There are two objectionable types of believers: those who believe the incredible and those who believe that 'belief' must be discarded and replaced by “the scientific method.”) (“Natural Philosophy of Cause and Chance”, 1949)

 

유대인 물리학자인 보른이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물리학의 범주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믿음을 요구한다면서 이 사실을 정직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주목해 보세요. 그리고 그는 이 믿음의 범주 속에 두 가지 양극단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비이성적인 것들을 믿는 자들과 과학주의에 빠진 자들이라는 양극단의 ‘신자들’이지요. 그는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이 양극단의 신앙 사이에 합당한 것(the reasonable)을 믿는 것과 건전한 믿음(sound beliefs)을 추론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보았습니다. 보른은 이렇게 건건한 “믿음, 상상력 및 직관”(Faith, imagination, and intuition)이란 영역들이 다른 인간 활동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진보에 결정적인 요소들로 기여한다고 인식했습니다. 이성과 감성이 통합된 신앙은 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 활동에 건전한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샘물 나누기-

그동안 성서와 인문학의 통합 과정을 통해 거듭 깨닫게 된 교훈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물질과 힘을 우상으로 섬기는 우리나라, 아니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길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당신의 뜻과 경륜을 좇아 이웃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각자의 은사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게 당신의 경륜이기에, 공부하고 깨달은 내용을 글로 작성하여 이웃에게 나누는 게 제 몫이겠지요. 덕을 세우는 것은 유념하되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자기검열은 삼갈 일입니다. 오로지 복음의 문과 말씀의 문을 열어 주실 하나님의 인도만 바라보며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만 기뻐하며 이미 허락해 주신 복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기 원합니다. 언젠가 "박명수의 라디오쇼"를 듣던 중에 그의 혜안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SNL”에서 주 기자 역으로 열연 중인 주현영 씨와 인터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녀가 손흥민 선수와의 인터뷰에서 많이 떨었다고 했을 때 박명수 씨가 이렇게 말을 던집니다. 

 

"그렇게 이제 월드와이드 스타들과 만나서 해 봐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떨지 마시고. 현영 양이 최고니까, 편안한 맘으로 앞으로 하시면 돼요. 그게 다 경험이에요. 저도 웬만한 사람 다 만나는데 떨리지도 않아요. 내가 그 사람한테 뭘 바라니까 떨리는 거에요. 일대일로 만나 얘기하는데 떨릴 게 뭐 있어요.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사는데. 그런 생각 가질 필요 없어요. 저한테도 떨지 마시고. 편안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얘기하시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제게 도움을 베풀어 줄 만한 사람이나 단체나 회사를 기웃거리지도 않을 양이면, 누구를 의식할 필요가 있으며 누구 앞에서 떨 이유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제가 하는 일은 대가를 받지 않고 나누는 일입니다. 하늘과 땅의 신비로운 보물을 거저 베풀면서 수령자의 반응이나 그 숫자에 연연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언젠가 써 본 표현처럼, '깊은 산 속 옹달샘'은 누군가의 관심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목 마른 사람이면 누구나 와서 마시면 됩니다. 값없이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