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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설교, 천국 시민 교육 현장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2. 10. 15.

설교, 천국 시민 교육 현장

-설교와 인문학-

 

지난해 11월 첫 주일부터 9개월간 경산의 한 교회에서 영어 설교 사역을 담당했습니다. 휴가 주일 하루를 제외하고 전한 천국 메시지가 총 38편이 됩니다. 첫 달과 마지막 두 달 외에는 주로 교회력을 따라 본문을 택하고 그것에 따라 설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약 중심의 설교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익숙한 말씀들의 의미를 새롭게 깊이 천착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9개월간 말씀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기간들이 있긴 했습니다. 그때들은 제가 풀타임으로 해야 할 과업이 있던 때라 그 차원이 달랐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지속적으로 제 관심을 요구하는 카톡 메시지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울려 댔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 누리는 데까지 침범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열매였겠지요. 매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의 눈물이자, 하나님의 은혜에 감읍하는 눈물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영문으로 된 글을 쓰고자 했던 뜻이 이렇게 직접적인 설교와 더불어 영글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인문학과 성경 내용이 통합된 영문 글쓰기를 언젠가 한번 시도해 보아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설교할 때 고려한 전개 구조는 들어가는 말, 문맥, 본문 해석, 요약 및 적용 질문 순이었습니다. 먼저 들어가는 말을 통해 청중들의 관심사를 끌어내었습니다. 문맥은 본문 해석을 위한 필수 요소였습니다. 본문에서 제시된 단어와 구와 절의 의미들을 올바로 분석하려면 그것들을 문맥 속에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본문의 경우에는 대개 그 전후 장절의 문맥만 제시하면 되지만, 서신서의 경우에는 그 전체를 다루는 게 더욱 효과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긴 호흡으로 다루는 복음서와는 달리, 서신서는 특정한 논점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짠 에세이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해석은 주로 소주제 세 가지 중심으로 전개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각 소주제마다 이유나 근거를 제시한 후 그 실례를 들어 예증했습니다. 설교의 성격상 주요 논지는 한 가지이지만, 그것을 논의하는 과정이 다소 복잡할 수 있어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유효했습니다. 이런 본문 해석 전개 방식은 미국 대학생들이 글을 쓸 때 활용하는 ‘O. R. E. O.’ 방식과 유사합니다. 먼저 의견(Opinion)을 개진한 후 그것에 대한 이유나 근거(Reason)를 대고 그 실례(Example)를 제시하고 나서 또다시 그 의견(Opinion)을 언급하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다루는 논의들은 그 근거나 연관된 사례가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 요약 내용은 청중들이 본문 말씀을 적용하는 데 적실한 도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끝으로 이 적용하는 단계를 위해 관련된 질문들을 몇 가지씩 제시했습니다.

 

-문맥이라는 ‘숲’-

이런 전개 구조를 조금 더 상세하게 논의해 보겠습니다. 먼저 문맥의 문제입니다. 설교할 때 문맥을 다루는 것은 우선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컨대 바리새인들이 범한 잘못처럼 안식일 규정을 그토록 많이 만들어 놓고도,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핵심이 무엇인지를 놓친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이지요.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핵심이 “줄어든 것을 회복하는 것”(restoring the diminished), “고갈된 것을 보충하는 것”(replenishing the drained), “부서진 것을 수리하는 것”(repairing the broken)이라는 ‘숲’을 보지 못한 채, 39가지나 되는 금지 규정을 만들어두고는 그것들을 지키기에만 노심초사했으니까요(팀 켈러).

 

한편으로 문맥은 설교 본문이 가진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주는 돋보기 역할을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크고 첫째 되는 계명”(지상명령) 두 가지를 설교할 때 그 계명의 원래 문맥을 고려하면 그 의미를 더욱 깊이 밝힐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라는 말씀은 원래 신명기 6:5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직전 구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6:4)라는 직설적 표현이 제시되어 있지요.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온전히 사랑해야 할 이유나 근거가 바로 당신만이 유일하신 신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라는 말씀은 원래 레위기 19:18에서 나온 것인데, 그 장 앞부분에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라는 직설적 표현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유나 근거가 바로 그 사랑을 통해 우리 기독교 공동체의 거룩함,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밝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현재 우리나라 교회가 침체 일로를 걷고 있는 것은 이웃 사랑에 등을 돌림으로써,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과 한통속인 이익 집단이 되어 버린 탓이 아닐까요?

 

다만 설교자의 권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설교하는 것은 그 권위의 원천 되신 하나님께서도 시도하지 않으신 방식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명령을 하실 때마다 일관되게 그 전후 문맥 속에 직설적 표현(indicative)을 제시해 주심으로써 그 명령의 근거나 이유를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명령의 문맥이라는 돋보기를 통해 그 근거나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더욱 불타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들어 국내외를 막론하고 잦아진 대규모 산불의 원인 중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병이나 유리 조각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계시는지요? 병이나 유리 조각이 렌즈 역할을 하여 햇빛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이기 때문이지요. 그 불이 온 산천을 태워 버립니다. 그 자그마한 불 한 자락이 말입니다. 산에서는 붙지 말아야 할 이 불이 우리들 심령 속에 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문맥이라는 렌즈로 생명의 말씀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놀라운 성령의 불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불길이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태우고 우리 사회까지 번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본문 해석-

문맥을 통해 초점이 잡힌 본문은 다각도로 그 의미를 밝힐 수 있었습니다. 특히 문장 구조, 주동사, 동사의 시제, 특정 단어 사용, 접속사의 의미, 정관사의 유무, 평행 본문 비교와 같은 요소들에 주목하는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문장구조> 마태복음 5장의 ‘팔복’ 본문이 ‘inclusio’, 즉 ‘수미쌍관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 복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어떤 부분의 시작과 끝부분에 유사한 자료를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북엔드 같은 틀을 만드는 문학적 기법이지요. 즉 3절과 10절은 원인을 의미하는 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 10)를 반복하고 있지요. 이 측면은 팔복의 주요 주제를 가리키고 있고, 그 현재 시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역사하는 천국을 이미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이 축복의 상태는 어떤 막연한 미래를 위해 예약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것입니다! 이 맥락에 주목하면 다른 여섯 가지 복들이 드러내는 미래 시제는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희망과 기대들을 묘사한다는 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1절은 직설적 표현 한 가지와 명령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직설적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NLT)라는 것이고, 명령 한 가지는 “다시는 율법의 종노릇하지 말라”(NLT)입니다.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을 참조하면, 그 의미상의 위력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이 구절이 헬라어로 ‘자유’, ‘당신’, ‘그리스도’, ‘자유롭게 하다’라는 네 단어로 시작되는데, 첫 번째 명사와 마지막 동사가 자유와 관련이 있지요. 헬라어 문장에서 강조가 주어지는 두 위치가 바로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이 자유를 온전히 누리시기 원하신다는 점을 절절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동사> 예수님의 대위임령을 가리키는 본문인 마태복음 28:19-20의 주동사가 ‘제자를 삼으라’라는 점에 주목하면, 3개의 현재분사[가다, 세례를 주다, 가르치다]가 이 동사를 보완해 주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위임령의 핵심이 바로 ‘제자 삼기’에 있다는 점을 확증해 주는 중요한 측면이지요. 그리고 불신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공동 책임을 지적하는 골로새서 4:2-6 본문에서 주동사가 두 개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각각 전도자 팀과 성도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임무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기도에 힘쓰라’(2절 상반절)는 권면은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와 그의 팀이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의 기회인 말씀에 대한 열린 문이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외인에 대하여 지혜로 행하라’(5절)는 권면은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이 불신자들 속에서 지혜롭게 살도록 권고하면서 자기들에게 허락된 모든 기회들을 최대한도로 활용하라고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두 명령 모두 선교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요.

 

<동사의 시제> 사도행전 2:44-45 본문(“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코이나]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의 진의를 이해하는 데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 주목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즉 45절의 두 동사[‘팔다’, ‘나누어 주다’]의 시제가 미완료 시제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 재산과 소유물을 단번에 절대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누는 과정을 암시하지요. 이 시제는 일회성 행동을 나타내는 부정과거 시제와 대조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부정과거 시제 활용의 예를 한 가지 들어본다면 이미 주목한 갈라디아서 5:1입니다. 이 구절에서 활용된 부정과거 시제는 우리가 언제, 어떻게 자유롭게 되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우리가 마침내 온전히 자유로워졌다는 영적 진실을 강조하고 있지요.

 

<특정 단어 사용> 골로새서 4:2-6 본문에서 ‘마땅히’(헬라어 ‘dei’)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불신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공동 책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전도자 팀은 ‘마땅히’ 말해야 할 만큼 명료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4절), 골로새 교인들은 믿지 않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6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한편으로는 전도자 팀이 마땅히 말해야 하는 대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신자들에게 마땅히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건전한 조언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빌립보서 1:27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권고하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신약에서 드물게 단 두 번만 등장하는 ‘politeuomai’입니다. ‘시민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한 문장으로 구성된 1:27-30 본문은 “오로지, 합당하게, 시민 생활하라!”라는 권고로 시작되는 셈입니다.

 

<접속사의 의미> 마태복음 16:25-27 본문에서 ‘왜냐하면’(헬라어로 ‘gar’)이란 단어가 세 차례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제자도에서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 점에 주목하면 영혼의 재발견, 자아 회복 및 주님의 상급이라는 그 관련 이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1-6 본문의 경우에는 율법주의적 행위나 태도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저주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5-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각 구절이 접속사 ‘왜냐하면’으로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즉 그 첫째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절)라는 믿음에 의해 장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할 필요성 때문이고, 그 둘째 이유는 행동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절) 이 구절이 바로 사도 바울 신학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요.

 

<정관사의 유무> 베드로전서 2:12(“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the day of visitation]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에서 ‘visitation’에 정관사가 붙지 않은 점에 주목하면, 성서적인 전도 전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즉 그 부분의 헬라어 원문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새번역)가 확실히 더 적확한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내리기 위해 오시는 경우가 아니라, 축복이나 구원을 가져오시는 경우라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9:44에서 지적한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와 유사한 맥락입니다. 따라서 2:11-12은 베드로가 2:13-5:11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을 요약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즉 만일 불신 사회 속에 사는 신자들이 계속해서 정욕을 멀리하고 계속해서 선한 행실을 유지해 간다면, 불신자들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42에서 두 가지 표현(‘떡을 떼다’와 ‘기도’)에 헬라어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점에 유의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즉 전자는 주의 만찬을 가리키는 반면에, 후자는 사적인 기도가 아니라 공동 기도 예배나 기도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평행 본문 비교> 요한계시록을 해설할 때만큼 평행 본문 비교가 절실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내용이 구약과 신약의 명료한 본문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 구약의 특정 용어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내용과 관련 성경 본문을 비교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14)라는 신비한 표현은 이미 구약의 다니엘 7:25과 12:7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12:1-12 본문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창세기 3:15의 예언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성경상의 모호한 구절은 항상 명확한 구절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하며, 결코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 즉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태복음 24:3)라는 질문에 대해 분명한 메시지(“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24:36)를 전해 주셨지만, 계시록의 모호한 상징들을 자기들의 기괴한 해석의 도구로 사용한 거짓 선지자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거듭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4:2-6에서 드러난 ‘반응적 전도’(Responsive Evangelism)가 전도 활동에 있어 일반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임무라는 점은 평행 본문 비교를 통해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베드로전서 2장이 그러하고, 빌립보서 1-2장도 동일한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즉 복음에 합당한 성도들의 생활 방식이 확고부동함과 연합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은 바울이 지역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옹호한 전도 철학의 중심 원리입니다. 즉 바울은 자기(결국엔 하나님)의 기쁨을 온전하게 하는 필수 요소로서 빌립보 신자들이 일심으로 이루는 견고함과 연합을 강력히 추천합니다(2:2). 이렇게 덕을 세우는 공동체 생활 방식은 한발 더 나아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불신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어, 그들 사이에서 하늘의 밝은 별처럼 빛나게 됩니다(2:15). 데살로니가전서 4장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나누기 시작하면서(4:1-12), 크게 두 가지 영역을 제시하지요. 즉 성적인 행동에 있어서의 거룩함(4:3-8)과 교회 공동체 내의 형제 사랑(4:9-12)이 그것들입니다. 형제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을 시발점으로 해서, 바울은 계속해서 그 형제 사랑이 표명되는 세 가지 영역을 설명해 줍니다(4:9-12). 즉 고요하고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고, 자기 일에 몰두하며, 자기 손으로 생산적으로 일하기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품위 있고, 신뢰할 만하며, 근면한 태도입니다. 그 결과로 “불신자들의 존경을 받게 되는 것”(12절, NIV)입니다.

 

-관찰, 관찰, 또 관찰-

문맥을 살피는 일이 나무 전체를 아우르는 ‘숲’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정 본문 한 자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포함된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게 선결과제이지요.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단계에서는 관찰하고 또 관찰하는 치열함이 요구됩니다. 본문 내의 문장 하나하나의 구조, 주동사의 용례와 시제, 특정 단어의 의미와 활용 방식들을 면밀히 고찰해 갈 뿐 아니라, 평행 본문들도 비교하고 대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상에서 이런 측면들을 다각도로 논의하던 중, 나태주 시인의 “풀꽃 (1)”이 떠올랐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그 작고 가냘픈 풀에서 피어나는 꽃 한 송이도 자세히, 오랫동안 관찰해 감에 따라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요? 설교는 설교자가 치열하게 본문 관찰에 기울인 노력의 열매여야 합니다. 자세히 보아야 하지만 오랫동안 보기도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보아야 하지만 자세히 보기도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은 그 저자인 누가가 집필할 때 취한 주목할 만한 자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it seemed fitting for me as well, having investigated everything carefully from the beginning, to write it out for you in consecutive order, most excellent Theophilus;) 아마도 정치적인 고위직 인물이었을 한 사람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당신과 연관된 ‘모든 일’을 ‘처음부터’ ‘세밀하게’ ‘공적으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애썼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저자가 글을 쓰기 전부터 시작하여 글을 마감할 때까지 이렇게 치열하고 주도면밀한 태도로 일관했다면, 그 저자의 글을 독해하고 전하는 설교자의 자세는 그 태도와 상응하거나 그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세히 그리고 오랫동안 성경 본문에 천착하여 설득력 있게 그 본문을 풀어내는 데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인문학적 역량입니다. 기본적으로 본문 속에 사용된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문장의 구조와 주동사의 용례나 시제가 드러내는 함의를 파악할 뿐 아니라, 비유나 메타포나 수미쌍관법과 같은 문학적 장치의 본질을 짚어 내는 문학적 능력 말입니다. 인본주의자(humanist)나 과학주의(scientism) 신봉자들이 만든 왜곡된 프레임에 포획되지 않고, 도리어 성경 본문의 역사적 신빙성을 논증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밝히 드러낼 수 있는 역사 소양 말입니다. 얼핏 보면 모순(paradox)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관계를 ‘이율배반’(antinomy)이란 용어로 세밀하게 구분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권위를 순환성(circularity)이라는 논리로 호도한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세계관이나 궁극적인 헌신의 문제를 다룰 때 이 순환성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요소라는 점을 지혜롭게 설득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철학 소양 말입니다.

 

-적용을 돕는 장치-

설교는 반드시 설교자와 청중들의 순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 신학의 요체를 들어 설명해 보자면, 설교가 성도들의 믿음이 사랑을 통해 일하도록 추동해야 합니다(갈라디아서 5:6). 설교할 당시에 성령께서 청중들에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간구하고 당신께 의존하는 것이 절대적이지만, 설교한 이후에 그들이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누가복음 8:15)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절실한 과제입니다. 읽고 들은 말씀을 계속 간직하면서 묵상하는 데 성경 암송이 효과적이듯이, 설교 내용을 계속 마음에 품고 삶 가운데 적용하는 데 기억을 돕는 장치가 긴요합니다.

 

이 장치로 주로 ‘두문자어’(acronym), 즉 첫머리에 오는 문자를 뽑아 만든 말을 활용해 보았습니다. 이것들은 설교한 본문을 제 삶 속에 적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삶 속에서 거듭 되새기며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 중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R.O.S.E.: 감사하는 방식과 연관하여 나눈 4가지 교훈입니다. 즉 하나님께 규칙적으로(Regularly), 넘치게(Overflowingly), 응답받은 간구 사항에 대해(For Answered Supplications), 그리고 범사에(In Everything)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4가지 방식을 표현하는 영어 표현 첫 철자들을 모으면 아름다운 꽃 ‘ROSE’가 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생에 드려야 할 감사의 꽃입니다.

S. L. A. T. E.: 예수님께서 배우고 성장하신 방식 5가지입니다(누가복음 2:40-52). 즉 앉기(Sit), 듣기(Listen), 묻기(Ask), 말하기(Tell), 적극적으로 참여하기(Engage)이지요. 각 영어 표현 첫 글자를 조합하면 ‘SLATE’라는 단어가 형성됩니다. 이 단어는 ‘Clean Slate’라는 영어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것의 의미는 새로운 출발이나 편견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또는 불신 및 불명예의 흔적이 없는 기록을 의미하지요.

S. I. R. E.: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 4가지입니다(요한복음 18:33-40). 즉 당신께서는 (1) 구세주 되신 왕(Savior-King)이십니다. (2) 중보하시는 왕(Intercessor-King)이십니다. (3) 자제하시는 왕(Self-Restraining King)이십니다. (4) 영원하신 왕(Eternal King)이십니다. 한 마디로, 당신께서는 가장 놀랍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장엄하고 가장 훌륭한 왕(SIRE)이십니다.

A. B. C.: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입니다(고린도후서 5:1-10). 즉 그리스도의 대속(Atonement), 부활의 몸(Body), 그리고 그리스도의 칭찬(Commendation) 때문이었습니다.​

H. P. & 3D.: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요약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12). 즉 그 기본은 성적인 행동에 있어서의 거룩함(Holiness, 4:3-8)과 교회 공동체 내의 형제 사랑(Philadelphia, 4:9-12)인데, 형제 사랑은 신뢰받고 근면한 태도가 어우러진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기(leading a decent life coupled with dependable and diligent attitudes)로 확대되지요. 이것은 마치 HP 노트북에서 작업한 결과가 3D 프린터로 출력되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설교문 작성-

설교 사역을 감당하는 내내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연구)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 과정 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명징한 깨달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깨달음은 당장 적어 두어야 했습니다. 외출할 때도 핸드폰 메모 앱을 활용한 이유입니다. 더욱이 사고를 명료하기 위해서도 글쓰기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베이컨이, “글쓰기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Writing maketh an exact man.”)라고 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설교문은 먼저 설교자인 제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반추하고 연구하여 그 의미를 파악한 후 명료하게 정리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설교문을 어떠한 방식으로 청중들에게 전달할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설교문은 그 자체로 청중들뿐 아니라 그 설교 현장에 있지 않은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실황 중계한 유튜브 영상이 있더라도, 보다 적확한 설교 내용은 글로 기록된 설교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작고한 세계적 설교가 존 스토트 목사(1921-2011)의 설교에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설교가는 찰스 시미언(Charles Simeon, 1759-1836) 목사였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무려 54년간이나 설교한 사역자였지요. 그렇지만 스토트 목사는 그의 설교를 들어보기는커녕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시미언 목사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사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스토트 목사는 그를 설교문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해 시미인 목사가 품은 단호한 헌신이 그 이후로 줄곧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다.”라고 스토트 목사가 언급한 대로입니다. 그래서였겠지요. 스토트 목사의 런던 아파트에 걸려 있던 많은 사진과 그림 중에 초상화는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시미언 목사였다고 합니다. 제가 설교한 38편에 대해 원문과 번역을 한데 묶어 이 블로그에 게재해 두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읽었는지는 알 수 있었으나, 그들이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모쪼록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영어 사용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밝히는 도구 하나로 사용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