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정의를 선양하고 공동선을 실행하는 민주 사회 구현-
-검사와 ‘삼무’(三無) 정권-
현 정권을 대표하는 단어로 제게는 세 단어가 떠오릅니다. 무지(無知), 무도(無道) 및 무리(無理)입니다. 지난 1년간 현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이 언급한 몰상식하고 자가당착에 빠진 그 숱한 말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좌절하게 했습니다. 그 말의 배후에는 자신들의 무지에 대한 무지가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159명의 희생자를 낳은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대통령과 총리나 주무 장관이 취한 태도는 부도덕의 끝판왕이었습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현 대통령은 제대로 된 사과 한번 한 적 없고, 무책임하고 무능한 주무 장관을 징계하기는커녕 두둔만 해댔으며, 심지어 희생자 가족들의 손 한번 잡아주지 않은 채 도리어 그들의 연대와 소통을 방해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지요. 최근에 현 대통령은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8년 10월 30일/11월 29일)을 무시한 채, 일본 측에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 방안을 제시하는 엄중한 월권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민주공화국의 근간이 되는 삼권분립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를 감행한 것입니다. 사법부에 반기를 든 현 대통령은 입법부의 권위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국회가 통과한 법안에 대한 ‘거부권 정치’, 그 법안을 우회하는 ‘시행령 통치’를 일상화해왔지요. 사정이 이러하니, 급기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나서 그의 퇴진을 촉구하는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호소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자업자득입니다.
무지하고 부도덕하며 월권행위에 취한 현 정권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검찰 공화국’입니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올해 3월까지 무려 136명의 검찰 출신들로 핵심 권력기관의 요직을 장악해버린 거지요. 무소불위의 제왕적 권력을 가진 것만으로 부족했을까요? 아마도 자기처럼 하극상을 벌일 인물들을 염두에 둔 포석인지도 모르지요. 자기 집권에 기여한 포상도 할 겸, 직접적인 자기 권력하에 두고 관리도 할 겸. 이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자기들이 무엇이 무지한지 모르는 이들이 앞으로 거덜 낼 나라 살림과 그들이 마비시킬 국가 기능이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의 적은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자기들을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 줄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기관차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기 상황이 닥치면 그들은 또 잔기술을 부려 그 기관차에서 탈출하겠지요. 애꿎은 우리 서민들만 죽어날 테고. 그러나 우리가 대통령 하라고 뽑은 인물이니 어떡합니까? 이것 또한 자업자득입니다.
현시점에서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어둡게 보이지만, 모쪼록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 지난 1년 이상 동안 지속해 온 ‘삼무’(三無) 정권 행태를 뉘우치고 신실한 민복(民僕)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고대합니다. 특히 검찰청의 검사들도 이미 사문화된 ‘검사동일체’ 원칙이나 조직 이기주의를 박차고 일어나, 오직 법률과 각자의 정의감에 근거하여 기소하고 소추함으로써 사건 속 진실을 밝히는 그 소명을 성실하게 감당해 가길 고대합니다.
-판사와 사법 살인-
21세기 대명천지 민주주의 세상에 초헌법적 검찰 권력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만큼 우리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대상이 또 있습니다. 헌법이 임기와 신분을 보장하는 헌법기관이자, 소위 민주주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 법관들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전시 총동원체제를 구축한다면서 온갖 권한을 집중시켜 준 검찰이 그 기형적 권력을 지금까지 휘두르고 있듯이, “돌이켜 보면 일제 시대 이래 우리의 사법부는 철저히 식민지 지배의 수단이었고 독재정권의 하수인에 불과했습니다.”(이상수 교수, “프레시안”, 2006) 예컨대 조봉암 사법 살인 판결(이승만 정권), 동백림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박정희 정권),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전두환 정권),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노태우 정권)을 돌이켜 보세요. 그 사건들의 담당 판사들은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법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5년)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당시 대법원이 그 피의자들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8명에게 사형이 확정된 후, 18시간 만에 전원 사형이 집행되었지요. ‘진실위’(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5년에 밝힌 내용에 의하면, 1964년의 1차 “인혁당은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실재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서클 형태 모임”이라고 결론지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받은 ‘인혁당 재건위’도 “단체의 실재를 입증할 물증이나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이 인혁당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증거는 자백 이외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하여 2007년에 법원은 재심을 통해 사형을 받은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지요.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지금은 사법부가 환골탈태했을까요? 우리나라 사회는 전반적이고도 점진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지만, 사법부는 사법권의 독립을 빙자하면서 그 특권주의적 행태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양승태 사법 농단 사태가 발생한 게 불과 몇 년 전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2011년 9월~2017년 9월)에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사건이었지요. 사법부가 능동적으로 앞장서서 대통령 권력에 빌붙어 재판에 개입하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했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태에 연루돼 검찰이 ‘비위 법관’으로 통보한 판사만 66명이고, 재판에 넘긴 전·현직 판사는 14명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무려 6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처벌과 징계가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사건의 몸통 격인 양승태에 대한 1심이 아직도 진행 중인데 무려 1,500일이 넘도록 별다른 진척이 없는 상태이고, 그 판사들 중 상당수가 무죄를 받아 법원을 떠났지요. 그들 중에는 과감하게도 사법 농단의 또 다른 장본인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자리 잡은 이들도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국민이 바로 이런 인물들의 판결에 놀아났다는 데 등골이 섬뜩하지 않습니까?
사법부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불신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OECD 국가(38개국) 중에 “사법체계와 법원에 대한 시민의 신뢰도”(Citizen confidence in the judiciary system and the courts) 면에서 우리나라는 34위(36개국만 조사됨)를 기록했습니다(2021년). 꼴찌인 셈이지요. 1-9위까지가 모두 독일식 참심제[국민 가운데에서 선출된 사람이 법관과 함께 합의체를 구성하는 제도]를 활용하는 국가들[노르웨이, 덴마크, 스위스, 독일 등]이고, 일본도 15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1위인 노르웨이 사법부의 신뢰도가 91%인데 반해, 우리나라 사법부는 겨우 22%에 불과하지요. 인기 없는 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보다 더 낮습니다. 이 참혹한 현실 역시 자업자득이지요. 자기 세력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정부와 언론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이면서 재판에 개입하거나 거래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한 법원을 어느 국민이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 해묵은 전관예우가 여전히 작동하고,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온 국민이 알고 있지요.
곽상도 전 의원의 아들 곽병채 씨가 화천대유로부터 퇴직금 50억을 받은 것에 대해 대가성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며 곽 의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이준철 판사의 후안무치를 보세요. 50억 원이란 돈[정상적인 퇴직금은 2,300만 원정도이니, 200배가 훨씬 넘는 액수]이 “사회 통념상 이례적으로 과다하다고 판단”된다고 하더라도, “곽 전 의원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긴 어렵고, 아들이 받은 돈을 본인이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없다.”라고 지적하면서 뇌물과 알선수재 혐의는 무죄라고 판결했습니다. 주절과 양보절을 뒤집어엎은 이례적인 말장난이지요. 사실상 “곽 전 의원이 (...) 보긴 어렵고, 아들이 (...) 볼 수도 없다고 하더라도, 사회 통념상 이례적으로 과다하다고 판단되므로 뇌물과 알선수재 죄에 해당한다.”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원래 뇌물이란 게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하여 넌지시 건네는 부정한 돈이나 물건”이니까요(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 세상에 어느 바보 사업가가 공공연하고 명시적인 방식으로 50억이나 되는 천문학적 액수의 뇌물을 공여한단 말입니까? 자기 아들 통해 50억 달라고 골치 아프게 조르는 그 아버지[관련자들의 녹취록에 등장]가 아니었다면, 좀 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공여했겠지요. 그렇지만 그 정도 ‘넌지시 건네는’ 선에서 마무리한 것입니다. ‘사회 통념상’ 같은 경제공동체로 이해되는 직계비속인 아들에게 ‘넌지시 건넨’ 그 50억이 뇌물이 아니면, 이준철 판사에겐 어떤 것이 뇌물일까요? 그 판사가 앞으로 그의 임기 내내 경천동지할 어떠한 판결을 더 내릴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한홍구 교수가 언급한 대로 대대적인 사법개혁이 이루어져 그 구조와 시스템이 변혁되기 전까지 현재로서는, “사법부의 독립성은 헌법기관인 법관 개개인이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으면 지켜낼 방도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청렴과 교양과 능력을 겸비한 참 법관들의 선전과 건투를 고대합니다.
-하나님의 기본 관심사인 정치와 사회 정의-
검찰 출신들이 행정부를 장악하고 이를 견제하는 한 축을 담당해야 할 사법부가 비리의 온상이 되어 버린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성경은 정치에 대한 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캐나다 기독교학문연구소(The 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의 교수였고 종교 박해의 주도적 학자인 폴 마샬(Paul Marshall)은 그 시발점을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로 잡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도전하시지요.
(창세기 4:9-1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Am I my brother's keeper?)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The voice of your brother's blood is crying to Me from the ground.)
살인자 가인의 항의성 질문과는 달리, 우리는 우리 형제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큰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 책임 중에 정치(politics)는 필수불가결한(indispensable) 영역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판사(judge) 역할을 감당하시면서 사법권을 수립하십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을 향해 정의를 요청하는 호소였기 때문입니다. ‘호소하느니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정의를 요청하는 부르짖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가난한 자들의 울부짖음(창세기 18:20, 에스겔 16:49)이나 애굽에서 노예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출애굽기 2:23-24)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지요. 이 단어는 또한 전문적인 법률 용어로서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법정에 호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아벨의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이 법률 용어 혹은 정치적 용어로 묘사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치적 권위를 지닌 분으로 등장하고 계신 것이지요.
이 첫 범죄(the first crime)는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셨습니다. 가인에 대한 정의로운 처벌은 유배(exile)였습니다. 그가 먼 땅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표지(“sign for Cain”)를 주셔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올바르게’, ‘공정하게’, ‘완전하게’의 의미]나 받으리라”(4:15)라고 선포하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인에게 선고하여 집행하신 처벌 이상을 그 누구도 가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범인을 정의롭게 처벌한 후에 그 범인을 정의롭게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 범죄 이후, 특히 홍수 심판 후부터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할 청지기로 세운 사람들이 그 책임을 직접 다루도록 이양해 주셨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세기 6:9)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인간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살인에는 형벌이 요구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노아와 그 후손들인 우리가 그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재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집행하도록 권위를 위임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에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대해 정의를 행하도록 교육하고 훈련하신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창세기 18:17-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당시 아브라함은 정의로운 판사의 역할을 맡아 소돔과 고모라의 처지에 대해 하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의인 50명에서 시작하여 의인 10명이란 조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설득하여, 의인 10명만 있다면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조를 받아냅니다. 판사로서 정의에 부합하는 적절한 결과에 도달한 것이지요. 이런 양상은 모세 시대에도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율법을 따라 개별적인 사건들을 심판해야 했습니다. 이후 사사(judges) 시대를 거쳐 왕정 시대가 도래하지요. 성경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행한 활동보다는 사사들과 왕들이 한 정치적인 활동에 훨씬 더 많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사들과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한 숱한 왕들이나 다니엘 같은 이들은 정치적인 역할을 감당하던 이들이었지요. 이들의 이야기가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정치 제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본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자들을 “너희들에게 선을 베푸는 하나님의 사역자”(a minister of God to you for good)라고 일컫는 내용입니다(4절).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셨다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마태복음 28:18), 당신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속하시고 구속하신다는 언명 속에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골로새서 1:16)도 죄다 포함된다는 점에 주목해 보세요. 정치는 주님께 대한 섬김과 동떨어진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치는 하나님의 기본적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Politics is one of God’s basic concerns.) (폴 마샬, “The Heaven Is Not My Home”, 1989)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 공의 실현-
정의로운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사를 깨달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해 갈 수 있을까요? 이 영역에서 저는 일찍부터 영국 UCCF[영국 IVF 후신] 총무를 역임한 올리버 바클리(Oliver R. Barclay, 1919-2013))에게서 중요한 교훈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 선교사인 조지프 G. 바클리(Joseph Gurney Barclay)의 아들이자 클래팜 섹트(The Clapham Sect)의 일원으로서 윌리엄 윌버포스와 동역한 토마스 F. 벅스톤(Thomas Fowell Buxton) 하원의원의 증손자였고, 존 스토트의 평생 친구(캐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2년 선배)이기도 했습니다. 정식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는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the ability to “think theologically”)을 스스로 개발하는 본을 보였고, 그러한 능력을 동역하는 참모들도 배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매일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기도했고, 매년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읽었다고 하지요.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입장에 대해 그가 나눈 교훈 몇 가지만 나누겠습니다.
첫째, 국가는 최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임을 기억합시다.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공무원들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꾼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로마 황제들이 신이 아니라 종이라고 단호하게 말한 시기는, 그들이 자기들을 신격화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황제의 주장과는 무관하게 국가 권력은 모든 권위의 원천도 아닐 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명토 박아 말한 것이지요. 국가 권력은 그리스도와 당신의 구속 경륜과 상관없는 별개의 권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내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권리입니다(골로새서 1:16-17). 주님께는 다양한 유형의 종들이 있고, 그들은 서로 다른 권위를 갖고 있지요. 예컨대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는 우리의 삶에 있어 최종적이거나 중심적인 권위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각 부처 공무원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한계(God-given limits)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본을 보인 것처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사도행전 5:29, 4:19)
둘째, 국가에 대한 몫을 정직하게 공급합시다. 국가라는 하나님의 일꾼이 자기 몫을 다할 수 있도록, 국민들은 국가가 받아 마땅한 것, 국가가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을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컨대 헌법에 기재된 대로, 국방, 납세, 교육, 근로의 의무[4대 의무] 및 환경보전의 의무와 재산권 행사의 공공 복리 적합 의무를 완수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로마서 13:7에서 바울이 언급한 시민 정신입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한편으로 이 권고는 우리가 정부에 모든 것을 다 바쳐서는 안 된다는 점도 시사합니다. 첫째 제안과 같은 맥락이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21에서 명령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Then render to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and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바울이 로마 제국의 질서를 상대화시킨 대로, 우리는 정부가 받아 마땅한 것만을 주어야 하고 정부가 위임받은 일꾼의 과업을 벗어날 때는 그 권위를 거부해야 합니다.
셋째, 국가 권력의 불의와 비리를 교정하고 미진한 부분을 개혁합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들이 불의한 정권에 굴종한 예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국가 권력이 폭압적인 독재를 전방위적으로 행사하여 국민들이 도무지 용신할 수 없던 경우도 있었지만, 국민들이 그릇된 시각을 품고 자발적으로 그런 국가 권력에 충성한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히틀러 휘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너무도 명백한 악행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도 단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권세를 따르고 있다는 변명을 대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즉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라는 로마서 13:1을 순종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로마서 13장의 원리를 명백하게 오용한 경우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국가가 무엇을 위해 제정되었는지를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상 이 장 말씀이 열어 밝히는 진리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섭리적 질서인 국가 권력이란 가능한 한 많은 선을 촉진하고 보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divine mandate)을 준수하지 않는 국가 권력은 개혁의 대상이지, 맹목적으로 순종할 대상이 아닙니다(should be reformed and not blindly obeyed).” (A. N. Triton <올리버 바클리의 필명>, “Whose World?”, 1970)
바울이 로마 제국을 향해 ‘연좌 농성’(sit-in)한 예를 기억하시는지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 주어 그 주인의 돈벌이에 손상을 입히자, 그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치안관들에게 끌고 가서 무고한 고초를 안겼습니다. 그 이튿날 치안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그 두 사람을 풀어주라고 명을 내리지요. 그래서 간수가 안녕히 가시라고 말하자, 사도 바울은 ‘연좌 농성’하기 시작합니다. “치안관들이 로마 시민인 우리를 유죄 판결도 내리지 않은 채 공공연히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와서, 슬그머니 우리를 내놓겠다는 겁니까? 안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석방해야 합니다.”(16:37) 그 결과, 치안관들이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찾아와 위로한 후 데리고 나가더니, 그 도시에서 떠나달라고 계속 사정사정해대는 장면을 연출하지요(they kept begging them to leave the city, 39절). 바울은 왜 이 농성을 했을까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의 진리가 문제 되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로마 정부가 불의하게 시민을 대우한 것을 교정하고 앞으로 정의롭게 시민을 대우할 수 있도록 일깨우는 농성 과정이 절실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선제적인 이런 조처는 그가 뒤에 남겨두고 떠나온 빌립보 교회의 신앙적 자유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가 다가 아닙니다. 나중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에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아 죽을 뻔했을 때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연설을 하게 되지요(사도행전 22장). 그 도중에 유대인들이 고함을 지르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천부장이 그를 병영 안으로 끌어들인 후 채찍질하면서 그 이유를 캐물어 보라고 명령합니다. 그 부하들이 채찍질하려고 바울을 눕혔을 때, 그가 백부장에게 한마디 합니다. “로마 시민을 유죄 판결도 내리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Is it lawful for you to scourge a man who is a Roman and uncondemned?)(25절) 이 말을 전해 들은 천부장은 직접 바울을 찾아와, 자기는 돈을 많이 들여 겨우 얻은 시민권을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획득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인인 그를 결박해 놓은 일로 두려워하게 되지요. 우리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권리를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라고 국가 권력에게 도전해야 할 때 바울의 사례를 기억하며 용기를 냅시다.
넷째,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2:1-3)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새번역)
비록 우리가 국가수반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앞뒤 문맥에 암시됨], 그 구체적인 목적은 안정되고 평온한 가운데서 우리가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비록 4절부터 바울이 복음 전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 세 구절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즉 국가의 일차적인 임무가 공동선을 보장하는 것이고 그것을 선양하는 초처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것을 진작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회 공의와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해 진력하는 정부는 복음을 전할 자유와 의로운 삶을 영위할 자유를 허용한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좋고 유익한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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