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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교”로 본 선교적인 삶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2. 12. 23.

("선교 대구"에 게재된 제 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로 본 선교적인 삶

 

-“하나님의 선교”의 유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혹은 Mission of God)의 나이는 70세 혹은 88세입니다. 전 세계 선교계에 등장한, 1952년 빌링언(Willingen) 선교 대회로부터 따지면 70세입니다. 1928년 칼 바르트가 자기 강연에서 언급한 것을 바탕으로, 칼 하르텐슈타인이 1934년에 이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부터 따지면 88세이지요. 이 두 사람은 선교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사역에 기반을 두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현시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순종뿐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 표현은 원래 “하나님의 보내심”, 즉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각에 의하면 모든 인간적인 선교는 이 하나님의 보내심에 참여하고 그 보내심을 확장해 가는 데 그 의미가 존재합니다. 이 개념이 빌링언 선교 대회에서 수용된 이후로, 선교를 ‘missio dei’로 이해하는 것은 개신교 주류, 동방정교, 로마가톨릭 및 복음적인 개신교를 망라한 전 세계 기독교계를 대변하는 선교적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선교를 삼위일체 신학과 연결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 있긴 했지만, 그 본래의 의미가 약화되고 훼손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의 어떤 특정 사역을 가리키지 않고 단지 인류의 전 역사 과정에 간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만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계파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선교란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었지요. 이렇게 왜곡된 신학이 사실상 선교에서 복음 전도를 제외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이 개념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 오용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했던 연유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은 주요하고 핵심적인 성경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널리 인정되어 지금도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할 선교적 방향을 확고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특히 21세기 들어 회자되기 시작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는 개념도 사실상 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토의와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적 통찰력을 북미 지역 교회들에 접목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 미국 교회가 “기독교 세계 모델”(Christendom model), 즉 교회가 내적인 필요와 사회 내에서 문화적인 특권을 유지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기독교에 매몰되었다는 자성에서 비롯된 시도였지요. 결국 기독교 세계의 쇠퇴가 도리어 교회에게 자기의 신원이 하나님께서 복음의 증인으로서 세상에 보내신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준 셈입니다. 이렇게 70년 이상의 신학적 성찰을 통해 복음의 증인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역할을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선교는(성경에 근거하고 성경에 의해 정당성이 입증된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피조물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의 세계 역사 내에서 진행되는 하나님 자신의 선교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교”의 표지-

‘하나님의 선교’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해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은 세상 속으로 파송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선교가 교회 중심의 사역으로만 구성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교는 모든 성도의 전인적 삶에 적용됩니다. 모든 성도가 각각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므로, 선교를 자기 인생의 모든 부면 속에서 실행해 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는 불신자 사회와 문화 속으로 파송받은 선교 동역자가 되는 셈입니다. 세상 만물(=온 우주)이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었기에(골 1:15-20), 선교의 영역과 그 구체적 사역 양태는 감히 다 파악하기조차 힘듭니다. 그렇지만 선교 사역의 방향을 제시한 많은 논의 중에서 존 프랭키의 제안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가 드러내는 다섯 가지 특징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1) 복음 전도(Evangelism):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2) 양육 사역(Formation): 새 신자들을 가르치기, 세례 주기 및 양성하기.

(3) 긍휼 사역(Compassion): 인간적 필요들을 사랑의 봉사로 채워주기.

(4) 정의 구현(Justice): 불의한 사회 구조의 변혁을 꾀하기.

(5) 피조물 돌보기(Creation care): 피조물을 보호하기, 지상의 생명을 지속하고 회복하기.

 

우리나라 선교계도 이제는 이렇게 다양한 선교 사역의 의의를 깊이 이해하여, 다변화된 방식으로 국내외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음을 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도와 다른 사역들이 서로 길항하지 않고 상보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우리나라 교회가 더 깊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일반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서를 보면, 서신서의 각 상황마다 핍박과 고난이라는 상수가 존재합니다. 그것들로 인해 성도들이 놀라거나 위축되지 말고, 도리어 성령의 도우심과 복음의 소망으로 인해 교회가 연합하여 견고히 서서 인내하라는 권면이 일관성 있게 제시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직업과 일상적 삶을 통해 선행을 지속적으로 행하면서 자기들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권면이 뒤를 잇지요. 성도들이 담당하는 선행 속에 양육 사역 일부와 긍휼 사역, 정의 구현 및 피조물 돌보기가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복음 전도하라고 직접적으로 권면하는 내용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삶을 통해 성도들이 불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복음이 빛나게 되기 때문에, 그 복음의 소망에 관해 묻는 이들에게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는 권면이 있을 뿐입니다. 목회자와 선교사가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문을 통해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것이 선교가 진행되는 주된 시나리오입니다.

 

-선교적인 삶을 위한 제언-

1. 역사를 거꾸로 보자. 카이스트의 이광형 총장은 텔레비전을 거꾸로 두고 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구태의연한 사고 대신 보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반복해서 그렇게 보면 우리의 뇌가 그렇게 적응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역사를 거꾸로 보면 어떨까요? 창세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재림까지를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몸의 부활이 가장 먼저입니다. 성경은 이 소망이 바로 우리 인생의 클라이맥스라고 천명합니다(골 1:5). 이 소망이 믿음과 사랑을 추동한다고 전합니다. 우리 사고의 정점에 이 소망을 둔다면 혼란한 세상사에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튼튼하고 견고한 이 소망이야말로 인생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뚫고 나아가야 할 우리 영혼의 닻이지요(히 6:19). 이 소망의 수평선을 늘 바라봅시다.

 

2. 우리는 아직 초대교회다. 장구한 우주 역사 중 진전된 진화 과정을 고려해 보자면, 현재 우리도 초대교회 신자에 불과합니다(C. S. Lewis). 아직도 문제가 너무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초대교회 단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절망은 금물입니다. 천년을 하루같이(벧후 3:8), 한 경점같이(시 90:4) 여기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늘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지 무려 2천 년이 흘렀어도, 현대 교회의 모습은 고린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못지않습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성숙해야 할 것투성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벌써 ‘말세지말’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온전하게 변화하시기 전에는 소망이 없다는 자기충족적 예언만을 염치없이 되뇝니다. 절망 대신 오늘도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점점 더 성숙하게 변화될 것을 기대합시다(고후 3:18).

 

3. 관건은 ‘삼성하반월’(三星下半月=心)이다. 인류 역사는 그리스도교인들도 무신론자들만큼 악을 행하고 피를 많이 흘렸음을 보여 줍니다. 전자가 후자보다 도덕적으로 더 악합니다. 자신들의 숭고한 천국 복음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 드러난 기독교의 악당들(bullies)과 성인들(saints)의 행적을 두루 살핀 역사가 존 딕슨의 결론은 이러합니다. 결국엔 종교나 비종교가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열정(예를 들어 권력, 땅, 권리, 명예, 부, 또는 종교를 향한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마음”이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살펴 회개의 자리로 나갑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2-13) ‘하나님의 선교’ 사역은 그 다음입니다.

 

4. 진정한 지상명령을 실행하라. 제자 삼기는 대위임령입니다. 지상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어떻게 제자를 삼을 수 있을까요? 오늘날 국내외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린 교회들의 문제는 스스로 제자됨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제자 삼기를 지상명령으로 착각한 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열성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기가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당신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당신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지상 최대의 과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 영역이 바로 서면, 제자 삼기라는 대위임령이 올바로 수행될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라는 예수님의 약속 그대로입니다. 예수님만 좇아가면, 사람들을 제자 삼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교제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얻고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게 제자 삼기의 선결 과제입니다.

 

5. 작은 것이 아름답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 만사가 다 사소하다.”(Don't Sweat the Small Stuff ... and It's All Small Stuff)라는 잠언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리처드 칼슨). 그렇지만 “만약 우리 인생의 작고 평범한 부분들이 중요하지 않다면, 우리는 당장 원자폭탄에 의해 전멸당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라는 권면도 존재합니다(나탈리 골드버그). 전자의 잠언은 온갖 걱정거리와 두려움의 대상에 적용이 되고, 후자의 권면은 우리의 본질을 형성하는 소명, 성품, 은사, 재능, 관계와 같은 요소들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리 작게 보일지라도 고유한 나만의 것은 아름답고 고귀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양하게 많은 길 중에서, 가장 좋은 소명은 척박한 땅에 씨 뿌리기다.”(In so many different ways, the beautiful calling of sowing a hostile earth)​ “미제레레”라는 판화에 새겨진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의 혜안입니다. 특히 회교권과 힌두권을 비롯한 전 세계 미전도 종족 내에서 고군분투하는 ’하나님의 선교‘ 동역자들에게 드리는 힘찬 성원이기도 합니다. 작은 소명에 신실합시다.

 

-나가는 말-

선교학자 앤드류 월스는 기독교가 처음부터 지금껏 문화의 벽을 넘는 접촉(cross-cultural contact)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특징에 주목합니다. 그 생존 자체가 그러한 접촉에 좌우되었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유대교나 힌두교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전자는 민족 공동체에 불과하고, 후자는 한 국가 내의 민족들에게만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와 회교도 문화의 벽을 넘긴 했지만, 그 차원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특히 회교는 메카라는 중심지에서 확산되어 다른 곳에 닿긴 했지만, 그곳들이 계속 메카에 충성을 바치도록 하는 점진적인(progressive) 성격을 띠었습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순차적(serial)이었습니다. 즉 각 시대마다 다른 중심 지역들에 정착했고, 한 곳에서 쇠퇴의 기미가 보이면 다른 곳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생명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지중해 세계와 유럽을 거쳐 북미에서 생명력을 이어가던 기독교가 20세기 들어서는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꽃 피운 것을 보세요. 이제 도리어 서유럽은 우선 선교 대상 지역이 되어 버렸지요.

 

여기에서 월스는 기독교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 잡은 남반구 국가들의 면모들에 눈길을 주면서, 현대의 기독교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지리적, 인종적, 문화적, 공동체적 측면에서 더 다양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토적인 ‘오고 감’(from-to)이라는 개념이 지난 선교 운동의 기초였다면, 이제부터는 “다양한 집단들과 다양한 차원들 속에서 함께 지내면서, 각자가 자기 집단 속과 그 집단 너머로 뚫고 들어가려 한” 초기 기독교인들(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의 기독교인)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창합니다. 우선 선교 운동 중에 만난 기독교의 쇠퇴는 그 확장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으로,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수단의 일부라고 수용하자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월스가 그 수단을 ‘연약함’(vulnerability)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지난 선교 운동은 기독교의 산물이자 유용한 도구였던 교육 및 기술과 제휴하면서 발전해왔지만, 지금은 “복음의 전달자들이 복음 자체를 제외하고는 가지고 갈 선물이 아무것도 없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초대교회의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교회에서 쌀 나눠주고, 새로운 문화를 선보이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이제 교회에 남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그 복음이 우리 교회 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나라 신앙 영성가 중 한 분으로서 개신교 수도 공동체인 동광원을 설립한 이현필 선생이 집회를 하고 나면 집을 떠나 수도하려는 수도자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교회와 가정이 그를 두려워했다고 하지요. 가장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하나님 선교’의 생명이자 최고 동력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