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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새 책 두 권 출간되었습니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12. 31.

새 책 두 권 출간되었습니다

며칠 전(12월 28일) '부크크'를 통해 새 책이 두 권 출간되었습니다. 올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책 편집이 마무리되어 감사했습니다. 이 두 권은 그동안 제가 출간한 책 중 아홉 번째(비뚤어진 내가 빚은 고통받는 세상)와 열 번째(러셀의 섀도복싱과 신앙인의 터널 비전)입니다. 아홉 번째는 지난 책들에 포함되지 않은 소설 및 희곡 작품 여덟 편을 독해하고 감상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인간의 내면을 깊이 천착한 작품을 필두로 하여, 그 내면의 실상이 외면의 환경과 여건을 빚어가는 과정이 처절하게 드러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 번째는 그리스도교를 매도하고 과학주의와 이성을 찬양하던 한 인물의 사상의 실상을 밝히는 한편, 과학과 학문의 세계를 백안시하고 이성과 인문학의 효용을 경시하는 신앙인들의 태도를 짚어 보았습니다. 지난해 8월 말 영어예배부 사역을 마감한 후부터 쓴 글이 이 두 권 속에 녹아 있습니다. 책 제목과 같은 방향을 의도하고 쓴 것들은 아니었지만, 편집하려고 살펴 보니 거의 대부분이 그 방향성들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제 글 한 편 한 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들이 당신의 뜻을 이루리라고 소망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아래에 아홉 번째와 열 번째 책의 '들어가는 말' 일부와 이미 출간된 책 제목들을 소개합니다. 

 

-9번째 책 '들어가는 말'-

이 작품 속에는 서양 소설가 7명의 작품과 1편의 희곡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된 우리 인간의 됨됨이를 다각도로 모색하는 데서 시작하여, 우리의 비뚤어진 면모가 어떻게 자신과 가족 공동체, 사회, 국가 및 온 세계에 악영향을 끼쳐 지극한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열어 밝힙니다.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인간이 고귀한 존재인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인간 본성은 조금도 개선되거나 진전되지 않았다는 점을 천명합니다. 우리나라 사회에 만연한 온갖 무도하고 무리한 일들은 우리 각자가 품고 있는 내면의 집단적 반영입니다. 지금도 진행중인 국가 간의 전쟁들과 국지전들도 그 당사자들의 비인간적 면모의 발현입니다.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속”의 주인공인 커츠의 기행에 놀라지 마세요. 그가 상징하는 레오폴드 2세의 만행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니까요. 그 비인간의 행태는 소설이란 세계의 벽도 뛰어 넘을 만큼 사악함의 끝장판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권력과 왜곡된 욕망에 비례하여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다는 방증입니다. ‘인류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까지도 감행할 수 있지요. 우리 인간 내부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우리를 창조해 주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계시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10번째 책 '들어가는 말'-

이 책은 건전한 믿음을 진작하는 의도로 집필되었습니다. 비이성적인 것들을 믿는 오른쪽과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왼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건전한 신앙의 중도를 걷기 위해서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인류가 말을 타고 가는 주정뱅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말의 오른쪽으로 떨어진 다음에는 꼭 말의 왼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지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컨대 미신적이고도 비합리적인 것을 믿은 채 마녀사냥에 몰두하던 그들은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하자, 그것을 맹신하기 시작하여 초자연적인 신앙적 측면을 무시하는 극단을 취합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과학과 학문의 성과를 폄훼한 채 근본주의 신학에 경도됩니다. 오른쪽 극단에 근본주의 신학이 있다면, 왼쪽 극단에 과학주의자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건전한 신앙의 중도를 모색하기 위해 먼저 대표적인 과학주의자인 버트런드 러셀의 종교 에세이 하나를 심층적으로 다룹니다. 그는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1927)라는 강연 혹은 에세이로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불신자들을 오도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취한 근본주의적 행태 중 몇 가지를 상고합니다. 과학과 신앙과의 관계를 기점으로 인문학, 문화, 정치, 직업, 세계관 및 선교와 같은 주제들이 지난 세월 동안 신앙과 어떻게 관련되었는지를 고찰합니다. 모쪼록 삶의 제반 영역에 대해 성화된 분별력을 발휘하여 건전한 신앙적 입지를 마련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들이 사고의 지평을 여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를 빕니다.

 

-출간된 책 목록-

<영어 교육 관련>

1. "영어, 소통의 도구/성숙의 동반자"(2019, 2021, 부크크)

 

<성서인문학 관련>

2.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2019, 2021, 부크크)

3. "트인 마음으로 성경 읽기"(2020, 2021, 부크크)

4. "인본주의자 오디세우스는 없다"(2021, 부크크)

5.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순례자"(2021, 부크크)

6. "내면의 자산으로 풍요로운 인생소풍길"(2021, 부크크)

7. "비뚤어진 내가 빚은 고통받는 세상"(2023, 부크크)

8. "러셀의 섀도복싱과 신앙인의 터널 비전(2023, 부크크)

 

<선교 관련>

9. "선교의 길을 묻는 그대에게"(2019, 2021<개정판>, 퍼플)

10. "심금을 울리는 회교권 선교"(2020, 2021<개정판>, 퍼플)

 

-글쓰기 과정의 복기-

2018년 1월 말에 귀국한 이후부터 저는 독서하면서 학습하고 글쓰는 일을 제 소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학습한 내용을 나눌 주된 장으로 강의나 강연을 생각했습니다. 글쓰기도 강의나 강연을 하는 데 소용되는 자료들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제 전공인 영어교육에 대한 강의가 인문학과 성서인문학을 다룰 수 있는 강의의 기회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지만 강의나 강연의 장은 20여 년을 해외에서 지내다 돌아와 별다른 연고가 없이 새롭게 개척하기에는 벅찬 세계였습니다. 지난 6년 동안 누릴 수 있던 기회가 그 대상과 횟수 면에서 상당히 제한적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독서와 학습을 꾸준히 지속한 결과로 글은 계속 남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이라는 블로그를 통해 발표된 글들입니다. 인기가 많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일정량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늘 기록됩니다. 제가 고민하거나 동감하는 성서인문학적인 사안들을 함께 고민하고 동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제게는 위로가 됩니다. 강연을 통해서든 글을 통해서든 이웃들의 깊은 지적, 정서적, 영적 필요들이 채워지면 되는 것이니까요. 이 독자층을 보다 넓히기 위해 영어 블로그를 운영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영어 유튜브 채널 개설이 더 효과적이라고 여겨져 두 달 전부터 동영상을 매주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채널명: Jesse's HuBIL Centre] 이참에 한국어 채널도 하나 열었습니다. (채널명: 이 박사의 평행 세상)

 

독서하면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글로 옮기는 일은 시간과 노고가 많이 드는 일입니다. 바바라 애버크롬비가 언급한 대로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꿈을 꾸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는 일도 자주 해야 한다. 적막과 고독이 있어야 한다. 주위가 난잡해지는 상황도, 자신이 무얼 하는지 모르는 상황도 아무렇지 않게 견뎌야 한다. 퇴고를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진실, 그 이야기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 회의와 두려움과 의심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게다가 글을 쓰는 데에는 지름길도 없고 왕도도 없다." (To write takes dreaming and remembering and thinking and imagining—and very often what feels like wasting time. It takes silence and solitude. It takes being okay with making a huge mess and not knowing what you’re doing. Then it takes rewriting and struggling to find your story and the truth of the story, and then the meaning of the story. It takes being comfortable with your own doubts and fears and questions. And there’s just no fast and easy way around it.) [Barbara Abercrombie, “작가의 시작”(A Year of Writing Dangerously)]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4년 반 전부터는 그녀가 지적한 대로, '꿈을 꾸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상상해야' 했습니다. 글이 풀리지 않아 고민하다가 잠이 든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제가 창의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른 작가가 쓴 이야기의 진실과 의미를 깨닫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습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파격적인 주인공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해 하면서 관련 자료를 뒤지고 묵상하던 중 새로운 시각이 찾아온 예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더욱 난감한 점 두 가지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주변의 몰이해였습니다. 즉 "Eat, Pray, Love"를 쓴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지적한 대로, “그대의 친구들이나 식구들이 그대가 자신만의 신성한 공간에 앉아 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your friends and family are somewhat less than respectful of your sitting there in your sacred space.)란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상 외로 공부하고 글쓰는 것을 제 취미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주위에 많았습니다. 아마도 살림을 꾸려갈 만한 경제적인 수익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은 제가 어서 빨리 경제적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업 얻기를 권면도 하고 기원해 주었습니다. 그들 기대와는 달리 저는 돈 버는 일보다는 공부하고 글쓰는 일에 더 우선을 두었습니다. 그동안 인생나눔멘토 활동이나 영어 수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영어예배부를 맡기도 했지만, 제가 가장 공들인 주된 사역은 공부하고 글쓰는 일이었으니까요. 근근이 살아가더라도 제 은사와 재능에 맞는 일을 하며 인생3막을 보내겠다는 소망의 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근근이 살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기간제교사직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50대 초에 대학에서 한국어 교사직을 맡으면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아내에게, 귀국 후 1년 반이 지난 시점에 기간제 사서 교사직이 찾아왔습니다. 그 시점이 바로 제가 이 블로그를 시작한 지 한 달 후였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이제 아내가 2023학년도 말로 교사직을 내려놓게 되어 내년부터 한 번 더 근근이 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과연 근근이 살 날이 도래할까요?    

 

두 번째 난관은 글쓰는 과정의 나와 현실 속의 나라는 존재의 괴리였습니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언급한 대로, 내가 작가로서는 강하고 용감한 목소리를 품고 있지만, 현실적인 생활인으로서는 얼마나 겁쟁이(wimp)인지 발견하게 될 때마다 그 틈새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그녀는 특히 헤밍웨이가 자기 어선 안에서는 '산티아고의 위대한 인내'(the great patience of Santiago)를 쓸 수 있었지만, 집필실에서 나와서는 자기 아내를 학대하고 과음에 빠져버린 예를 듭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비록 이 괴리가 우리를 미치도록 괴롭게 하지만, "이 두 세계를 하나로 모으기 시작해야 한다"(We have to begin to bring these two worlds together.)고 역설합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the great love we feel for the world)을 느끼는 작가의 세계와 '세상을 무시하는 것'(the disregard we give it)으로 점철된 일상의 세계 사이를 극복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술이 '불침략의 행위'(the act of nonaggression)이므로 일상에서 이 예술을 실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Writing Down the Bones)]

 

한편으로 독서를 통해 성숙하면서 그 여정을 글로 옮기는 것은 즐겁고 보람찬 일감이었습니다. 우선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대로, "글쓰기는 나의 친구(your friend)"로서, 글쓰기 과정은 생명과 활력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는 원천(a constant source of life and vitality)”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고어 비달의 말을 인용하면서 던진 파격적인 표현은 제게 글쓰기의 본질을 열어 밝혔습니다.

 

고어 비달은 아주 멋진 말을 남겼다. '모든 작가와 독자들은 글을 잘 쓰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최고의 여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As every author—and every readerknows, writing well is the best trip of them all.) 하지만 그대는 글을 '잘' 쓰는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라. 그냥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니까. (Don’t even worry about writing “well”; just writing is heaven.)  [나탈리 골드버그, 위의 책]

 

글로 자기의 창의적인 생각을 명징하게 표현하는 과정은 최고의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글쓰는 일 자체가 지복이라는 경지는, 저로서는 다만 맛만 보았을 뿐입니다. 지난날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나, 매일의 삶 속에서 마음을 챙기면서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섬세한 차이'를 포착하게 될 때 느낀 전율의 형태였습니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능력은 일천한 듯하지만, 그냥 계속 글을 쓰는 일은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듭니다. 앞으로 그 깊은 단계의 지복을 경험할 날들이 기대가 됩니다.

 

이런 즐거움에 덧붙여 소수지만 꾸준하게 제 글을 읽는 독자가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제 블로그를 누구에게도 주도적으로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제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이가 물어올 때,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제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네이버나 구글의 키워드 검색을 통해 제 글을 읽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기대했던 댓글을 다는 이들은 별로 없지만, 이 글들을 통해 그들이 성서인문학과 연관된 주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우심과 위대하심을 깨닫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블로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게 허여해 주신 "말씀의 문"(a door for the word, 골로새서 4:3)인 셈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새해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언급한 카타기리 선사(禪師, Roshi)의 권면이 귀에 쟁쟁합니다. 

 

“카타기리 선사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다. ‘백 피트 장대 위에서  발짝 내딛어라.’ (Take one step off a hundred-foot pole.) (...) 사실, 백 피트짜리 장대에서 발을 뗀다고 해서 꼭 떨어진다는 법은 없다. 그 대신 하늘을 날 수도 있다. 떨어지든 날게 되든 보장이 없다. 그저 계속해서 글을 쓰라.” [위의 책]

 

문맥상으로는 성공(success)이나 실패(failure)에 안주하지 말고, 성취나 낭패(your achievements or your fiascoes)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 '가장자리에서 발을 내딛어야 한다'(step off the edge)는 권고입니다. 연연할 만한 성취는 없지만 그럴 만한 낭패는 존재했기에 제가 처한 상황에 걸맞은 조언으로 받았습니다. 2023년까지 어떤 일을 경험했더라도 2024년은 다시 한번 천 길 낭떠러지에서 주도적으로 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고. 수직 낙하의 길이 될지 비상의 길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의 은혜와 진리를 선양하는 저만의 유일한 길이므로.