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리체3 일상의 성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천사의 빵’,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4) 일상의 성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천사의 빵’,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4)-내가 단테다-“신곡”을 읽으며 제가 접한 최대의 반전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토록 사모하던 그녀를 만나게 되면, 얼마나 애틋한 사랑의 교감이 이루어질까 궁금해하던 차였습니다. 그 호기심과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그를 만난 베아트리체는 여왕처럼 의젓한 자태로 근엄하게 한 마디 던집니다. 그것은 결코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애인의 말투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잘 보아요. 나는 진정 베아트리체요. / 그대는 어떻게 이 산에 오르게 되었지요? / 여기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연옥-30곡) 즉 인생의 길을 잃은 단테가 어떻게 감히 죄가 설 자리가 없는 축복의 영역, 이 성스러운.. 2024. 9. 13. 일상의 성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천사의 빵’,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1) 일상의 성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천사의 빵’,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1)-하늘과 땅이 손을 맞잡기-지난 세월 동안 인문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부단히 자양분을 공급했습니다. 고대 신학은 플라톤주의, 중세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근세 개혁 신학은 인문주의라는 문예사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각각 예를 들자면, 먼저 고대 신학의 경우에는, 삼위일체론이 ‘일자(一者)’에 대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활용한 점입니다. ‘일자’가 만물의 근원이자 만물을 끌어안는 포괄자로서, 우주 만물이 모두 이 ‘일자’로부터 유출되어 나왔다는 플라톤의 사상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와 사역을 설명하는 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자’ 안에서 정신이 유출되고, 이 정신이 한편으로 창조를 위한 모든 참된 형상(idea.. 2024. 8. 31.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유명한 김영민 교수가 쓴 책 중에 "공부란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공부는 돈을 더 벌고, 더 유식해 보이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쓸모를 추구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지식 탐구를 통해, 어제의 나에게서 도망치는 재미를 느끼며 과거의 나보다 더 성숙해진 나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런 자기 갱신의 체험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 의식을 부여해 주고, 타인의 지배를 받는 삶을 거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식을 탐구하게 되면 자신의 어떤 측면이 달라지길래, 이런 자기 갱신이 이루어진다는 말일까.. 2021. 5. 2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