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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성서인문학의 키워드: 분별(Prudence)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2. 10.

성서인문학의 키워드: 분별(Prudence)

-성서인문학은 무엇인가?-

성서인문학은 성서와 인문학의 공통분모 속에서 지성, 감성, 영성이 한데 어우러지는 향연의 한마당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이 흙 혹은 땅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명심하는 것이 인간의 겸허한 자기 인식이지요. 영어의 인간(human)과 겸손(humility)이란 단어가 흙 또는 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란 언명은 인간의 본분을 망각한 선언입니다. 그 말은 인간 개개인이 척도라는 말이기에 상대주의라는 자기모순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영혼을 가진 생명체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창조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흙에서 난 존재 중에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초자연적인 측면은 하늘 혹은 신(神)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전인적 측면을 이해하려면 하늘에서 비롯된 메시지가 필요한 연유입니다. 그리하여 성서인문학은 땅에서 비롯된 인간적 측면을 탐색하는 인문학과 하늘에서 연유한 인간적 면모를 궁구하는 성서의 시각들을 통섭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다층적인 인간 이해와 전인적인 인간 성숙을 모색하는 장이 됩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과 성숙을 도모하는 과정엔 분별(prudence)이란 미덕이 필수적입니다. 이 덕목이 절제, 용기, 정의와 같은 행동적인 덕에 비해 지적인 덕이긴 하지만, “우리의 도덕적인 삶 전체를 형성하고 지도하여, 우리를 도덕적으로 탁월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W. 제이 우드)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이 미덕을 “덕으로 구성된 마차를 운행하는 마부”(charioteer of the virtues)로 일컫고 있지요. 다른 모든 덕목의 기반이 되면서 악은 피하고 선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일반 원리들을 특수 상황들에 적용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정한 성서인문학의 5가지 주제[심(心), 아(我), 도(道), 시(時), 학(學)] 중에 분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심’(心)이 가장 먼저 제시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이고[아(我)], 어떤 원리로 살아야 하며[도(道)], 어떻게 장기적 안목을 품어야 할 것인지[시(時)]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별하여 실행해 가는 삶이 바로 성숙의 과정[학(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실례들을 통해 이 분별의 미덕을 발휘해야 할 필요성과 그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깨어 있지 않을 때 우리 사고와 행동을 장악하기 쉬운 대상 4가지를 짚어 본 후에,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침 4가지를 제시하겠습니다.

 

-우리가 휘둘리기 쉬운 대상들은 무엇인가?-

<첫인상>

그 첫째가 첫인상(first impressions)입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후광 효과”(halo effect)라는 게 있습니다. “하나의 탁월한 특질 때문에 그 인물[상품] 전체의 가치가 과대 평가되는 효과”입니다. 어떤 사람이 A라는 일을 잘하게 되면, B, C, D와 같은 일도 잘할 것이라고 간주되는 상황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어떤 사람이 A라는 일을 잘못하게 되면, B, C, D와 같은 일도 잘못하게 될 거라고 간주되지요. 이 개념이 언제 형성되었을까요? 약 백 년 전인 1920년에 에드워드 손다이크(Edward Thorndike)라는 심리학자가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후광 효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첫인상입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First impressions count.)라는 금언이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한번 사람을 좋게 보면 그 첫인상을 지우기가 힘듭니다. 그 첫인상 때문에 그 사람이 다른 것들도 죄다 잘 할 것이라고 믿게 되지요. 고급 차량이나 화장품을 광고하면서 유명한 인물이나 아름다운 배우들을 내세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명성이나 미모 때문에, 그들이 마치 차 엔진이나 주름 방지 화장품에 대해 깊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지요. 제인 오스틴이 집필한 “오만과 편견”의 원제가 “First Impressions”이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이 측면입니다. 첫인상이 자리 잡게 되면 곧바로 오만한 안목과 편견에 찬 시각을 품게 되지요.

 

첫인상과 후광 효과가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들인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소개한 그것들의 정의와 사례들이 밝히 드러내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 이것들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그것들을 경계하고 깨어 있는 영성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인상의 폐해는 사람들을 만날 때뿐 아니라, 사건을 접할 때도 생길 수 있습니다. 당장 보기에 내게 유리하면 행운의 사건, 내게 불리하면 불운의 사건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첫인상이 그릇되었다는 것이 판명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장에는 그 사건의 전모가 한눈에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전체 맥락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첫인상의 본질에 대해 제게 경종을 울려준 작가가 있습니다. 영화 “남태평양”의 원작인 “남태평양 이야기”(Tales of the South Pacific)를 집필한 제임스 A. 미치너(James A. Michener, 1907-1997)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평생 여러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유일하게 ‘운이 좋았던 실수’(the only ‘fortunate stumble’)는 젊은 시절에 스와스모어에 있는 스트라스 헤이븐 여관에서 일하면서 겪은 일이다. 만일 그때 한 투숙객을 적시에 깨우지 못해 그의 기차를 놓치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관 주인(inn-keeper)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실수를 저질러 그는 바로 해고되었거나 스스로 그만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 이후로 “자기 인격과 교육을 연마한 결과 그가 감당할 수 있게 된 바로 그 글쓰기 스타일을 우연히 만나는 크낙한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who had the great good fortune to stumble into precisely the style of writing for which my personality and education fitted me.) 사실상 이 실수와 작가 경력 시작 사이에는 또 다른 엄청난 ‘운 좋은 사건’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가 미 해군의 종군기자로 일할 때 경험한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기가 탄 비행기가 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섬에 착륙하기 위해 몇 번 시도를 거듭하다가 그만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는 자기 막사로 바로 가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난 이제 내가 마치 위대한 사람인 것처럼 여생을 보낼 거야. (...) 내가 다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상과 사상에 내 생애를 집중할 거야.”(“I’m going to live the rest of my life as if I were a great man. <...> I’m going to concentrate my life on the biggest ideals and ideas I can handle.”) 그 이튿날부터 써 내려간 것이 바로 “남태평양 이야기”(1947년)였고,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되지요. 그는 1997년에 작고할 때까지 무려 40권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그의 책은 무려 7,500만 권이나 팔렸습니다. 결국 젊은 시절 그가 범한 ‘운 좋은 실수’와 ‘운 좋은 사건’은 당장 보기에는 불운이었으나, 자기를 퓰리처 작가요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도한 행운이었던 셈이지요. 사람이나 사건을 접할 때 첫인상을 경계하고 잘 분별합시다.

 

<전통과 관례>

그 둘째가 전통 및 관례입니다. 그것들의 가치를 폄하하자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간직해 온 사상이나 행동이나 관습을 존중하는 게 필요합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사회에서 한 해에 두 차례씩 전국민적인 명절을 지키면서 가족이나 친지들 간의 관계를 돌아보는 전통은 값진 것입니다. 비록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데 따른 일시적인 교통 체증과 혼잡함을 감내해야 하지만, 소중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진작하는 가치를 고려해 본다면 얼마든지 치를 수 있는 대가입니다.

 

그러나 전통과 관례 중에는 그 배후의 정신이 퇴색되어 개선해야 할 것들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비인간적이고 반인류적이어서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들도 있습니다. 전자의 예라면 명절 때 제사 지내는 방식을 들 수 있습니다. 작년 9월 5일에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발표한 ‘차례상 표준안’에 의하면, 추석 차례상에는 기본 6가지(송편, 나물, 구이, 김치, 과일, 술)에다 3가지(육류, 생선, 떡)를 더할 수 있지만 수고롭게 만들어야 하는 전은 올리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한다”(大禮必簡)라는 퇴색된 유학 경전(‘예기’)의 기본 정신이 다시 정립된 경우입니다. 조상을 사모하는 후손들의 정성이 담겨야 할 예식이 가족들 간에 불화의 소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에 성균관에서 개입한 것이지요. 그리고 후자의 예라면 남존여비 사상입니다. 이 21세기 대명천지 세상에 아직도 이 고루한 생각이 배어 있는 전통과 관례가 얼마나 많이 존재합니까? 오늘이라도 당장 그 사상에 근거한 전통이나 관례들을 무효화하고 무력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내에도 이런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기본 정신이나 사상의 빛이 바랜 전통과 관례가 수두룩합니다. 예컨대 십일조나 주일 성수나 금주 전통입니다. 이 민감한 세 가지 전통은 각각 그 차원이 다릅니다. 십일조는 성서적인 표현이지만, 그 의미와 정신이 왜곡되어 적용되는 경우가 많은 사례입니다. 주일 성수는 성서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성서의 정신을 가리키는 용어이지만, 그 실행의 묘를 더해야 할 사례입니다. 금주 전통은 성서적인 표현도, 성서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문화적인 맥락에서 빚어진 사례이므로, 지금에라도 올바른 자리매김을 해야 합니다.

 

먼저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수입 중 일부를 떼어 풀타임사역자나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1/10이란 숫자가 율법적으로 적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십일조에 대한 신약의 빈약한 용례와 새로운 헌금 원리를 참조해 보면 밝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은 단 두 번(마태복음 23:23=누가복음 11:42, 누가복음 18:12)뿐이었고, 그것도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일반서신서에서는 단 한 차례 소개되었으며(히브리서 7장, “십분의 일”이란 표현 7번),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취한 경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그 단어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천명하셨고(사도행전 20:35), 사도 바울은 자발적이고도 수입에 비례하여 헌금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9:6-7). 얼마든지 신앙 양심과 분별력에 따라 그 헌금의 양과 대상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헌금의 기본 정신을 무시한 채, 세례를 시행하거나 교회 일꾼들을 임명하면서 ‘자기 교회에만 내는 십일조’를 그 조건으로 내거는 행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독신 행위입니다. 자신의 믿음으로 십일조를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내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선택이겠지만, 그것을 세례받거나 임직되는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대로 분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일 성수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성경의 정신을 주일에 적용한 것입니다. 십계명 중 안식일 준수를 명하는 4계명이 어떻게 주일 성수로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주일 성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엇갈리는 견해가 존재합니다. 개혁주의 계통 안에서만 보더라도 상이한 의견들이 개진되었습니다. 예컨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Westerminster Confession)에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으므로 세상 끝 날까지 준수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에서는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를 지적하는 대신에, 공중예배에 참석하고 성령께서 내주하여 역사하시도록 함으로써 누리는 영원한 안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스위스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에서는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 방식이나 미신적인 요소를 전혀 용납하지 않고, 주일을 종교적인 의식과 거룩한 안식의 날로 거룩히 구별하여 바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입장들을 요약한 것이 바로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에서 칼뱅이 취한 입장일 것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인 요소가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미신적인 태도로 날들을 지키는 행위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주일이 안식일 대신 제정된 것이기에 동일한 원리에 따라 기능해야 한다면서, 주일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날이자, 노동을 멈추고 안식하는 날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런 안식일 혹은 주일 성수의 정신을 명심한다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흡족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잘 분별하여 얼마든지 다양한 실행 방식이 용인되어야 하고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제2스위스신앙고백”이 조금도 용인하지 않았던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 방식 중에도 배울 점은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성경이 아닌 이상, 그 내용도 글귀에 매이지 않고 잘 분별해서 독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한 선교사님이 실행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 감동적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 가정에서는 오래전부터 유대인의 본을 좇아 금요일 저녁 식사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나눈다고 합니다. 동생분이 모시고 있는 어머님과 그 가족까지도 함께 초대하여 그 시간을 가집니다. 몇 안 되는 한 가족이 다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매주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점에 두 가족과 연로하신 어머님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만찬을 나누는 것을 실행하는데 얼마나 난관이 많았을까요?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열심히 일한 온 가족이 일감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어 함께 모여 서로의 삶을 나누는 만찬이야말로,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족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여호와의 안식일”(출애굽기 20:9-10)을 누리는 최상의 적용 방식 중 한 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교회가 토요일 만찬이나 주일 아침 식사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안식을 누리는 방식으로 격려하고 배려한 적이 있는지 과문한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주일 새벽기도회부터 시작해서 오전 예배를 거쳐 오후 혹은 저녁 예배까지 다 참석하는 것을 주일 성수로 가르치고 수용하는 전통과 관례가 뿌리 깊게 내려 있을 뿐이지요. 공중예배의 전통만 있고 가족과 개인이 거룩하게 누리는 안식의 전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형국입니다.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5). 제대로 분별해야 합니다.

 

금주 전통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선 금주는 성서상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포도주는 음료수나 다름없었습니다. 때로는 약의 처방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금주가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표지가 된 것은 기독교 선교 초기의 사회, 문화적 상황에다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그들이 선교할 당시에 과도한 음주로 인한 폐해가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긴 했지만, 기독교인의 덕목으로 금주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자기 조국에서 받은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에 의하면 현대 알코올 생산 기술의 발달로 주류의 도수가 높아짐에 따라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수십 년간 알코올 소비가 만연하여 과음이 그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국민 일 인당 26.5리터를 소비하는 단계까지 진전되었으니까요. 이 소비량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는 2014년 일 인당 소비량이 8.8리터에 ‘불과’한 점을 고려해 보면 압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1920년에 미국 수정 헌법 제18조가 통과되어 주류의 생산, 유통, 판매가 불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음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이 법은 너무나 과도해서 악덕만 낳을 뿐이었습니다.”(The law was so intemperate that it could only result in vice.) 그리하여 1933년 미국 수정 헌법 제21조가 통과됨으로써 “금주법”(Prohibition)이 폐지되었습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년)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 금주법 시행 시대였지요.

 

육체적 쾌락에 대해 억제(restraint)를 가르치는 스토아학파(Stoicism)와 방종(indulgence)을 권장하는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는 절제(temperance)를 권면하는 성서상의 지혜의 양극단입니다. 절제라는 중용(moderation)의 길 대신 이 양극단을 이리저리 헤맨 것이 지난 인류 역사였고, 이 극단 추구 문화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무한정 뷔페와 디톡스 다이어트, 포르노와 순결 문화, 패스트푸드와 슬로푸드, 성 혁명과 성의 죽음, 호화 주택과 협소 주택, 번영 복음과 자기 부인의 복음.”(all-you-can-eat buffets and detox diets, pornography and purity culture, fast food and slow food, the sexual revolution and the death of sex, McMansions and tiny houses, the prosperity gospel and the gospel of self-denial.)이 바로 그 사례들이지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절제하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그 자유를 향유해야 합니다. “절제가 해방을 안겨 주는 것은 절제 ‘덕분에 우리가 즐거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즐거움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Temperance is liberating because it ‘allows us to be masters of our pleasure instead of becoming its slaves.’)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 “On Reading Well”)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마셔야 하는가, 금주해야 하는가가 본질이 아니라, 덕을 세우는 절제의 자유를 누리기가 핵심입니다. 전통과 관례들을 제대로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

그 셋째는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는 이들이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들이지만, 그들의 가르침과 됨됨이도 분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영적 지도자를 두 배로 존경해야 하지만(디모데전서 5:17), 양의 탈을 썼으나 속은 굶주린 이리인 거짓 예언자를 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7:15). 현재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의 최대 비극은 신뢰하고 좇을 만한 영적 스승을 찾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진정성 있는 지나온 삶의 궤적과 시대를 꿰뚫는 혜안으로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무하고 계도해 줄 수 있는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 말입니다. 강력한 권위와 화려한 언변으로 강단을 쥐락펴락한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들 중 탐욕의 우상 앞에 무릎 꿇는 추태를 드러내지 않은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요즘 시대에는 이 영역에서 더욱 분별의 덕목을 발휘해야 합니다. 언택트(Untact) 시대를 거쳐 온택트(Ontact=온라인을 통한 대면) 시대가 열려 온갖 설교자와 영적 지도자들을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정체불명의 설교자는 피하고 낯선 지도자도 경계하며 대하는 게 필요합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메신저의 설교도 트인 마음으로 듣되, 그 내용이 진실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사도행전 17:11). 한 발 더 나아가 듣기에 치중하는 데서 신앙 양서들을 읽기로 서서히 이동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신앙의 제반 영역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고 통찰하기 위해서입니다.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를 제대로 분별해야 합니다.

 

<양심>

마지막은 양심입니다. 양심에 휘둘린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양심도 폭군이 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선한 양심”(디모데전서 1:5, 히브리서 13:18, 베드로전서 3:16, 21)이나 “깨끗한 양심”(디모데전서 3:9)이나 “청결한 양심”(디모데후서 1:3)이 있는 반면에, “약한 양심”(고린도전서 8:7, 12)이나 “더러운 양심”(고린도전서 8:7, 디도서 1:15)이나 “화인[a branding iron] 맞은 양심”(디모데전서 4:2)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분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반쪽짜리 진리에 불과합니다. 그 양심의 상태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예컨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풍자하는 한 가지 모티프는 “타락한 문화로 인해 일그러진 양심”(the conscience that is malformed by a corrupt culture)입니다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 “On Reading Well”). 성경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릇된 것이 확연한 노예 제도에 대해 헉이 품고 있던 관념이 이런 양심으로 오도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헉이 자란 사회에서는 노예제란 좋은 것이고, 노예는 인간이 아닐 뿐 아니라 주인의 재산이므로 그 재산을 훔치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비록 19세기 당시 캐나다와 영국 및 미국 북부에 거주하던 개신교도 대부분은 노예제가 성경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제도라고 비난했지만, 헉이 사는 지역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던 것이지요. 그래서 흑인 노예인 짐이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자, 헉은 그것이 백인들이 가족들을 아끼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어찌할 줄 몰라합니다. 더구나 짐에게서 나중에 돈을 벌어 노예 생활하고 있는 자기 가족들을 사오거나 훔쳐 오겠다는 계획을 듣게 되자, 헉은 “그런 이야기를 듣자 내 등골이 오싹했다.”(It most froze me to hear such talk.)라고 기겁을 하면서 그런 범죄를 돕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지요. 나중에 톰 소여의 숙모인 샐리 펠프스의 집에서 짐을 구출하려고 할 때, 헉이 톰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럽고 비열한 짓”(dirty, low-down business)이라고 톰이 말하겠지만, 자기는 야비한 인간이니까(“I’m low down”) 짐을 훔쳐낼 작정이라고. 그러니까 입 다물고 누설하지 말아 달라고. 헉에게는 짐의 탈출을 돕겠다는 결정이 정의를 지향하는 고결한 행동이 아니었고, 도리어 자기 양심에 반하여 잘못을 저지르라는 유혹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헉은 짐의 탈출을 돕는 모험을 감행하지요. 결국 헉의 경우는 자신의 의도가 불의하다는 오도된 양심을 갖고 있었지만, 노예 친구의 자유를 위해 자기 영혼이라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용기를 보여 준 위대한 사례였던 것입니다. 자기 양심의 상태도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력을 키우는 길은 무엇인가?-

1. 경성(警省)하자. 첫인상의 폐해를 극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길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근자에 들어 인기를 끌고 있는 ‘mindfulness’라는 개념과 상통합니다. ‘마음 챙김’이나 ‘의식 집중’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부드럽게, 판단하지 않는 태도로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두뇌를 집중시키는 명상 훈련법”으로 이해됩니다(존 메디나). 그렇지만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미국 하버드대학 심리학자 앨런 랭어(Ellen Langer)에 의하면, 마음 챙김은 “적극적으로 대상을 구별 짓는 단순한 과정”(the simple process of actively drawing distinctions)입니다. 즉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finding something new)이지요. 그것이 영리한(smart) 것인지 어리석은(silly) 것인지는 상관없고, “단순히 주목하는 것”(simply noticing)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현재에 발을 딛고 살면서, 콘텍스트와 관점을 더 잘 파악하게 되어 주목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되는 기회를 이용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고 하지요. 이러한 마음 챙김이나 경성은 날마다 우리가 마주치는 사람들과 사건들에 적용해야 할 첫 번째 분별의 자세입니다.

 

2. 질의(質疑)하자. 신앙이나 일상의 문제들 중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데는 질문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도입니다. 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으면, 깨어 있기나 마음 챙기기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여쭙는 것이 필요하지만, 자신에게나 기회가 되는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게 유효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제가 질문한 내용과 그 빈도만큼 성장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3. 탐색(探索)하자. 질문하는 것과 동시에 진행해야 할 것이 바로 탐색 과정입니다. 이용 가능한 정보를 수집하여 서로 비교하고 대조해 보면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형성해 가는 것이지요. 이때 절실한 것이 바로 독서입니다. 더구나 온갖 거짓 정보들이 SNS와 인터넷 매체에 난무하는 현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자체 알고리즘에 연동되어 있는 유튜브 영상 정보를 연속적으로 접함으로써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더욱 강화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확인된 유용한 정보들을 편집해서 제공해 주는 양서들이 시급한 연유입니다.

 

4. 실행(實行)하자. 분별은 실행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질의하고 탐색한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시각과 안목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행되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명심해야 할 일은 이렇게 분별된 지혜를 우선 자기에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남의 의견이나 반응에 휘둘릴 필요도 없지만, 남에게 자기 시각을 강요하거나 남이 자기 안목을 수용할 것을 기대하지 말 일입니다. 사고의 전환은 어렵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바로 알 일입니다. 탄탄한 분별력이라는 기반 위에 확고하게 서서, 자신에게 허락된 은사와 재능과 기회를 통해 진정성 있는 실천적인 사랑의 삶을 날마나 실행해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