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대한 교육”으로 위무해 주는 문학 세계
“장미의 이름”의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가 ‘문학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에코의 위대한 강연”). 주로 소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소설이란 있을 법한 세상을 묘사하고 구성하는 문학 세계이므로, 독자가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소설 속의 가능한 세계라고 지적합니다. 가능한 세계는 아주 많지만,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와 너무 동떨어진 배경을 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셜록 홈스의 이야기는 당시의 런던을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만약 왓슨이 다뉴브강 넵스키 광장 모퉁이에 서 있는 에펠탑을 보려고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건너갔다.”라고 하면 우리는 이상하게 느낄 것입니다. 세인트 제임스 공원은 런던에 있지만, 에펠탑을 비롯한 다른 지명들은 런던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지요. 다뉴브강은 독일의 바덴에서 시작하여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비롯한 발칸 국가들을 거쳐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고, 넵스키 광장은 러시아의 서북부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니까요. 그 세계 속에서 작가는 개연성 있는 인물을 창조하여 정말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척하고”, 우리는 그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바리 부인이나, 안나 카레니나에게 감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사의 규약에 따라 그 인물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처럼 사는 척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에코는 그 강연의 말미에서 문학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운명(fatum)에 대한 교육”이라고 언급합니다. 제게 의미심장한 언명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논지는 이러합니다. 우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동적 인물”이라는 존재론적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피조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틈에서 떠돌고 우리의 생각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누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다’, ‘오셀로처럼 질투가 심하다’, ‘햄릿처럼 의심에 빠졌다’, ‘타르튀프(몰리에르가 1664년에 발표한 희극) 같은 위선자다’라고 말하곤 하지요. 다른 한편으로 소설 속 인물은 “자기 운명에 빼도 박도 못하게 고정되어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 인물의 속성이 텍스트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기 때문에 그 속성들을 통해서만 그 인물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에코는 이렇게 제한된 방식으로 어떤 인물이 묘사되어도, 실제적인 인물인 자기 아버지보다 그 인물을 더 많이 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아버지의 경우는 그가 표현하지 않았던 생각이나 감정은 영영 알 수 없지만, 소설 속 인물의 경우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 아는 셈이기 때문이지요.
이 지점에서 에코는 다시 역설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어 감정이입이 가능한 이 인물에게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비록 소설을 읽으면서 그 인물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안타깝게 전개되는 상황을 접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플롯을 바랄 수는 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다시 쓰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햄릿과 오필리어가 결혼해서 덴마크의 왕과 왕비가 되기를, 보바리 부인이 먹은 비소가 해독되어 남편 샤를과 외동딸 베르트와 행복하게 살기를, 안드레이 공작(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이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죽지 않기를,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순간 공주가 나타나 그에게 키스함으로써 그가 프라하에서 왕자 같은 사내로 변신하기를 고대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ChatGPT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이런 고전적인 스토리들도 얼마든지 다양한 조건을 상정하여 개작할 수 있겠지만, 아무도 그 개작된 내용에 감동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가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이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만이 “그녀를 우리네 삶의 애수 어린 동반자로 만들어 주”니까요. 요컨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인물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소설 속에서 개연성 있는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영원히,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욕망이 닿지 않게, 일은 다 일어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좌절을 받아들이고 그로써 숙명에 전율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주요 기능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에코는 이 ‘운명에 대한 교육’이야말로 “허구 속의 인물들, 속세의 성인들과 신자들의 성인들이 지닌 패러다임적인 가치”라고 강조합니다.
-허구 속의 인물들이 지닌 패러다임적인 가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속세의 성인들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의미하는 패러다임적인 가치를 어떻게 온전히 다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세종대왕은 창의적인 지성과 성실한 애민 정신으로 신산한 백성들의 삶을 돌본 통치자 패러다임을 제공해 줍니다. 이순신 장군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백척간두의 시기에 애국애족의 일념과 탁월한 기량으로 나라를 구한 지도자 패러다임을 공급해 줍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이름으로 원수를 처단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삶을 드린 고귀한 시민 패러다임을 현시해 줍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 국민들은 그분들로부터 신선한 위로를 받고 새로운 영감을 얻어 그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바울과 같은 신자들의 성인이 전 세계 그리스도인에게 지닌 가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각각 믿음의 조상이라는 패러다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패러다임, 헌신적인 이방인 선교의 개척자라는 패러다임으로, 그들은 장구한 세월 동안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과 일상적 삶을 일구어 주었습니다.
에코는 소설 속의 인물들도 위 인물들과 동일한 패러다임적인 가치를 품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읽은 소설 작품 중에서 이러한 가치를 품고 있는 인물들의 예를 들라면, 저는 “돈키호테”의 마르셀라, “반지의 제왕”의 아라고른, “인간 희극”의 스펭글러, “위대한 유산”의 조 가저리, “노인과 바다”의 마놀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멜라니를 꼽습니다. 각 소설에서 결정적인 주인공들은 아니지만, 고귀한 품성과 성숙한 인격으로 제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셀라는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는 여자 목자로서 자기에게 구애하는 모든 남자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시원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자연과 벗하며 사는 데 자기 생애를 겁니다. 아라고른은 왕가의 후손으로 장차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지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고된 업무를 겸허하게 받들며 왕이 되어서도 호빗들에게 머리 숙여 사례하는 품위를 현시합니다. 스펭글러는 전신국 사무국장 역할을 감당하면서 자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친절하고 밝은 얼굴로 다가가 그들의 필요를 헌신적으로 채워 주는 삶을 열어 밝힙니다. 조 가저리는 성실한 대장장이로서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정성스럽게 다른 이들의 필요를 섬기는 내유외강의 인격적 면모를 발휘합니다. 마놀린은 산티아고의 조수로서 자기를 믿고 동역자로 여겨준 그를 심오한 동정심과 애정으로 섬깁니다. 멜라니는 스칼렛과는 대조적인 인물로서 늘 차분하고 겸손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중에 전쟁과 같은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미덕을 유지하여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도덕적인 지도력을 현시합니다. 이들은 역사상 살아 숨 쉬던 인물만큼이나, 어떤 경우에는 그들보다 더 생생한 인물들로 제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 영혼의 동반자들인 셈이지요.
작고한 이병주 작가가 “지적 생활의 즐거움”이란 책 속에서 자기의 유별난 습관 한 가지를 소개할 때 마치 마음이 통하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격렬하게 반겼던 적이 있습니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갈 때 생각한다. 사르트르를 만나 봐야겠다. 카뮈와의 논쟁을 한 번 더 읽어보고 심판을 내려야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가운데 나폴레옹이 목욕하는 장면을 챙겨 봐야겠다. 서재에 들어서면 전등이란 전등을 죄다 켜 놓고 장군이 열병(閱兵)하듯 서가를 둘러본다. 사마천, 헤로도토스,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제퍼슨, 링컨 등을 한꺼번에 꺼내 놓고 토론을 시킨다.”
그는 주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역사적인 실제 인물들을 다 불러내어 토론을 시키는 장면을 그리곤 했지만, 저는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이 넉넉하고 품위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을 한 자리로 불러내어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이렇게 얼마간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여러 가지 주변 상황들로 인해 혼란해진 마음이 잠잠해지고 위로받아, 직면한 난관을 헤쳐 나갈 새로운 용기를 얻곤 했습니다. 제가 누린 마음의 위로와 용기는 그 인물들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처한 고난과 역경을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들을 그렇게 품위 있고 고귀한 자세로 극복하여 가치 있는 인생을 영위할 수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용기 있는 지각이 생긴 것이지요. 소설 속 인물들이 운명적인 삶의 방향성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해 준 덕입니다. 이렇게 살면 패망한다는 숙명적 패러다임, 그렇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을 구가한다는 필연적 인식의 체계 말입니다. 가히 문학은 ‘다오’(the Tao)가 의인화된 현장으로서 하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밝힙니다. 문학 작품을 통해 ‘운명에 대한 교육’을 넉넉하게 누립시다. (끝)
'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법 정의를 구현한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 (5) | 2023.06.01 |
---|---|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 2023.05.19 |
6. The Unlikeliest Ambition (가장 야망 같지 않은 야망) (0) | 2021.12.14 |
5. The First and Foremost Ambition (최고의 야망) (0) | 2021.12.10 |
3. Thanksgiving in a Thankless World (감사 없는 세상에서 감사하기) (0) | 2021.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