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선교사 양성의 주안점
-기독교인 수 감소에 담긴 하나님의 뜻-
레슬리 뉴비긴은 1980년대 말에 출간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1989)을 다음과 같은 언명으로 마감했습니다. “어쩌면 다가오는 수십 년 동안,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는 급성장하는 반면에 유럽의 그리스도인은 계속 줄어들어 아주 극소수로 전락할지 모른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그것은 교회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이 가지를 손질하고 계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요한복음 15:1 이하). 그런 일이 발생하면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는 정원사다.’라고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그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계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자아 성찰과 회개와 새로운 헌신으로 부르는 소리임에 분명하다. 이는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온전히 이루실 것이기에.”
그리스도인 수가 주는 것은 유럽만의 얘기가 아니지요. 우리나라도 기독교인의 수가 계속 줄고 있으니까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최근에 출간한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를 참조해 보면, 2022년 종교인의 비율은 37%, 무종교인은 63%로 1998년 처음으로 조사한 이후 무종교인의 비율이 처음으로 60%대로 상승했습니다. 더 주목할 점은 종교인의 비율[2004년(57%), 2012년(55%), 2017년(47%), 2022년(37%)]과 기독교인 비율[2012년(22.5%), 2017년(20.3%), 2022년(15%)]의 하락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2027년쯤에는 기독교인 10% 시대를 접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상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이지만, 이런 상황이 도래할 때 정원사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해야 한다고 뉴비긴은 권면해 줍니다. 도리어 이것은 시작하신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아 성찰과 회개와 새로운 헌신으로 부르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성도들 숫자 감소는 선교사 수의 감소로 이어지겠지요. 교인 수가 정점을 찍었던 2012년 이후 지난 10년 동안 선교사로 지원하는 이들의 수가 급감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를 지원할 수 있는 교회들의 수와 그 재정 지원 능력도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현재로는 통계에 잡힌 선교사 수의 감소가 미미해 보이지만[2020년(22,259명), 2021년(22,210명), 2022년(22,204명)], 세대별 선교사 비율의 편중 현상[2022년 기준-50대 이상(65.5%), 40대(26.52%), 30대 이하(약 7.98%)]을 고려하면 두드러진 선교 인력 하락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선교적 상황이 우리나라 교회와 선교단체와 선교사들에게 선사해 줄 자성의 주제는 어떤 것일까요?
-선교 과열 현상에 대한 자성-
우선 실천신대 조성돈 교수가 2016년에 지적했듯이 우리나라 선교가 과열되어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조 교수가 꼽은 그 주된 이유는,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했으나, 그들을 위한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역을 마치고 귀국한 후 딸과 함께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는 한 선교사의 예를 들면서, 귀국하는 선교사들이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우리나라 선교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위한 거처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니, 그들을 위한 노후연금에 대한 배려는 언감생심이겠지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선교사를 파송하셨기에 그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책임져 주시겠지만, 교회도 하나님의 심정으로 그 선교사의 필요를 돌보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선교 과열 현상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선교 사역의 방향성 부재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선교사였던 남정우 목사는 2005년 인도차이나 한 국가에서 기독교의 퍼주기식 선교로 인해 선교 행위 금지 명령이 선포된 적도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 배경에는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있었지요. 이것은 1970년대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현지 교회들이 선언한 “선교사 모라토리엄”(Missionary Moratorium)[모라토리엄=주로 공식적인 동의의 결과로 특정 활동이나 과정을 일정한 기간 동안 멈추는 것]의 재판(再版)입니다. 물론 그 대상은 서구권 선교사들이었지요. 그 모라토리엄의 대상에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등장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1925년 존 모트[John R. Mott(1865-1955), “우리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라는 표어로 학생자원운동의 불을 지핀 선교운동가, 노벨평화상 수상.]가 서울을 방문해서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의견을 듣는 간담회를 가졌을 때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었으니까요. 그때 우리나라 대표 31명을 대신하여 한석진 목사는 동석한 선교사 대표 31명을 향해 공개 비판을 했습니다. 요약하자면, 한 목사는 선교사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용기와 물러날 시간과 때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때를 놓치지 않는 지혜”를 요구했습니다(남정우, “이야기로 푼 선교학”). 이 시점에서 선교 과열 현상의 두 가지 요인, 시스템 부족과 방향성 부재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이 필요합니다.
-근본주의에 포획된 선교 현실-
다음으로 자성할 주제는 우리나라 교회와 선교계가 미국 교회와 선교계의 판박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사역 중인 김재영 목사가 나눈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김 목사가 애틀랜타에서 콜롬비아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칼 바르트에게서 직접 배운 노 교수 한 사람이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장로교회 출신 유학생 중에는 자기가 아주 어릴 때 출석한 미국 장로교회의 자기 부모님들 세대 성도들의 신앙 행태와 닮은 이들이 많다고 말입니다(제레미 잭슨,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우리나라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무려 100여 년 동안이나 부지불식간에 서구 선교사, 특히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 행태를 답습해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수해 준 보수적인 근본주의 신학이 아직까지도 그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용어가 미국에서 생긴 것은 1920년이었으나 그 단어의 기원이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까지 100여 년간 우리나라 보수적인 기독교계와 선교계를 주름잡았다는 말이 되지요.
처음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명예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부정하는 도전 세력으로 다가온 사회적 진화론이나 자연주의적 과학 및 타협적인 기독교에 반대하여 신앙의 근본(the fundamentals of faith)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점차로 관련된 용어들의 의미가 변질되면서, 오늘날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는 용어는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특정한 극단적 태도와 과도한 경향성이 떠오르게 합니다. 근본주의가 드러낸 8가지 사고방식이라고 존 스토트가 지적한 것 중 5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먼저 학문과 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의심이 팽배해서 때로는 철저한 반지성주의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영감설에 대해서도 ‘받아쓰기 이론’(dictation theory)을 주장하면서, 성경의 인간적, 문화적 요소를 부정했습니다. ‘성경 비평’과 신중한 해석학이 설 자리가 없었지요. 흠정역 영어성경(KJV)에 대해 거의 미신에 가까운 경외심을 바치면서, 본문 비평을 소홀히 하는 빌미를 마련했습니다. 모든 성경에 대해 문자주의적 해석, 즉 ‘성경의 모든 단어를 문자 그대로 진리로 해석하기’를 적용함으로써, 성경에서 흔히 활용되는 시, 은유 및 상징이 차지하는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전천년설에 입각한 종말론(premillennial eschatology)을 주장하면서, 시온주의(Zionism)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고 성경의 예언을 독단에 찬 현대적 시각으로 해석했습니다(존 스토트,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
20여 년간의 해외 사역을 마치고 귀국한 후 제가 받은 가장 큰 충격은 이 근본주의의 망령이 아직도 우리나라 교계와 선교계를 지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지성적이고 반과학적일 뿐 아니라 인문학마저도 백안시하는 보수 기독교계 풍조는 지금도 저를 숨 막히게 합니다. 주일학교가 비고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전 세계 그리스도교계가 창조론에는 크게 3가지[즉각적 창조론(=창조과학), 점진적 창조론(=오랜 지구론), 진화적 창조론(=유신 진화론)]가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 겸허하고 열린 자세로 더 진전된 과학적 발견과 더 적절한 신학적 해석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나라에서는 왜 유독 이 근본주의적인 창조과학만이 보수 기독교회의 설교단까지 장악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을까요? 천체물리학 박사로 서울대 사범대에서 가르치면서 장신대 학부생들에게도 강의하는 최승언 교수가 경험한 일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출석하던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성경공부하면서 정상과학적 시각으로 볼 때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설명하자, 돌아온 것은 그가 진보적인 신학을 품고 있다는 핀잔이었고 어떤 목사님이 ‘창조과학이 바른 과학’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는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과학과 구약학의 비전문가가 과학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판승을 거둔 것이지요.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최 교수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보수 신학교로 꼽히는 총신대 학부생들에게도 빅뱅이론을 강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대학 구약학과 김희석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한 가지만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은 과학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러니, 성경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과학적 언어로 설명하려 하지 말라.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등등은 과학의 관점에서 토론해야 할 문제이며, 성경은 그러한 과학적 이론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사용될 만한 현대적 의미의 과학적 증거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창조-타락-구속에 관한 하나님 나라의 구속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렌즈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 과학적 토론은 기독교 과학자들에게 맡기자.”(이택환 목사의 요약) 창조과학을 그것에 적합한 자리로 연착륙하도록 돕는 일은 우리나라 보수 기독교계의 화급한 과제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이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자성은 우리나라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당면 과제입니다. 현재와 미래 우리나라 교회와 선교계의 향방을 가늠할 시금석입니다. 세상과 인간과 역사를 편협하게 이해하는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한 우리나라 교회는 사회적인 게토로 치부되는 현 입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근본주의에 물든 선교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주권을 기반으로 창조-타락-구속의 복음을 온전히 전파하면서, 자신의 삶과 창의적인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현시해갈 수 있을까요?
-깨어 있기, 사람 세우기, 먼저 제자 되기-
신자 수가 급감하고 선교사 수도 서서히 저하될 우리나라 교계와 선교계의 현실을 자아 성찰하라는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이 시점에서 어떻게 건강하고 성숙한 선교사를 양성할 수 있을까를 이상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파송 교회와 선교 단체의 역할로서 ‘시스템’을 점검하고 새롭게 구축할 필요가 뚜렷합니다. 다음으로 선교사는 자신의 ‘세계관과 신학’을 진단하고 평가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심화해 갈 뿐 아니라, 그것들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점도 드러났습니다. 교회, 선교단체 및 선교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사항은 선교의 ‘방향성’입니다. 최근에 접한 선교 현장 이야기 한 가지가 이 측면에서 제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네팔의 기독교 학교인 “언약학교”에서 사역하는 진태훈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직장 생활 경험도 없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뛰어든 선교 현장에서 바로 이사장직을 수행해야 했던 그의 선교 사역을 통해 선교의 방향성에 대해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열린 마음입니다. 자기가 비빌 지식이나 특정한 틀이 없었기에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나아갔을 때, 현지인의 입장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배워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둘째, 사람 세우기입니다. 그는 처음에 학교의 방향성을 두 가지로 잡았습니다. 우선은 학생보다 선생님을 위한 학교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말하는 교육의 중요한 요소가 “제자는 선생만큼 자란다.”라는 점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그러기 위해서 똘똘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학교가 교사들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기 위해 탈바꿈을 했고, 학교의 모든 커리큘럼이 바뀌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교사의 교수 능력 향상을 위해 아이패드를 보급해서 잘 활용하도록 계도한 이후로, 언약학교에서 7년 정도 함께 동역하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탁월한 교사로 자란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언약학교는 두 가지 미션이 생겼다고 합니다. ‘교사 지원’과 ‘네팔 학교 섬기기’입니다. 셋째, 먼저 제자 되기입니다. 진 선교사는 고백합니다. “새로운 세계관을 가르치려면 제가 그 세계관을 가지고 먼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돈의 이슈, 힘의 이슈 그리고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정말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지 않는 이상 제가 전달하는 메시지엔 힘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사랑하는 만큼,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열린 마음, 사람 세우기 및 먼저 제자 되기라는 선교적 방향성을 세우고 그 본을 보인 진 선교사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를 네팔 땅에 영광스럽게 현시하는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기원합니다.
-나가는 말-
1980년대 말에 네슬리 뉴비긴은 영국 교회가 세계 복음화라는 큰 비전을 품고 세계 선교에 임했다가 교만을 깨닫고 자성하는 과정에서 당시에 소심해지고 염려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지녀야 할 태도는 ‘자신감’(confidence)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지론이지요. 공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와 계시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요 주(主) 되심을 자신감 있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신념인 이상 순환성(circularity)을 품고 있기 때문에, 과학주의자나 합리주의자 앞에서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각각 왜 경험과 이성이 최고의 잣대가 되는지 물어보면 그 답은 뻔합니다. 경험과 이성이 자기들의 사고와 삶의 기반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왜 예수로 시작하지?”라고 우리에게 물으면,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겠지요. “예수로 시작하면 왜 안 되지?” 비록 시기와 장소와 여건은 달라도 그의 제안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자신감을 품고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는 대로 공적으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선언해야 합니다. 다만 그 조건은 이성과 감성의 가치를 존중하여 그것들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신앙과 통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와 인간 만사에 당신의 주권과 섭리로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죽음과 파괴를 통해서도 신생 창조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재는 위축되고 있는 우리나라 교회와 선교계가 새롭게 태어날 날을 고대합니다.
*이 글은 “선교대구”에 게재된 원고의 원본입니다. 본문 중 표시되지 않은 인용문 출처는 모두 기독교학문연구회 학술지인 “신앙과 학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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