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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세속의 광야를 걷는 평범한 몽상가 교수의 비범한 패배와 승리,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4)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5. 5. 1.

(프린스턴 대학교, Courtesy of Sasha Zilov)

세속의 광야를 걷는 평범한 몽상가 교수의 비범한 패배와 승리,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4)

-문학을 사랑한 고독한 스승, 윌리엄 스토너-

스토너는 자신을 오랫동안 그저 그런 교사’(an indifferent one)였다고 자평하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여정 속에는 진정한 교육자의 모습이라 할 만한 빛나는 순간들과 자질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1) 학문(문학)에 대한 깊은 사랑과 순수한 열정. 먼저 그가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근원적 동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아처 슬론 교수가 간파했듯이 '문학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슬론 교수와의 상담을 통해, 스토너는 대학 졸업 이후에도 학교에 남아 계속 공부해 간다면 교수직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접하게 됩니다. 슬론 교수가 스토너 속에서 가르침의 은사를 발견했다고 확신한 근거는, 그가 문학과 사랑에 빠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You're going to be a teacher.)라고 언급하면서, 슬론 교수는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It's love, Mr. Stoner. You are in love. It's as simple as that.)라고 지적해 줍니다. 스토너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번”과의 만남을 통해 문학의 힘을 체험하고, 평생 그 열정을 간직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면모입니다. 비록 스토너가 “문학, 언어, 정신과 마음의 신비에 대한 사랑”(The love of literature, of language, of the mystery of the mind and heart)을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온”(had hidden as if it were illicit and dangerous) 기간도 있었지만, 서서히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tentatively at first, and then boldly, and then proudly)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비록 표현에 서툴고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그가 문학이라는 학문 자체에서 느끼는 기쁨과 위안, 그리고 경이감은 그의 교육 활동의 근본적인 동력이 됩니다. 진정한 교육은 가르치는 대상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2) 뒤늦은 각성을 통한 교육자로서의 정체성 확립. 스토너는 교사가 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에 걸친 자기 인식의 여정을 거쳤습니다. 는 오랫동안 자신이 훌륭한 교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가르치는 일보다 배우는 일에서 더 큰 해방감과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디스가 집을 비운 사이 강의에 몰입하는 경험을 통해, 그는 점차 변화합니다. 마침내 그는 진짜 교육자”(a teacher), “단순히 자신이 가르치는 학문의 가치를 온전히 따르는 사람,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어리석음이나 나약함, 혹은 부족함과는 무관하게 학문적 품격을 부여받은 사람”(simply a man to whom his book is true, to whom is given a dignity of art that has little to do with his foolishness or weakness or inadequacy as a man.)임을 깨닫습니다.

 

의역된 A man to whom his book is true’란 구절 중에 ‘his book’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토너가 직접 저술한 책을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스토너는 학자로서 논문을 쓰고 연구도 하지만, 지금 논의하는 이야기의 중심은 그가 교육자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맥락에서 ‘his book’은 특정한 자신의 저작물이라기보다 자신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문 분야’ 그 자체를 가리킬 것입니다. ‘Book’의 의미 중에는 ‘지식 또는 권위의 원천’(a source of knowledge or authority), 혹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작업을 수행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경험, 지식, 이해, 기술의 총합’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스토너에게 'his book'은 그가 평생을 바쳐 사랑하고 탐구해 온 '문학', 특히 그가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중세 및 르네상스 영문학이라는 지식 체계와 그 안에 담긴 진리, 가치를 상징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his book’은 그의 개인적 신념과 내면화된 진실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외부의 지식이 아니라, 스토너 자신이 깊이 공부하고 씨름하며 진심으로 그 가치를 믿고 받아들여 자신의 일부가 된 지식과 진실을 의미합니다. 즉, 그에게 ‘his book is true’라는 것은, 그가 자신이 가르치는 문학의 내용이 자신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이며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직업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선, 자신의 삶과 학문이 일치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a dignity of art’라는 표현에 나오는 ‘art’라는 단어도 단순히 ‘예술’로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Art’가 좁게는 문학을, 넓게는 인문학 또는 학문/예술 일반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닌 ‘위엄’(dignity)이란, 인간의 경험과 진리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학문/예술 자체가 지니는 고유한 가치, 중요성, 존엄성, 그리고 어쩌면 시대를 초월하는 권위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a dignity of art’란 인문학적 탐구(humanistic study) 또는 학문적 품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이 ‘학문적 품격’은 가르치는 사람 개인의 인간적인 약점(‘어리석음이나 나약함이나 부족함’)과는 별개로 존재합니다. 즉, 교사 개인이 아무리 부족하고 결함이 많을지라도, 그가 자신이 좇는 학문(‘his book’)의 진실성에 충실할 때, 그 학문 자체가 지닌 위엄이 그에게 부여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스토너는 자신의 권위나 가치가 개인적인 능력이나 인격의 완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심으로 믿고 헌신하는 학문의 위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 그는 비로소 오랜 자기 의심에서 벗어나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자각을 통해 스토너가 온전히 변화했다는 점입니다. ‘학문적 품격’에 대해 언급한 후 이어지는 문장이 그것을 확연하게 드러냅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었으나, 일단 그것을 얻고 나자 그는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존재를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다.”(It was a knowledge of which he could not speak, but one which changed him, once he had it, so that no one could mistake its presence.) 세인트루이스에서 돌아온 이디스도 그의 변화를 알아차릴 정도였으니까요. 갑자기 나타나 자기의 달라진 외모로 그를 놀래줄 작정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스토너를 보고는, “진짜로 변한 사람은 바로 그임을 알아차렸습니다.”(she knew at once that the real change had come over him.) 그의 눈빛과 존재감에서 풍겨 나오는 근본적인 내적 변화를 감지한 것입니다. 이디스의 외모가 변한 효과쯤은 단번에 날려 버릴 만큼의 심오한 변화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배우자가 그 변화를 알아차릴 만큼 확실한 변화보다 더 심오한 변화가 또 어디 있을까요?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3) 학문적 정직성과 타협하지 않는 기준. 스토너는 어린 학생들을 대할 때는 대개 상냥하고 참을성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그들이 기꺼이 하려고 하는 수준 이상의 공부를 요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들이 영문을 모를 정도로 무정할 만큼 단호한 태도로”(with an impersonal firmness that was hard for many of them to understand) 밀어붙였습니다. 찰스 워커의 박사과정 구두시험에서 스토너는 학과장 예정자인 로맥스와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워커의 게으름과 부정직과 무지를 이유로 그를 불합격시키려 합니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원칙 문제가 아니라, 자격 없는 사람을 강단에 세우는 것이 가져올 재앙을 막으려는 교육자적 양심의 발로임을 분명히 합니다. 비록 이로 인해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는 학문 공동체의 기준과 진실성을 지키려는 타협 없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는 학생들에게 단순히 지식뿐 아니라 학문하는 자세의 중요성까지 가르치는 모습입니다. 원칙을 고수하는 그의 우직한 모습은, 그의 박사과정 친구였던 데이비드 매스터스가 그에 대해 언급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자네도 환자일세.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푸른 하늘 밑에서 뛰놀고 있지.”(You, too, are among the infirm—you are the dreamer, the madman in a madder world, our own midwestern Don Quixote without his Sancho, gamboling under the blue sky.)

 

그는 ‘몽상가,’ 즉 세상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자신만의 이상적인 세계나 가치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더 미친 세상 속 광인,’ 즉 세상의 방식(성공, 권력, 타협 등)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문학적 진실, 지적 정직성 등)를 고집하는 사림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산초 없는 돈키호테’, 즉 자신을 현실 세계와 연결해주고 때로는 보호해주는, 현실적이고 약삭빠른 조력자 산초가 곁에 없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매스터스는 문학에 대한 스토너의 깊은 사랑과 지적 열정, 그리고 내면의 진실성을 인정하면서도(똑똑하다고 언급), 동시에 그것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데는 오히려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너(스토너)는 항상 세상이 실제로는 아닌 어떤 것이 되길 기대할 테고. 세상은 그런 것이 될 생각조차 없을 테니까,”(Because you'd always expect the world to be something it wasn't, something it had no wish to be.) 세상과 불화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4) 진지한 학생들과의 깊은 교감과 헌신. 그의 이런 자세가 학생들에게 참된 배움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었습니다. 스토너는 모든 학생에게 똑같이 열정적이지는 않았을 수 있지만,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가진 학생들과는 깊은 교감을 나눕니다. 그의 세미나는 교수와 학생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공간이 됩니다. 그에게도 교수로서 최고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 복학한 베테랑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는 교수로서 최고의 시절을 맞이합니다. 유행이나 관습에 무지하고,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as if those studies were life itself and not specific means to specific ends.) 그들의 태도는 스토너가 꿈꾸던 이상적인 학습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녹초가 될 때까지 즐겁게 온몸을 바쳐 일했습니다.”(he concentrated all the energies of which he was capable upon the moment of his work.) 이는 피상적인 관계가 아닌, 진정한 지적 탐구를 함께하는 학생들과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헌신하는 교육자의 모습입니다.

 

(5) 역경 속에서도 지켜낸 조용한 위엄과 인내. 스토너에게는 내면의 힘이 있었습니다. 로맥스의 집요한 괴롭힘, 불행한 가정생활, 새로운 애인과의 이별과 같은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냅니다. 그는 외부적인 성공이나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학문에 대한 믿음과 내면의 기준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는 그의 농부였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faces that were expressionless and hard and bleak)을 보여주는 그의 강인함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그에게는 성숙한 엄격함도 존재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말투에 자신감이 더 붙고”(spoke more confidently) 내면에서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a warm hard severity)이 자리 잡습니다. 이는 단순히 성격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학문과 교육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서 비롯된, 타협하지 않는 위엄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스토너는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외부적으로도 실패작처럼 보일 수 있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보여준 학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열정, 뒤늦게나마 도달한 교육자로서의 깊은 자기 인식, 학문적 진실성에 대한 고집, 진지한 학생들과의 교감, 그리고 역경을 견뎌내는 조용한 위엄은 그를 평범하지만 동시에 매우 진정한 교육자로 만드는 탁월한 면모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교육의 본질이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실함,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과정에서의 성실함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반 직장인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

스토너의 친구 매스터스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스토너는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성공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멀고, 치열한 현실 경쟁에서 쉽게 상처받고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 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You'd let it chew you up and spit you out, and you'd lie there wondering what was wrong.)라고 매스터스가 표현한 대로입니다. 그는 어쩌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대학교수로서 스토너가 보여준 삶의 궤적이, 오늘날 치열한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직장인들에게 어떤 위로와 격려를 줄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외부적 성공이 아닌 일 자체에서 의미 찾기. 스토너는 조교수 이상 승진하지 못했고, 동료(로맥스)에게 끊임없이 견제당했으며, 가정적으로도 불행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명백히 실패한삶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 연구와 가르침 속에서 깊은 의미와 기쁨, 때로는 유일한 위안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진지한 학생들과 교감하며 가르침에 몰두할 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직장인들이 겪는 좌절감(승진 누락, 인정 부족,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 속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 자체의 가치,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전문성, 성실함 속에서 삶의 의미와 자존감을 찾을 수 있다는 위로를 줍니다. 외부의 평가나 보상이 전부가 아니며, 내면의 만족과 성장이 중요함을 스토너의 삶이 보여줍니다.

 

(2) 타협과 불의 속에서도 성실성’(Integrity) 지키기. 스토너는 학문적 기준에 미달하는 찰스 워커를 통과시키라는 압력 앞에서 자신의 원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불이익을 당했지만, 자신이 믿는 학문적 양심과 진실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물론 그 역시 완벽하지 않아 다른 면에서는 타협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핵심 가치 영역에서는 타협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스토너의 모습이 직장 생활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불합리함, 부당한 요구, 때로는 비윤리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양심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외로운 싸움인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대변해 주지 않나요? 비록 즉각적인 보상이 없거나 오히려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자신의 성실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결국 내면의 평화와 존엄을 지켜준다는 격려를 얻을 수 있습니다.

 

(3) 조용한 인내와 헌신의 가치(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스토너의 삶은 극적인 사건이나 화려한 성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많은 시간을 고독하게 보냈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갔습니다. 특히 그의 교육자로서의 면모는 오랜 시간 동안의 자기 성찰과 인내 끝에 뒤늦게 발현되기도 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스토너의 삶은 평범함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요란한 성과주의나 자기 홍보(PR) 없이도, 자신의 일에 조용히 헌신하고 인내하는 삶 자체가 존중받을 만하다는 위로를 줍니다.

 

(4) ‘성공실패를 재정의할 용기. 스토너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실패작으로 여기는 시선을 의식했지만, 결국에는 그 실패라는 관념 자체가 하잘것없어 보였다고 느낍니다. 그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이 걸어온 삶의 여정과 그 안에서 느꼈던 진실한 순간들(사랑했던 기억, 학문의 기쁨 등)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인 잣대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스토너의 이야기는 스스로 삶의 의미와 성공의 기준을 재정의할 용기를 줍니다.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가치(열정, 진실성, 사랑했던 기억 등)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공일 수 있다는 격려를 건넵니다.

 

(5) 세상과 불화하더라도 자신만의 왕국을 지킬 수 있다는 희망. 스터스는 대학을 소외된 자, 불구가 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망명지, 피난처”(an asylum, a refuge from the world, for the dispossessed, the crippled)라고 냉소적으로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스토너는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이라는 자신만의 왕국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줄지라도, 그에게는 몰입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 때로 소외감을 느끼거나 부당함에 상처받는 직장인들에게, 자신이 열정을 쏟고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나 분야를 통해 내면의 중심과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거대한 세상 전체와 싸우기보다, 자신이 가치를 두는 영역에서 의미를 찾고 기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임을 시사합니다.

 

요약하자면스토너는 세상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고 수많은 약점을 지닌 인물이지만그가 보여준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정직함역경을 견뎌내는 조용한 인내그리고 외부의 평가를 넘어서는 자기 긍정의 모습치열하고 때로는 비정한 세상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직장인들에게 깊은 공감과 함께 잔잔하지만 강력한 위로와 격려를 선사합니다

 

-부당함에 대처하는 방식-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스토너가 집이나 대학에서 늘 부당하게 대우받았다고 해서, 그가 아주 주눅 든 채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점입니다. 이디스의 변덕스럽고 불합리한 처사가 내내 이어져도, 스토너는 묵묵히 인내하며 그녀의 뜻대로 순응하며 결혼 생활을 이어갑니다. 로맥스 학과장이 그에게 앙심을 품고 강의 배정이나 승진 측면에서 내내 불이익을 선사해도, 그는 성실하게 자신의 교육 철학을 지키며 학문적 품위를 지속해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이디스나 로맥스 앞에서 유약해 보이거나 비굴한 태도를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당당하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갔습니다. 그의 내면은 자유로웠고, “열정과 사랑의 힘”(the force of such passion, of such love)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He had, in odd ways, given it to every moment of his life)라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43세나 된 중견 교수(스토너)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보다 무려 열 살 이상 연하였을 강사(캐서린 드리스콜)와 새로운 사랑(불륜의 사랑이지만)을 꽃피울 만큼 과감한 열정을 품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요.

 

지금 논의하는 것이 일반 직장 상황이니 스토너와 로맥스 학과장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로맥스가 지도하는 대학원생 찰스 워커 문제로 인해 스토너와 로맥스 간에 갈등이 생긴 이후 로맥스는 오랫동안 그에게 복수합니다. 스토너가 맡아왔던 상급반 중세 문학 강독이나 대학원 세미나 대신, 초보 강사에게나 어울릴 법한 1학년 작문 수업과 2학년 개론 수업을 맡겼을 뿐 아니라, 강의 시간표도 연구와 일상생활에 불편하도록 최악으로 배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스토너는 이에 항의하지 않고 묵묵히 강의를 계속하면서 학과 내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스토너는 자신이 맡은 초급반 일반 영어 강의에서 기존의 표준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고, 대학원 수준의 중세 영어 운문과 산문중세 영문학 비판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그것에 걸맞은 과제도 부과합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불만을 제기하게 되자, 학과 측에서도 더 이상 그를 초급반에만 묶어 둘 수 없게 되고, 스토너는 다시 예전처럼 상급반 강의와 대학원 세미나를 맡게 됩니다. 로맥스가 이런 스토너를 징계하도록 학장에게 압력을 가하지만, 결국 자기가 스토너에게 당한 것을 절감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와의 관계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스토너가 정년인 65세에 퇴임하지 않고, ‘2년 옵션’(the two-year option)을 이용하여 더 가르치겠다고 한 것은 그를 제때에 내보내려고 했던 로맥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토너가 퇴직하는 해에 정교수로 진급도 시켜주고 승진 기념 만찬도 차려주겠다고 로맥스가 회유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면서 스토너는 로맥스에게 한 마디 던집니다. “홀리, 이미 오랫동안 자네와 알고 지낸 만큼 자네가 나를 나름대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나는 자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나 내게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 전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세. 그건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어.”(Holly, after all these years, I thought you knew me better than that. I've never cared a damn for what you thought you could ‘give’ me, or what you thought you could ‘do’ to me, or whatever. That isn't the point; it has never been the point.) 교수총회에서 스토너가 그 다음 학년 말에 퇴직할 것이라고 발표한 로맥스가 무안하게도, 자기는 그 시기보다 2년 늦게 퇴직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지요. 심지어 새로 취임한 그 대학 총장도 스토너의 안중에는 없었습니다. 로맥스와 가까운 그가 스토너에게 그동안 장기간 학교에 봉사했으니 이제는 충분히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다고 운을 떼자, 스토너는 총장을 “젊은이”(young man)라고 부르며 그의 말이 안 들리는 척할 정도였지요. 누가 누구에게 쩔쩔매고 있나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반전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스토너의 면모를 통해, 직장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이들에게 그가 묵묵히 보여준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소극적인 듯 보이지만 효과적인 ‘저항’의 가능성. 스토너는 로맥스와 정면으로 충돌하거나 정치적인 싸움을 벌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자신의 전문성과 시스템의 규칙을 활용하여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거나 되찾습니다. 이는 직장 내 부당한 대우나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 공개적인 저항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직장인들에게,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조용하지만 창의적인 저항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자신의 핵심 역량을 갈고 닦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전문가가 되거나, 규칙과 절차를 정확히 파악하고 활용하는 것이 때로는 정면충돌보다 더 효과적인 대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외부의 방해에도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힘. 로맥스는 스토너의 강의 시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연구 환경을 열악하게 만들어 그의 학문적 열정을 꺾으려 했습니다. 스토너는 실제로 저술을 중단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을 배반하지 않은 유일한 삶, 즉 학문으로 돌아와 다시 열정을 느낍니다. 그는 외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 즉 학문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고 에너지를 얻습니다. 조직 내 정치, 불합리한 업무 지시, 적대적인 동료 등 외부 환경이 어려울 때, 직장인들은 스토너처럼 자신이 가장 가치를 두는 '자신의 일'(핵심 업무, 전문성 개발 등)에 집중함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격려를 받습니다. 외부의 소음 속에서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즉 자신의 일과 성장에 집중하는 것이 자존감을 지키고 상황을 이겨내는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외부 평가를 초월하는 '내면의 자유'와 존엄성. 스토너가 로맥스에게 던진 마지막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로맥스가 쥐고 있는 권력(강의 배정, 승진 등)이나 그가 스토너에게 가하는 행동이 자신에게는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다’는 선언은, 스토너가 자신의 가치와 만족을 외부의 평가나 보상에 두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자신만의 왕국’은 문학에 대한 사랑과 학문적 진실성이었기에, 로맥스의 외적인 공격은 그 핵심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는 직장에서 상사나 조직의 평가, 승진이나 연봉과 같은 외적인 요소에 의해 자존감이 흔들리기 쉬운 직장인들에게 강력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가치를 외부의 인정이 아닌 내면의 기준(자신의 신념, 일에 대한 열정, 양심 등)에 둘 때, 외부의 부당한 평가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진정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내면의 기준이 확고하다면, 외부의 ‘주어지는 것’이나 ‘가해지는 행동’은 더 이상 결정적인 힘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지혜. 스토너는 로맥스의 부당한 처사를 수십 년간 견뎌냅니다. 그의 저항은 즉각적이고 감정적이지 않으며, 그는 묵묵히 인내하며 때로는 기회를 기다립니다. 1학년 수업에서의 반격이나 정년 연장 옵션 사용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전략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단기적인 성과나 즉각적인 문제 해결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직장인들에게, 때로는 인내하며 상황을 견디는 것 자체가 힘이 될 수 있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회를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당장의 어려움에 좌절하기보다 자신의 역량을 키우며 기다릴 때, 상황을 유리하게 바꿀 기회가 올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스토너가 보여준 부당함에 대처하는 방식들, 즉 조용하지만 창의적인 저항, 자신의 핵심 가치에 대한 집중, 외부 평가를 초월하는 내면의 자유와 존엄성, 그리고 인내하며 기회를 모색하는 지혜는 비록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지만, 오늘날 치열한 직장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자아내며, 각자의 자리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