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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사법 정의를 구현한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6. 1.

사법 정의를 구현한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

‘검찰 공화국’에 살면서 신뢰도 꼴찌 격인 사법부에 신체 및 재산상의 안위를 맡겨야 할 운명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사법 정의가 구현되는 날을 꿈꾸고 그 날을 위해 기도하며 사법 개혁의 길을 새롭게 도모해 가는 게 절실한 과제입니다. 그 날을 꿈꾸는 데 도움이 되는 길 중 하나가 문학을 통해 덕스럽고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이 펼쳐지는 이야기의 세계를 접하는 것입니다.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 교수의 지적처럼 세계 최고의 문학에 제시된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은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지식과 갈망을 함양하는 매개(agents)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an idealized picture of human nature)를 지속하려는 감상벽(sentimentality)이나 자기기만(self-deception)이 추동하는 비전과는 다릅니다. 문학 작품 읽기는 역사와 현실에 근거하여 인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누리는 과정으로서, 정보를 제공하는(informative) 측면도 있지만 인격을 형성해 주는(formative) 측면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 작품을 잘 읽는 것이 “덕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식”(a way to practice virtue)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문학 작품을 “잘 읽는 것은 우정(a friendship)과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무언가를 더해 주어 우리를 영원히 바꿔 놓습니다(altering us forever).” (Karen Swallow Prior, “On Reading Well: FINDING THE GOOD LIFE through GREAT BOOKS”) 도덕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도 동일한 지적을 하고 있지요. 문학 형식(literary form)은 덕스러운 삶의 형식을 반영하여 우리가 “좋은 이야기의 선한 캐릭터들이 살아가는 대로 살도록 가르치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고, 모든 새로운 일을 지혜롭게 직면하고, (...) 진리를 추구”하도록 촉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의 취지는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는 것만이 탁월한 덕을 함양하고 좋은 삶을 성취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이 아닙니다. 다만 문학에는 진선미에 근거한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형성하는 특별한 힘이 있으니 그것을 수용하라는 것이지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

사법 정의나 사법 개혁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를 때마다 제게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사회적 공의나 법률적 정의를 다룬 문학 작품이 많이 있지만, 제게는 이 영화가 더없이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영화의 각본은 원래 텔레비전 드라마용 각본을 각색한 것이기에, 다른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각본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위대한 문학 작품이 영화화될 때마다 그 작품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훼손되어 독자들의 실망스러운 탄식이 쏟아지는 경우와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즉 이 영화는 원 작가가 의도한 내용이 거의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앞에서 논의한 문학 작품의 효용성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는 본이 됩니다. 이 영화는 시드니 루멧(Sidney Lumet) 감독, 레지날드 로즈(Reginald Rose) 각본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입니다. 영화 애호가들 중에 역대 최고의 법정 영화 중 하나로 꼽히고 있지요.

 

이 영화는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받은 18세 소년에 대해 12명의 배심원들이 만장일치 무죄 평결을 내리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증인은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그 피고의 집 아래층에 사는 노인으로서 피고가 그날 밤 12시 10분경에 아버지를 칼로 찌른 후 계단을 내려와 도주하는 것을 봤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피고 집 건너편에 사는 40대 중반의 여자로서 밤에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가 고가 전철(El Train)이 지나가는 상황 중에 길 건너편[60피트=18미터 거리]에서 피고가 아버지를 칼로 찌르는 것을 봤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칼[손잡이를 누르면 칼날이 튀어나오는 잭나이프의 일종인 ‘switchblade knife’]이 주요한 증거로 제시되지요. 배심원들이 이 증인들과 증거들의 다층적인 면모를 다루면서 결국 무고한 피고를 구해 내는 이 영화는 1957년 4월 10일에 개봉한 이래로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96분 상영 시간 대부분을 배심원들이 한 방에서 토의와 격론을 펼치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설득하는 독특한 영화이지요. 그 배심원 중에 “분노의 포도”(1940)의 주인공인 헨리 폰다[Henry Fonda, 제인 폰다(Jane Fonda)의 아버지]와 “세일즈맨의 죽음”(1966)의 주인공인 리 J. 콥(Lee J. Cobb)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중에서 배심원 8번 역을 맡은 폰다는 피고의 무죄를 가장 먼저 제기한 반면, 3번 역을 맡은 콥은 가장 나중에 무죄를 인정하지요. 이 영화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우리나라 작품은 아직 수상한 적이 없음]을 수상하고 미국 영화협회에서 “알라바마 이야기”(To Kill a Mockingbird, 1962) 다음으로 훌륭한 법정 드라마로 평가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사람이 길을 연 무죄 평결 여정-

우선 이 무죄 평결 여정의 선구자가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배심원 12명이 평결을 내리기 위해 한 방에 모였을 때, 처음에는 1명을 제외한 11명이 유죄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한 명이 바로 8번 배심원이었습니다. 왜 그는 무죄라는 쪽에 섰을까요? 18세 청소년의 생명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아무런 토의를 해보지 않은 채 5분 만에 평결을 내리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료 배심원들에게 1시간 동안만 토의해 보자고 제의합니다. 더구나 피고는 9세에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1년 반 동안 아버지가 위조범으로 복역하던 중 고아원에서 자란 불우한 아이였던 정상(情狀)을 참작하자고 말합니다. 이런 입장표명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도의적이긴 했지만, 무모하다고 할 만큼 어리석게 보이는 제안이기도 했습니다. 그 사건의 증인들과 증거 외에도 피고의 전력이 무죄 평결을 이끌어 내기에 너무 불리했기 때문입니다. 배심원 7번이 지적한 대로 피고는 5:0이었습니다. 10세에 교사에게 돌을 던져 아동법원(children’s court)에서 재판받은 적이 있습니다. 15세에는 차를 훔쳐 소년원(reform school)에서 지냈습니다. 노상강도 행위(mugging)로 체포된 적도 있고, 칼싸움(knife fighting) 때문에 두 번이나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문제가 된 사건의 증거인 칼에 능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배심원 8번이 이런 전력에 영향을 받아 선입견을 품게 되어 다른 배심원과 뜻을 같이 했다면, 그 피고는 단박에 무고한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피고에게 불리하게 형성된 강력한 첫인상을 극복한 후에, 다른 배심원들에게 1시간 동안만 증인과 증거들을 다시 한번 함께 점검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배심원 8번은 평결 토의 각 단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지만, 무엇보다 주요한 그의 역할은 평결 토의의 방향을 제시한 데 있습니다. 그의 역할 세 가지가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첫째, 배심원 2번이 아무도 그 소년이 무죄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기에 유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사법 제도에 대한 미국 헌법 정신을 상기시킵니다. “아무도 피고의 무죄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입증 책임은 검찰에 있습니다. 피고는 입을 열 필요조차 없습니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요.”(Nobody has to prove otherwise. The burden of proof’s on the prosecution. The defendant doesn’t even have to open his mouth. That’s in the Constitution.) 둘째, 자기 의견을 말할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변호인의 엄중한 책임을 지적합니다. 6일간의 재판에서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데도 증인들의 말은 “너무 확실하게”(so positive) 들려 피고는 유죄처럼 보였지만, 변호인이 “충분히 철저한 반대 심문”(thorough enough cross-examination)에 임하지 않은 게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그 피고의 입장에 두고 본다면, “검찰 증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거나 최소한 그렇게 시도조차 하지”(I’d want my lawyer to tear the prosecution witnesses to shreds, or at least try to.) 않는 그 변호인을 선임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짐작한 대로 그는 “국선”(court-appointed) 변호인이었고, 처음부터 가망이 없는 재판에 자기가 임명된 데 대해 분개할 수 있는 인물에 불과했지요. 셋째, 4차 배심원 투표 결과를 보고 배심원 10번이 흥분하여 큰소리를 지르며 자기 이전 선입견을 되뇔 때, 배심원 4번이 그를 앉힙니다. 바로 이때 배심원 8번이 다시 한번 미국 사법 제도의 본질을 피력합니다. “이런 일에서 개인적인 편견을 배제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편견은 항상 진실을 가리기 마련이지요. 저는 진실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도 진짜로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 하지만 우리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우리 시스템에서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배심원도 확실하지 않으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습니다. 저희 9명은 어떻게 세 분이 여전히 그렇게 확신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It’s always difficult to keep personal prejudice out of a thing like this. Wherever you run into it, prejudice always obscures the truth. I don’t really know what the truth is. I don’t suppose anybody will ever really know. (...) But we have a reasonable doubt and that’s something that’s very valuable in our system. No jury can declare a man guilty unless it’s sure. We nine can’t understand how you three are still so sure. Maybe you can tell us.)

 

이런 내용이 먼 나라만의 이야기일 수 없습니다. 모든 형사 사건에서 범죄행위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국가가 집니다. 피의자가 자신이 살인자이거나 사기꾼이거나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이미 이전 글에서 언급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우에도, 사형당한 8명 역시 사형당할 만한 죄를 범했다는 물증이 없었으며, 있다고 주장하는 게 고문에 의한 자백뿐이었지요. 그래서 재심이 필요했습니다. 이 국가적 범죄의 장본인은 박정희였지만, 아무리 정치적 상황을 핑계 삼는다 해도 사법부가 모든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면죄될 수는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근본 이치를 생각하고 근원적 원리를 고려하는 이가 긴요합니다. 아무리 다급하고 긴박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도, 그러한 이치와 원리에 주목하는 한 우리는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이런 역할을 해야 할 책임과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이 지닌 끈질긴 영향력-

이 영화가 훌륭한 법정 드라마로 평가받은 다음 이유는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근거 없는 편견과 선입견을 적나라하게 열어 밝혔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을 대하는 영역에서 우리가 저지른 이런 측면의 과오들이 떠오르지 않는 이가 어디 있을까요? 특히 이 영화에서 마지막까지 유죄 심증을 포기하지 않은 편견과 선입견의 끝판왕 3인방(10번과 3번과 4번)은 우리의 반면교사입니다. 배심원 10번은 처음 발언할 때부터 피고와 같은 아이들은 죄다 “타고난 거짓말쟁이”(born liars)로 단정합니다. 배심원 4번이 언급한 슬럼 출신 소년들에 대한 의견에 동의하면서, 그 아이들은 “진짜 쓰레기”(real trash)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4차 투표 결과가 9:3으로 무죄 의견이 우세하게 나오자, 흥분하여 큰소리를 지르면서 이전의 선입견을 되뇌기도 하지요. 즉 그놈들은 본성상 거짓말쟁이고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감정도 없으며 한 명도 제대로 된 놈이 없다고 강변합니다. 이때 배심원들이 한 사람씩 일어나 그와 대면하지 않으려고 등을 돌린 채로 서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유죄 의견을 품고 있던 3번조차도 등을 돌리고 서 있지요. 이런 분위기에 당혹한 배심원 10번이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계속 다그치자, 그를 바라보며 앉아서 말을 듣던 배심원 4번이 한마디 합니다. “이제 자리에 앉으시고 다시 입을 열지 마세요.”(Now sit down and don’t open your mouth again.)

 

배심원 3번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배심원 8번이 피고가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자랐다고 지적하자, 배심원 7번이 그런 아이라면 자기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빈정댑니다. 그때 배심원 3번은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요, 뭐.”(It's these kids, the way they are nowadays.)라면서, 한마디 덧붙입니다. 자기가 어릴 적에는 아버지를 “sir”라고 불렀다고. 그러면서 다른 배심원들에게 묻지요. 어느 애가 자기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는 걸 본 적 있냐고. 사실상 그는 자기 유일한 아들에게 당한 게 있어 쓴 뿌리가 잔뜩 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재 22세 된 그 아들이 어릴 때(9세) 싸워야 할 상황에서 도망치는 걸 보고 답답해서 붙잡아 두고 남자답게 키웠더니, 16세에 자기 턱을 날릴 만큼 건장하게 컸다고 하면서 지난 2년간 보지 못했다고 술회합니다. 이런 그는 다른 배심원들이 합리적인 토의를 거쳐 피고의 무죄를 표명한 상황에서도, 신사답게 승복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던 길 건너편 여자의 증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 상황에서도, “혼자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요! 제 권리니까요”(I don’t care whether I’m alone or not! It’s my rght.)라고 고집을 피우지요. 그러면서 이미 논의된 사안들을 다시 죄다 들먹입니다. 그 모든 증거가 여기 있다며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들[자기와 아들과 함께 직은 사진도]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집니다. 다른 배심원들이 자기만 빤히 쳐다보고 아무 말이 없자, “말 좀 해보세요!”(Say something!)라며 외칩니다. 그때 자기 아들과 찍은 사진이 눈에 띄자, “썩은 녀석들. 너희들 인생이나 제대로 해결하란 말이야!” (Rotten kids. You work your life out!)라고 외치면서, 그 사진을 갈가리 찢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머리를 왼손 등에 묻고는 괴로워하며, 흐느끼면서 “무죄예요”(Not guilty)라고 두 번 속삭입니다. 특정 세대나 특정 지역 주민들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을 편견과 선입견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상태에 있다 보니, 이 배심원들은 자기주장을 펴다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도 여러 번 목격됩니다. 배심원 10번의 경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층 노인이 한 증언의 신빙성을 논의하던 중에, 배심원 8번이 피고는 “아주 영리해서”(too bright) 다른 이웃들이 다 듣도록 자기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소리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하자, 배심원 10번이 응대합니다. “영리하다니? 그는 흔해 빠진 무식한 얼간이예요. 영어도 잘 못해요.”(He don’t even speak good English.) 그때 배심원 11번이 교정해 주지요. “He doesn't even speak good English.” 부지불식간에 자기 영어 실력이 탄로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절대적인 유죄 우위(11:1) 상태에서 시작된 논의가 6:6 상황으로 변한 것을 보고, 그는 한탄하면서 다 돌았다고 단언합니다. 배심원 9번이 이 모든 게 사실을 근거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하자 그가 이렇게 말하지요. “그러지 마세요! 난 사실에 질렸어요!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을 왜곡할 수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Don’t give me that! I’m sick and tired of facts! You can twist them any way you like. You know what I mean?) 그때 9번이 일어나며 지적합니다. “이 신사분(배심원 8번)이 말씀하신 바가 바로 그 점입니다.”(That’s exactly the point this gentleman has been making.) 자기를 비롯한 다른 배심원들이 애당초 그렇게 왜곡된 정보를 접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백한 것이지요.

 

배심원 3번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심원 7번이 얘기하는 중에 아래층 노인이 위층에서 소리가 나서 “문으로 달려갔다”(ran to the door)라고 한 것을 듣고, 배심원 5번이 뇌졸중(a stroke)을 앓은 적이 있는 그 노인이 그렇게 달려갈 수는 없었을 거라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래서 배심원 8번이 배심원 대표(1번)에게 그 아파트의 평면도(diagram)를 요구하지요. 15초 만에 일어나서 자기 방문을 열고 복도를 거쳐 1층 문을 열고 난 후 피고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때 3번이 고함치면서 15초냐, 20초냐가 뭐 중요하냐면서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그는 늙은이예요. 자주 그는 당황스러워했어요. 어떻게 그가 어떤 것에 대해 그렇게 자신 있었겠어요?”(He was an old man. Half the time he was confused. How could he be positive about anything?) 그 노인의 증언 능력을 부인하는 언명이지요.

 

이 경우뿐만이 아닙니다. 실제 아파트 평면도를 검토해 보니 아래층 노인의 증언이 신빙성이 희박하다는 점이 밝혀졌을 때의 상황입니다. 다리를 질질 끄는 노인이 침대에서 자기 방문까지 12피트 가서, 방문을 열고 43피트 복도를 걸어간 다음, 그 끝에 있는 문을 열고 피고가 달려나가는 것을 보는 데 걸린 시간이 15초였다는 말이니까요. 시연해 보니 41초가 걸렸지요. 이 시연 후에 배심원 8번이 자기 생각을 나눕니다. 그 노인이 아마도 살인범이 달려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피고라고 가정했을(assumed) 것이라고. 그러자 배심원 3번이 소리칩니다. “다들 그가 유죄라는 걸 알잖아요! 그는 죽어야 해요! 그런데 당신이 그를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게 놔두고 있잖아요.”(You all know he’s guilty! He’s got to burn! You’re letting him slip through our fingers.) 이 말에 대해 배심원 8번이, “당신이 그의 사형집행인인가요?”(Are you his executioner?)라고 질문하면서, 배심원 3번이 “자칭 공공의 복수자”(a self-appointed public avenger)같이 구는 것은 사실 때문이 아니고 “잔악한 일을 즐기는 사람”(a sadist)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자 그는 “날 놔줘!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Let me go! I’ll kill him. I’ll kill him!)라고 외칩니다. 그때 8번이 응대한 말이 기가 막힙니다. “정말 날 죽이겠다는 건 아니죠?”(You don’t really mean you’ll kill me, do you?) 피고가 이 말을 했다는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설령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진의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 것이겠지요.

 

앞의 두 배심원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배심원 4번도 선입견에 사로잡혀 실언을 몇 번 합니다. 유죄 의견과 무죄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상황(6:6)에서, 피고가 처음 형사들에게 심문당할 때 영화 제목과 영화배우를 기억하지 못한 것의 문제를 다시 논의할 때의 상황입니다. 배심원 8번이 아버지가 살해당한 그 현장에서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피고의 상황[나중에 법정에서는 다 기억하고 얘기함]을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배심원 4번은 극구 반대하지요. 그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고, 나중에 기억해 낸 것은 변호사가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언급하지요. 그때 배심원 8번이 그에게, 어젯밤, 그저께 밤, 3일 전(화요일) 밤, 월요일 밤에 무엇 했는지를 질문합니다. 어제, 그제 일은 잘 기억했지만, 월요일 밤 아내와 함께 보러 간 영화 제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요. “The Remarkable Mrs. Bainbridge”라고 했지만, 그 영화를 본 배심원 2번이 “The Amazing Mrs. bainbridge”라고 교정해 줍니다. 등장인물도 Barbara Long이란 배우만 기억했을 뿐, 다른 배우는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이들이어서 기억하지 못하고 저예산 영화이기도 했기에 기억하지 못한다고 변명합니다. 이때 8번이 급소를 찌릅니다. “감정적인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으셨죠?”(And you weren’t under an emotional stress, were you?). 그러자 없었다고 답하면서 땀을 닦지요[원래 땀을 흘리지 않는다고 말한 그가 땀 흘리는 상황]. 결국 그의 말은 자가당착이었던 셈입니다. 자기는 감정적인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는데도 영화제목과 영화배우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극도의 감정적 스트레스에 처해 있던 피고가 급박한 상황에서 기억해내지 못한 것을 탓한단 말입니까?

 

배심원은 다양한 연령, 성격, 사회적 지위 및 문화적 배경을 가진 12명의 남성입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우리 모두에게 반면교사들입니다. 그들의 행동, 독백 및 대화를 통해 우리 각자도 자신의 세계관, 감정, 과거 경험 및 기억에 의해 다양한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경우처럼 우리도 이러한 것들에서 벗어나기란 수월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까요?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실에 집중하면서 다시 질문해 가되, 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청취함으로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에 드러난 대로 사실에 근거한 질문과 마주하기 전까지 우리는 근거 없는 잣대로 편을 가르고 특정 대상에 낙인을 찍는 공범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우리 각자가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갖춘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해 갈 때, 비로소 보다 온전한 진실에 근접할 수 있는 법입니다.

 

-집단 지성이 이룩한 사법 정의-

유죄 심증을 굳힌 동료 배심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배심원이 있습니다. 바로 배심원 9번과 2번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못한 증인들과 증거의 숨겨진 면모를 찾아내어 유죄 심증을 굳힌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먼저 배심원 9번의 공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그는 외로운 배심원 8번에게 힘을 실어준 첫 번째 배심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혼자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피고가 무죄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저 “확실하지 않다”(not sure)라고 말한 8번을 지지한 것이지요. 배심원 9번의 결정적인 공은 아래층 노인에 대해 논의하던 중에 드러났습니다. 그가 그 노인은 거짓말한 게 아니라, “아마도 그는 그 말[노인과 범인이 다투는 말]을 들었고 피고의 얼굴을 알아봤다고 스스로 믿었을지도 모릅니다.”(But perhaps he made himself believe he heard those words and recognized the boy’s face.)라고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자기가 그 노인을 오랫동안 지켜보니, “그는 찢어진 재킷을 입은 아주 늙은 남자.”(He was a very old man in a torn jacket.)였기 때문입니다. 아주 천천히 자기 왼발을 질질 끌면서 증인대로 가면서 부끄러워 숨기려 했지만, 그가 입은 “재킷의 솔기가 어깨 아래에서 찢어져 있었지요.”(The seams of his jacket was split, under the shoulder.) 배심원 9번은 평생 보잘것없는 존재로 평생을 살아온 그 노인의 심정을 그 방의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인정을 받은 적도 없고 자기 이름이 신문에 난 적도 없었기에, 아무도 자기를 몰랐고 75년 동안 아무도 자기 의견을 묻지 않았던 그의 심정을 말입니다. “여러분,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Gentlemen, that’s a very sad thing to be nothing.)라면서, 배심원 9번은 “단 한 번이라도 인용되는 게 그에게는 아주 중요했습니다.”(To be quoted just once. Very important to him.)라고 말을 맺지요.

 

다음으로 배심원 9번은 끝까지 버티던 배심원 3명 중 가장 핵심이었던 4번의 입장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웁니다. 끝까지 유죄 심증을 굳히고 있는 이유를 추궁당하자, 배심원 4번은 2가지 이유를 댑니다. 길 건너편 여자 목격자의 증언과 피고가 팔을 자기 머리 위로 들어 자기 아버지의 가슴에 내리꽂았다(stab down into the father’s chest)는 생생한 묘사를 지적합니다. 이때 배심원 3번이 옆에서 소리를 치며 거들어주면서 5차 투표를 제안하자, 배심원 4번에게 추궁받던 배심원 12번이 유죄라고 번복하여 무죄 우세인 8:4의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은 배심원 3번이 “불일치 배심”(a hung jury)을 선언하자고 제안하자 반대가 일지요. 배심원 4번이 그 대신 시간[현재 6:15이니 7.00까지 토의]을 정해서 “불일치 배심”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4번이 이런 제안을 하면서 안경을 벗고, 눈과 눈 사이를 계속 주무르자, 배심원 9번이 그에게 괜찮냐고 질문한 후에 한마디 덧붙입니다. 배심원 4번이 안경을 쓴 탓으로 코 윗부분 양쪽에 안경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 목격자 여자도 그 자국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자기는 “정상 시력”(twenty-twenty)이라면서, 그 여자도 배심원 4번처럼 미간을 자주 주물렀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지요. 그때 배심원 5번이 자기도 그 점을 많이 목격했다고 지지해 줌으로써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배심원 9번은 계속 자기 논지를 이어갑니다. 45세쯤 되어 보이는 그 여자는 “자기의 첫 공개 출연을 위해”(for her first public appearance) 35세 정도로 보이려고 애를 많이 썼다구요. 즉 화장도 짙게 하고, 머리도 염색하고, 젊은 여성이 입을 법한 새 옷을 입지만, 여자들이 대개 그렇게 하듯이 안경은 안 썼다고 말입니다. 배심원 3번이 그게 무슨 문제냐고 소리치며 항의했지만, 배심원 9번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배심원 4번에게 도전합니다. 이 눈 옆 자국이 안경 아닌 것으로 생길 수 있느냐고. 4번이 그럴 수 없다고 솔직히 응대하지요. 그때 배심원 3번이 자기는 그 자국을 못 보았다고 소리치니, 배심원 4번이 신사답게 고백합니다. “나도 봤어요. 이상하지만,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배심원 3번이 그 증인이 안경을 끼지 않은 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따지자, 배심원 8번이 배심원 4번에게 묻습니다. 잘 때 안경을 쓰느냐고. 잠 잘 때 안경 쓰고 자는 사람은 없다고 응대하지요. 그래도 배심원 3번이 계속 징징대자, 배심원 11번이 한마디 합니다. “그녀는 밤에 안경 없이도 60피트 떨어진 사람의 신원을 식별할 수 있어야 했다는 말이에요.” 2번도 한마디 거들지요. “그런 증거를 가지고 누군가를 죽게 내보낼 수는 없어요.” 배심원 8번이 배심원 3번에게 그 증인이 잘못 볼 가능성이 없느냐고 도전하자, 3번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며 우깁니다. 그때 배심원 8번이 일어나 안경을 쓰는 배심원 12번에게 다가가 그럴 가능성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다시 입장을 번복합니다. 이즈음에 낙담하여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배심원 10번에게 배심원 8번이 다가가 피고가 유죄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지요. 그도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끝으로 배심원 4번에게도 물으니, “아니오. 난 확신해요. 무죄입니다.”라고 답변합니다. 배심원 3번이 4번에게 “어떻게 된 영문이에요?”(What’s the matter with you?)라고 말하자, 배심원 4번이 응답하지요. “이제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I have a reasonable doubt now.)

 

다음으로 배심원 2번의 기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배심원 8번에게 범행에 사용된 잭나이프를 좀 보자고 하더니, 칼로 찌르는(stab) 방식에 대해 지적합니다. 피고는 5.7피트이고 아버지는 6.2피트인데[차이가 7인치=18센티미터], 피고가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내리꽂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배심원 3번이 시범을 보인다면서, 서 있는 배심원 8번에게 다가가 칼날이 아래로 가도록 손잡이를 잡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연합니다. 그렇지만, 배심원 5번이 다가와서 그 칼을 쥐더니 다른 배심원들에게 “칼싸움”(a knife fight)을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잭나이프(‘switchblade knife’)를 그렇게 쥐면 손을 바꾸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칼날이 위로 향하도록 손잡이를 잡는 자세”(underhanded)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배심원 2번은 평결 회의 처음에는 아무도 그 소년이 무죄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기에 유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3차 투표 때 마음을 바꾼 이후부터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부 사항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배심원 논의에 기여했습니다. 배심원 4번이 영화 제목을 잘못 말했을 때 바로 잡아준 것이 바로 그였지요. 여자 증언이야말로 이 사건의 중심이라던 배심원 3번이 그 증인의 증거 능력의 문제점이 부각된 후에도 고집을 부리면서 그 모든 증거를 어떻게 할 거냐고 소리치자, 그것 외에 “다른 증거는 다 버려도 된다고 하셨잖아요.”라고 상기시켜주기도 하지요.

 

배심원 9번과 2번은 평결 회의 시작 시점에는 존재감이 없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토의가 이어질수록 그들의 진가는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다른 배심원들이 주목하지도 않고, 주목할 수도 없었던 측면들을 지적함으로써, 처음엔 당연시되었던 증인들과 증거의 신빙성이 하나씩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재판 과정 내내 꼼꼼하게 관찰하고 진지하게 평결 논의에 참여했던 그들의 기여로 인해 피고의 소중한 생명이 보전되었습니다. 사법 정의뿐 아니라 사회적인 공의가 모든 시민들의 참여와 기여로만 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소망을 그들에게서 발견합니다. 배심원 9번이 여자 증인의 미간에 있던 안경 자국에 대해 지적하며 논의할 때, 코너에 몰린 배심원 3번이 왜 변호인은 그런 지적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배심원 8번이 이렇게 응대하지요. “여기에서 이 사건에 집중한 사람이 12명이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중 11명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어요.”(There are 12 people in here concentrating on this case. Eleven of us didn’t think of it, either.)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만이 사법 정의와 사회 공의 실현에 기여할 몫이 엄존합니다. 모든 민주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하는 집단 지성을 통해 우리 사회 속에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는(let justice roll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like an ever-flowing stream, 아모스 5:24) 날이 임하길 고대하고 기도합니다.

 

-온 세상에 편만한 보편 원리: 공의와 공동선 실행-

정찬주 작가가 인도 여행을 하는 중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마이크를 잡고 한문을 가르치는 분에게 “맹자”에 대해 가르침을 청해 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맹자”의 핵심을 ‘인’(仁)과 ‘의’(義)로 짚으면서, ‘인’은 측은지심(惻隱之心=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의’는 부정한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분의 얘기가 끝났을 때 정 작가는 마이크를 잡고 “맹자”의 ‘인’과 ‘의’는 불교의 자비(慈悲)와 동일하다는 점을 덧붙여주었습니다. 즉 ‘자’는 ‘인’과 같고, ‘비’는 의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와 ‘비’를 같은 개념으로 보고 연민이나 사랑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비’ 자를 파자하면 ‘비’(非)+‘심’(心) 자로 ‘아니라고 하는 마음’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지요(“법정스님 인생응원가”). 결국 유교의 핵심 사상이 사랑을 베풀고 의를 발현하는 것이듯이, 불교의 핵심 교훈도 긍휼히 여기고 불의를 바로 잡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성구가 여럿 있습니다. 마태복음 22:37-40에서는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구약 전체의 토대라고 지적합니다. 황금률로 회자되는 마태복음 7:12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것이 구약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언급합니다. 마태복음 23:23에서는 “공의와 긍휼과 신실하심”(justice and mercy and faithfulness)이 구약 율법의 핵심을 가리키는 중요한 정신이라고 가르치지요. 미가 6:8도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을 명백하게 열어 밝히고 있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He has told you,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es the LORD require of you But to do justice, to love kindness,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미가 6:8)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이전의 언약(예컨대, 신명기 10:12-19) 속에서 인간 사회 속에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what is good)를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요약하는 말입니다. 즉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즉, 자발적으로 약자들을 보호하며], 겸손히[혹은 언약적인 요구들의 측면에서 ‘사려 깊게 행하면서’] 우리 하나님과 함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New Bible Commentary: 21st Century Edition). 경천애인이라는 삶의 방식이 근간을 이루는 사회 공의 구현은 온 세상 모든 이들의 양심과 정신 속에 각인된 인류 사회의 원형이자 이상향입니다. 이 보편적 원리가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온전히 실현되도록 하는 이 고귀한 과업에 우리 각자의 생애를 겁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